턴테이블 위의 지구, 겨울밤에 듣는 詩... 들리는가 저 아득한 음악
현택훈 시인
1974년 제주출생
우송정보대 문예창작과와 목원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6년 <지용신인문학상>
2006년 <수주문학상> 우수상
2007년 <시와정신>으로 등단
2009년 시집 <지구 레코드> 다층
지구 레코드
지구를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지구는 자전을 하고
아득한 우주로 음악이 퍼진다
외삼촌이 내게 준 지구 레코드 이제는 지구가 된 외삼촌 나는 지구 레코드를 듣는다 기억은 지구의 위성이다 깊은 밤, 다리 밑으로 떨어진 외삼촌 나의 지구는 오토바이 헛바퀴에서 자전을 하고 있었다 음악은 45RPM에서 33RPM으로 서서히 시들어갔다 병원에서 마지막 자전을 한 외삼촌 나는 지구 레코드를 쓴다
지구를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지구는 자전을 하고
아득한 우주로 음악이 퍼진다
Resistance
1
벌금 대신 노역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시인이다
2
나는 종종 과속을 하고 불법 유턴을 한다
휴일엔 영화 불법 다운로드를 하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연체 중이고
술에 취한 밤이면 가끔
골목길에 영역 표시를 하고
내 이웃의 여자를 마음에 둔 적이 있다
노래방에 하트를 그리며 낙서를 한 적이 있고
남의 편지를 몰래 뜯어 본 적도 있다
사실 이 죄가 가장 큰 죄라서
몇 번 그러다가 이제는 우표만 살작 떼서 갖는다
군대에 있을 때 초코파이와 델몬트의
유혹에 빠져 부처님을 버린 적이 있다
하긴 우리의 부처님은 이해하시고 웃으셨겠지
대학교를 기독교 사학에 갔을 때도
부처님은 如來의 웃음을 지으셨을까
밀린 월세를 내지 않기 위해
야반도주를 한 죄는 너무 크구나
남의 집 신문이나 우유를 슬쩍 한 죄
그 죄값을 어떻게 받아야 하나
나의 수형생활은 외롭고 쓸쓸하다
3
사실 지구는 감옥이다
음악은 햇빛에 반짝이는 쇠창살이고
꿈은 높은 담장이다
대 작(對酌)
국밥에 소주를 마시니
새벽별이 떴다야
택실 기다리는 저 사람들도
노래 소리가 작아졌군
가로등은 너무 밝아서
고갤 숙이고 있는 것 같아
달리는 새벽바람이
아침신문을 스치네
너는 날 다시
새벽으로 데리고 왔어야
등굽은 청소미화원은
수도승처럼 거룩하지 않은가
국밥집 유리창 앞에 앉은
새벽 거리가 내게
눈물 같은
소주를 또 붓고
흐린 명조체의 시
시립 도서관 벤치 옆에 있는 비파나무엔
올해도 비파가 노랗게 익었을까
당신은 대답이 없다 나도 예전엔
나를 읽고 있는 당신처럼
책 한 권의 오후를 사랑했다
이 창은 기억할까 책을 읽다가
덮어두고서 바라보던 창 밖엔
태양이 빛나고 있었고 물에 번진
글자처럼 흐릿한 바람이
창틈으로 불어오곤 했지
구름들이 날아다니다가 대열을 놓친
철새처럼 몇 어절씩 빠져나갔고
그날 나는, 가을과 저녁의 페이지에
모음 하나가 되어 한 형태소에 들어갔다
삶이란 서로 가슴에 활자를
새기는 일이 었다 그리고 나는,
창 밖을 바라보면서 조그맣게
허밍을 내는 것을 좋아하던
한 사람을 기억한다 그의
목소리는 비닐표지처럼 반짝였다
그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나는
시를 썼다 바람이 조금 열린
창틈 사이로 불어온다 이제
당신은 창 밖이 궁금해질 것이다
어순에 맞게 차례대로 흘러가고 있을
계절들 굳이 비파나무 아래서
시를 쓰지 않아도 형광등은
가르랑거리고 단음계의 노래를
몇 소절 부르지 않아도
한 페이지가 넘겨지더라
시옷 자음처럼 쓸쓸한,
턱을 괸 당신의 옆얼굴
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른손잡이
특기 란에 무엇을 적을 지 몰라
고심하는 사이 시계에 나뭇잎이 돋았네.
새로 가입한 카페에선 문전박대를 당하고,
화요일 오후 두 시에 정기간행물실에 앉아있으니
책벌레가 내 귀를 갉아먹네.
뭐 특별한 재주도 없이 성적은 中下
고등학교 연합고사에서 떨어지고,
학력고사에서 떨어지고,
전문대 갔다가 적응 못해서 휘청거리다가,
신체등급 1급 현역! 내 생애 첫 합격이었네.
수류탄을 쥐었을 때, 절실히 느꼈네
난 오른손잡이야.
막노동판에 나갔더니 잘 하는 게 뭔지 내게 물어
나는 雜夫가 되었네.
