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최영철 시모음

휘수 Hwisu 2006. 9. 24. 02:16

1956년 경남 창녕

1984년 무크지 『지평』『현실시각』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연장론> 당선
시집『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일광욕하는 가구』

『야성은 빛나다』 『홀로 가는 맹인 악사』『가족 사진』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그림자 호수』
제2회 백석문학상 수상
계간 『관점21. 게릴라』 편집 주간

  

구멍으로 흘러가다

 

그래서 그의 머리는 하수구로 떠내려 갔다
오늘 하루 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안전하게 면도를 하고
부장에게 잘 보이려고 애매한 미소를 머금었으며
거래처에 잘 보이려고 알뜰히 삼푸까지 한
그의 머리는 하수구를 통해 보다 큰 하수구로 둥둥 떠내려 갔다
오늘 하루 미스 박에게 잘 보이려고 스킨로션을 겹겹히 바르고
오늘 저녁 내연의 처에게 잘 보이려고 향수까지 뿌린 머리를
마지막으로 쓰윽 닦으려는데
어 머리가 없네
아까 너무 세차게 문질러 세면대에 흘린 줄도 모르고
마개를 열자말자
그의 머리는 꼴꼴거리며 하수구로 떠내려 갔다

 

그러니까 그의 거시기는 지금쯤 정화조 바닥에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아직 풀이 죽지 않았거나 생각보다 가볍다면
똥물 사이를 둥둥 떠다니고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내내 사장에게 면박을 당해, 부장에게 모욕을 받아 상심한
오늘 역시 거래처마다 삼킨 치욕을 만회하려는 희망으로
양변기에 앉자마자 너무 오래 용을 써댄 탓에
그는 침실에서 기다리는 아내로부터 주의를 받았고
풀지 못한 회포와 불륜을 아쉬워하며 오랫동안 풀이 죽었다
그는 샤워를 끝낸 아내에게 또 한 번의 주의를 받았고
궁지에 몰려 막 거시기를 들이대려는데
어 거시기가 없네
그는 오늘 하루의 오욕을 밀어내려고 너무 오래 힘을 썼고
거시기가 풍덩 빠진 줄도 모르고
뒤를 쓰윽 닦아 버렸다


날아가는 메기

 

 끓는 냄비의 뚜껑을 열자
 다 익어 날개를 단 메기 한 마리 날아올랐다

 

 고마워요 당신. 나 물고기였을 때 날아 보려고 그렇게
파닥대고 솟구친 것 아시지요. 이렇게 날 수 있으리라

고는 훨훨 승천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

어요. 그저 저 날렵한 꼬마물떼새처럼 날아올랐으면 날

아올랐으면 좋겠다고 시늉이나 하며 자꾸 물 박차고 훌

쩍 훌쩍 위로 솟구쳤지요. 그런데 이거였군요. 이렇게

 익어 흐물흐물해져서야 끓어 넘쳐서야 날 수 있는 거

군요. 몸 속 모든 기운 우려내 보내 버리고 나서야 날개

가 돋는 거군요. 그래야 한없이 부드럽고 가벼워지는 거

군요. 여기 떨구고 가는 살점들을 드세요. 큰 입 긴 꼬리

지느러미 두고 갈게요. 고마워요 당신

 

 이거였군요 이래야 날 수 있는 거군요
 여기 남기고 가는 아린 가시가
 제 발목을 붙든 것이었군요


소주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장르에 왔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지금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

어디 불같은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냐고

함부로 내지른 토악질로 여기까지 오려고

차가운 것을 버리고 뜨거운 것을 버렸다

물방울 하나 남아 속살 환히 비친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 같은 주름이 있다

오래 삭아 쉽게 불그레진 청춘이

남은 저를 다 마셔달라고 기다린다

 

전파들

 

전동차안에서 뭔가가 자꾸 나를 찌르고 갔다

찌르르 사랑이 왔을때

하늘이 자꾸만 까마득해지던 때

사방 앞뒤 좌우 수압 센 샤워기처럼

지그재그로 춤추며 내 몸을 뚫고 갔다

자식들,

소리소문없이 전동차 강철판을 뚫고들어와

강철판을 뚫는 마당에

흐물흐물 내 몸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더 흐물흐물한 옆의 여자와

더 흐물흐물한 옆의 노인을 뚫고

그 옆 남자의 단말기에 가서 꽂혔다

전화를 받고 있는 남자의 몸을 뚫고

저 앞의 줄지어선 몸을 뚫고

두부처럼 스스슥 순식간에 관통해간 전파가

전화를 받고 있는 남자의 몸이 익었나 안익었나

쑥쑥 찔러보면서

금방 뚫고 지나갔다

그 옆의 노인을 그 옆의 여자를 그 옆의 나를

뚫고 쏜살같이 지나갔다


기도

 

미사 시간에 한 아이가
미사 볼 때 제발 졸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내 조는 사이에 하느님이 다녀가시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무엇을 빌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는 그저께 집나간 반달이가
부디 좋은 주인 만나 잘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구박받다 울며 돌아왔을 때
집 비우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빌었다
저 아이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인 것 같아
제발 무서운 짐승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잡아먹히더라도 개소주 같은 건 안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