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을원 시모음
경북 예천 출생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졸
2002년 <문학사상> 으로
민족 문학 작가회의 회원
육교
자정의 눈 내리는 육교 위
그녀는 地上의 가장 먼 마을에서 달려온 따뜻한 불빛들이
자신의 다리 밑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흘러가는 것들
캐롤도 흘러가고, 온 몸에 추억처럼 알전구 감은 가로수들도
흘러가고, 술 취한 빌딩들도 흘러가고
...쪽방, 화장대, 한강 유람선, 월미도, 만화가게, 공중 목욕탕...
달력의 붉은 동그라미 속에 웅크린 태아처럼 갇혀 있던 사흘간의 시간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무너지고 무너졌다
수술대가 뗏목처럼 너울너울 떠가자 둥근 형광등들이 한꺼번에 팍, 터졌다
핑-, 현기증이 난간을 움켜잡았다
도시 전체가 어디론가 바삐 가고 있었다
눈발이 그들의 발자국들을 빠르게 지워 갔다
가야하는데
가야하는데
기억을 빼곡이 채워 가는 눈발 속
육교 하나만 갈 곳 모른 채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이었다
벌레나무 하늘 오른다
경기도 하남시 인접지역, 누덕누덕한 지붕들 모여 있는 곳
나무 한 마리 하늘 오르는 것 본다
앙상한 발들 꼼질거리며 캄캄한 허공 끌어당기고 있다
작업은 다 끝난 것이다
부서지고 잘려나간 것들 수북한 슬레트 지붕은 뜯겨나갔다
갖가지 소음들 조립하다, 저녁이면
체구 작은 사내들 뱉어내던 낮은 건물들
국밥집에 모여 핸드폰 하나로 자랑스럽던 이국의 밤들아
지금은 떠나야 할 시간, 저 나무가
허랑방천 다 오르면 별자리 하나 더 생길 것이다
이미 별이 된 것들 흔들어 대는
저 상처 많은 손들을 보아라
저 나무가 밤하늘 끊임없이 떠돌 듯
가방 하나로 나도 이국의 질퍽한 곳을 떠돌 것이다
잠들지 못하는 변두리의 풍경들
낡은 라디오가 밤새 토해내던 낯선 노래들
전신주에 붙은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TEL 01×-5××-56××"
빗물 흐른 저 전단지까지, 기억할 것이다
그 모든 벌레나무의 시간들을 오랫동안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용설란
용설란에서 사내 하나 걸어 나온다
작은 체구에 다리를 저는 초로의 멕시코 사내
가구 공장 뜰에서 사포질, 니스칠하며
낡은 모포처럼 웃던 그 사내
그가 대패질을 할 때면
카리브 해안에서 경기도 마석 변두리까지
좁다란 길이 돌돌 말렸다가 떨어졌다
미간의 협곡엔 안데스 산정 늙은 콘돌이 둥지를 틀고
잉카의 오랜 전설 컥컥 거릴 때
굴곡 많은 사연들이 얼굴을 지나가고
움푹한 눈에 하나둘 들어서던 이국의 저녁들
야심한 다릿목에 나앉아 있던 나직한 메스티조의 노래
문득, 떠오르던 태양과 사막과 선인장과 용설란
천둥 사납던 날 그 노래, 모진 물살에 쓸려 갔다
내가 生의 한 국경을 건너왔을 무렵
하루의 끝에 서 있던 그 사내
천장 빼곡히 용설란 밭은 펼쳐지고
용설란 손끝에 찔려 밤의 곳곳이 쓰라리면
데낄라 노란 술병 들고 나타난 그 사내
데낄라, 데낄라, 데낄라
외치다가 지구본 위를 절룩이며 갔다
경도와 위도의 교차점에 찍힌 그의 발자국
천장에 대팻밥 가득 남기고
먼 회귀선 아래로 가고 있었다
미시령을 향해 달리다
- 각도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 홍천, 인제를 지나
미시령을 향해 달렸네
좁은 국도를 시속 100km로 코너링하다 보면
참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
약간의 핸들 각도에 좌우되는 生
급하게 꺾인 곳에 예각을 찍고
길 밖으로 나간 흔적 하나 선명했네
강변의 갈대들은 모두 지친 머리를 꺾고
이 각도를 보라, 이 각도를 보라
자꾸만 속살거렸네
러브호텔에 욕망을 주차한 많은 차량들
어느 지점에서부터 꺾이기 시작했을까
불면의 밤마다 미시령 너머를 막연히 사모하는 나도
꺾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세상은 점점 뜸해지고
나도 뜸해져 갔네
마음의 각도 사이에서 미시령은 높아만 가는데
구부러진 것들은 모두 슬픈 것
위태로운 각도를 품은 것
죽어도 좋아, 페드라, 페드라를 외치며
내 차는 스스로도 두려운 속도로
中年,
늦겨울 속을 질주해가고 있었네
자전거, 이 강산 낙화유수
길가 철책 너머, 오래 방치된 자전거를 안다 잡풀들 사이에서 썩어 가는 뼈대들, 접혀진 타이어엔 끊어진 길들의 지문이 찍혀 있고 체인마다 틈입해 화석처럼 굳은 피로들, 한때는 자전거였던 그 자전거