소주를 오른손으로 들이키고
버스에서 본 갈래머리 아가씨 눈앞에 선해
집으로 들어와 바지를 내려,
이미 뜨거워진 그것을 쥐었을 때,
절실히 느꼈네 난 오른손잡이야
달력을 걷으며
성냥갑 같은 작은 집들은 모두
불에 타 사그라졌는지도 모른다
길섶과 담이 맞닿은 틈 사이로
피던 맨드라미처럼
나는 오르막길을 오르내리며
희망이라는 단어를 적곤 했다
일산화탄소 가득한 머리로
병원으로 실려간 어머니
나의 얼굴에 생긴 각질이
연어의 비늘이 될 순 없을까
골목길 끝 나의 월세방은
낯이 익다, 닮았다
나의 화북동(和北洞)과
나는 라면 상자 속에
다음 계절의 옷을 넣어둔다
달력의 그림 눈 덮인 한라산이
시원하다
협재
밀물일 때 지붕까지 잠겨버리지만 썰물이 바다로 가는 길을 내주어 마음이 저녁일 때 드러나는 집 하루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듯 기억도 잠겨 있다가 때때로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소년은 여전히 그 집에서 밖으로 나올 줄 모른다 썰물이 되어 창문을 열면 바닷바람이 들어와서 바다 그림이 있는 액자가 되고 푸른 식탁보가 있는 탁자가 된다 뒤뜰에서는 소년이 게의 길을 따라가다가 두 사람이 알몸으로 물장구치는 것을 본다 게가 소년의 발가락을 문다 여자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남자가 그물 손질을 하는 저녁에 소년은 마루에 누워 그림책을 본다 남자가 소년에게 수수께끼를 내기도 하는데 소년은 한 문제도 맞추지 못한다 소년에겐 너무 어려운 문제다 울타리 너머 바다에서 비바람이 친다 소년에게 오리온자리를 찾게 해준 남자는 바다로 간 뒤 돌아오지 않는다 여자는 배를 타고서 먼 나라로 가고 소년은 머리카락 같은 미역을 혼자 씻는다 밤이면 갯바위 위의 집도 불을 켠다 산호초가 되어 가는 녹색 지붕 창가에 있는 게 한 마리와 소년의 눈이 마주친다 소년은 여전히 그 수수께끼의 정답을 모른다 기억이 거품을 게워내고 갯바위 위의 집 한 채 다시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독백
비 오는 저녁
차일피일하면서 가지 못했던
문병을 간다
언덕길 끝에 있는 병원
바람이 차다
부러진 우산살 때문에
잘 펴지지 않는 우산
한쪽 어깨가 젖는다
귤 한 봉지를 사갈까
노란 귤 같은 백열등 아래서 쓰던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떠올라
환자에게 안 좋겠군
가면 노래를 불러줄까
내 노래는 모두
단조로 끝나버린
환자에게 안 좋겠군
언덕길 끝에 있는
낯익은 병원
오래 방치한 꿈 때문에
결국 몸져누운 희망에게
문병을 간다
지난 라디오의 겨울
창고에 있는 낡은 라디오를 어루만지니
다섯손가락이 나사를 돌린다
라디오 속에서 울려 퍼지는 산울림
이문세가 코트 깃을 세운다 지난날의
노래들이 먼지처럼 수북이 쌓여 있다
여기 이렇게 지난 라디오의 계절이
잠들어 있었구나 소리들을 훔쳐내고
플러그를 꽂지만 무거운 지난날처럼
주파수가 잘 잡히지 않는다 선국의
영역은 스무 살에서 몇 년 더 가지 못하고
함석지붕과 레코드 가게와 FM 사이를
배회한다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보낸
밤들은 기억의 집에 서까래가 되어 있을까
잡음과 함께 희미하게 잡히는 스무 살
무렵의 겨울, 창 밖에는 눈이 온다
시간은 주파수 속에 묻혀 있다
가수는 검은 기침의 노래를 뱉는다
전기를 받아 광합성을 하던 밤들
지금은 빠져나왔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흩날리는 그 겨울의 눈송이들
희미하게 잡히는 음악은 지난날의
노래가 아니지만 음악이 흐르는 동안
외삼촌이 물려준 자전거가 골목길에서
비를 맞고 있다 등대처럼 빛나던
스테레오 불빛 창 밖에는 차가운
소리들이 내린다 어둡고 딱딱한 휘파람을
불던 밤 별 속에 숨어들던 소리들
십자드라이버를 쥔 손이 파랗다 운이
좋으면 산울림의 노래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간이역에 핀 슬픈 코스모스 같은
노래들 플러그를 빼고서 기억의 창문을
닫는다 차마 버리지 못하는 기억들
창 밖 겨울 하늘은 눈이 내릴 것 같다
창고 선반에 있는 기억을 한 뭉치
움켜쥐고서 밖으로 나간다 나는 나아지고
있는가 지금 이 길이 더 나은
삶인가 무수한 질문들이 나에게 내린다
바닷가에서 보낸 한 철
지구는 외로운 섬
우주는 드넓은 바다
낮과 밤으로
밀물 썰물이 오가는 섬에서 태어난
우리는 모두 섬사람
지구섬에서 출항한 탐사선들
달섬은 토끼도 없는 무인도였다
불섬에서는 물의 흔적이 발견되긴 했으나
소라게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중이다
태양계라는 이 대양에서
외로운 섬사람들은 우리뿐인가