한 사내를 안다 새벽, 비좁고 자주 꺾인 골목을 돌아 돌아서 우유 한 병 조용히 놓고 가던 반백의 왜소한 사내, 수금할 때면, 고맙구먼유, 열 번도 더하던 사내, 유난히 부끄럼 많던 그 사내, 무섭게 질주하는 도시, 어느 초겨울 미명의 새벽 차도를 끝내 다 건너지 못한 그 사내
그 노래를 안다 빙판 언덕배기 나자빠진 자전거, 깨진 병 쪼가리들 만지작거리며 오랫동안 앉아 있던 그 노래,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고 흘러
낙엽 한 잎 강물에 떨어져 멀리도 떠내려 왔는데, 가끔씩 새벽 속에서 흥얼흥얼 노랫가락 들리고 창을 열면 낡은 짐자전거 한 대 저만치 가는, 참 오래된 그 노래를 나는 지금도 안다
오래된 항아리
그 집,
그 집 뒤란에 오래된 항아리
시간이 고여 찰랑거리고
산새들 내려와 목을 추기고
보름달 머물다 노란 알 하나 낳고 갔었다
달의 행로를 따라 고샅길 생겨나고
그 길 쫓아 1톤 트럭 한 대 거슬러 올라와 봄을 하역하고 간 후,
곳곳에 피어나던 꽃
마당에, 뒤뜰에, 외양간에, 부엌에, 뒷간에, 지붕에, 안방에, 바람벽에,
그 집 빼곡이 채우고,
읍내 가는 먼지 많은 길로 나섰다가
차마 다리 건너지 못하고 강뚝 서성이다 시들었었다
그 다리,
꽃잎은 강물에 실려 마을을 돌아, 폐교를 돌아
손금 위로 흘러 드는데
밤마다 건너는 교각만 남은 다리
수시로 헛딛어 무릎팍 깨지는 교각만 남은 다리
강물 뚝!뚝! 흘리며 돌아오는 새벽 그 건너엔
꽃들이 주인인 집 한 채 있고
그 집 뒤란, 오래된 그 항아리 노란 알 하나 여전히 품고 있다
달빛 세탁소
서민 아파트촌 행복세탁소 주인 박씨는
모두 잠든 깊은 밤
공터에서 세탁을 한다
큰 함박지에 달빛 가득 채우고
퍼놓았던 햇살 한 바가지 풀어 힘있게 문지르면
술술 풀려나가는 검은 먼지들
호주머니에선 녹슨 못 떨어지기도 하고
닭발이 뛰쳐나와 진창에 찍고 온 사연 조아리기도 하고
꼼장어 한 마리 달빛 속을 유영하기도 한다
때로는, 트로트 메들리가 박씨 어깨 흔들기도 한다
헹구어 널면 뚝!뚝! 떨어지는 푸른 달빛들
위에 박씨 하얀 별빛 한줌씩 아낌없이 뿌려준다
고개 무거운 밤이 깊으면
생활의 헤진 구석 실밥 가지런하게 기워지고
다림질 따라 반듯한 포장도로가 생겨난다
그 길 끝 멀리서 찬물에 머리 감은 아침이 천천히 온다
박씨 오토바이는 오늘도 서민 아파트촌을 신나게 달리고
세탁물 받은 사람들
알싸한 그 냄새의 정체 아무도 모르지만,
향기에 취한 비둘기 떼들 모두 그 세탁소로 모여들고 있다
종이학
종이학을 마주보며 가벼움을 생각한다
헌책 속에서 날아오른 한 마리 종이학,
책상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건조한 일상에 착지해 온 누군가의 유년
'우리 사랑 영원히'
여린 날개에 여린 문구를 싣고 건너온
무채색 도시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급하게 꺾이는 골목들,
전선줄에 동여매진, 배가 축 처진 회색 하늘 아래
수상한 눈빛 번득이며 흘러가는 검은 개천들
그 위를 낮게 나는 작은 새 한 마리
구간 구간 단절되는 도시의 하루를 지나
복권 만한 꿈 한 조각 물고 와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
굳게 다문 부리를 벌려,
'우리'를......'사랑'을....'영원'을
손바닥 위에 떨구어 주는 새 한 마리
내 일상의 밤을 가르고 날면
가늘고 차가운 선이 한 줄 가슴을 지나간다
그 선을 거슬러,
가벼움에 대하여 생각한다
가벼움의 세월을 생각한다
무거움의 관성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한다
깨어나면 머리맡에 몇 개 떨어져 있는,
무척 푸르러 가벼운 깃털들
을숙도에서의 一泊
새떼 간다
섬 하나 떠메고 새떼 간다
지쳐 날개 접으면 집이 되고 섬이 되는 곳
갈대 숲 서걱서걱 지나면
누구나 날개 돋아나는 곳
새처럼 말하기 위하여
새처럼 잠들기 위하여 찾아온 을숙도
나는 부리에 물고 온 저녁 하나를 떨군다
시동을 끄자 마음이 먼저 뚝방을 내려간다
노을이 펄럭이며 먼 산을 넘어가고
가슴에 따뜻한 강물이 돌아 들면
기억 속에선 새떼들 일제히 날아오르고
새떼들 속에 빈집 하나 보인다
남 몰래 곤한 잠 깔던 곳
때론, 너무 젖어 군불 때 줘야 하는 집
깊은 밤의 한 귀퉁이에 불을 피우고
젖은 침상을 내다 말린다
어둠이 주위에 둘러서고
갈대들이 수런수런 모여들어 손을 쪼이다 가면
나는 잘 마른 모포에 길게 눕는다
침상 밑으론 밤새 몇 개의 도시가 지나가고
내 빈집엔 새떼들의 방언 가득하다
* <오래된 항아리> <높은 집> <빙어> <목련>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