우리는 아직 이 대양 밖을 나가진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그립다
수평선 너머엔
다도해가 펼쳐져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섬만 외따로 떨어져 있는 건 아닌지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섬들을 보라
가끔 외계의 섬에서 온
배를 봤다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 그 배의 갑판에서 오후를 보내진 못했다
내 마음의 灣에
정박해 있던 푸른 배 한 척
멀리 떠나 버린 뒤
바닷가 벤치에 앉아서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곤 한다
소인은 해당화가 되어 주려나
바다로 가지 못한 채
모래 위에 핀,
한 생의 해당화
발을 딛는 곳마다 바닷가
불어오는 우주의 바람이 차겁다
소녀, 혹은 소년기
소녀도 소년이고 소년이기에 소년인 시절에 대해서 쓰자
토끼는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소년들의 오래된 기억은 활과 화살을 만들었다
여우도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무덤가를 지날 때마다 소년들은 겁에 질리곤 했다
지냉이를 잡으려고 바위를 들추면
왜 꼭 지냉이 대신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지
컬러학습대백과사전에서 기어나온 뱀들
농약들이 강한 번식력으로 산경을 덮을 때까지
뱀들이 소년들의 눈 속에 군집을 이루었다
연탄가스가 안개처럼 마을을 덮으면
아침에 늦잠을 자는 사람들이 생기곤 했다
몇은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개 속으로 걸어간 사람들
안개 속에는 검은 뱀들이 기어다니고 있을 거다
농협 창고에 농약들이 그득 쌓였다가도
이내 빈 농약병들이 죽은 무당개구리마냥 풀숲에 뒤집어져 있었다
뱀들은 농약을 피해 소년들의 귓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소년들은 허물을 벗듯 유년을 벗기 시작했지만
귓속으로 들어간 뱀들이 심장 밑에 똬리를 틀었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소녀이거나 소년임을 알게 되었고
파출소가 증설 됐고
교회가 있던 자리에 공장이 생겼고
공장이 있던 자리에 교회가 생겼다
소년도 소녀이고 소녀이기에 소녀인 시절에 대해서 쓰자
아카시아나무 꽃잎이 진 지 오래였지만
魔述悲歌
오후에 마술이 비가에게 전화를 걸고
비가는 그러자고 한다 그러자
당나귀가 천천히 술잔 속으로 미끄러진다
지난 선인장의 요일엔
비가가 마술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사막 한 가운데서 햇빛에 녹아버렸다
저녁바람이 마술비가가 있는 건물을
어루만진다 그때가 고양이의 해였던가
마술비가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마술 옆에
비가가 앉았다 기타 솔로가 흐르고
있었다 둘은 마술비가에서 음악과
담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오아시스가 없는 이 도시에서
음악을 품에 차고 있어야 하는 것이
이 사막에서 호흡하는 협객들의 운명이다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는 전갈들
거리엔 모래바람이 흩날린다
마술이 비가에게 말한 건지
비가가 마술에게 말한 건지
분명하진 않지만 서걱거리는 말이
탁자 위에 떨어진다
마지막 술잔은 비우고 가세
처음부터 빈 잔이었듯이
깨끗이 비우고 가세
마지막 술잔은 비우고 가세
택시 드라이버
불면증이 있어 시를 쓴다 이 도시의 밤은 악취가 진동하기 때문에 비가 내려야 한다 언제부턴가 나는 악취를 맡으며 시를 쓰고 있다 비가 내리는 날엔 시를 쓰지 않고 잠이 든다 나는 썩은 강물을 한 모금 마시고서 시를 쓴다 붉은 기억, 불협화음, 心象이 빗물 되어 내리면 물귀신 같은 다이아몬드 헤드가 돌아간다 면도를 하거나 양치질을 할 땐 아이리스를 생각한다 팔굽혀펴기를 하며 중력을 견디듯 플라타너스 아래를 걸으며 하루를 견딘다 나는 김수영보다 트래비스가 되고 싶다 아이리스가 입김을 내 목덜미에 불 듯 나는 아이리스의 바람 영상을 내 마음의 폴더에 저장하고 아이리스를 프린트 한다 내 무릎 위에 책상 위에 변기 위에 냉장고 속에 있는 아이리스 나는 아이리스의 꾹 다문 입술에 물려서 빨래처럼 시간의 허공에서 펄럭이곤 한다 바람이 불면 재장전을 한다 아이리스는 붉은 거울 속에서 웃고 있다 나는 랭보보다 트래비스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