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 시모음 2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
1984년 <지평>과 <현실시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연장론' 당선
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가족 사진> <홀로 가는 맹인 악사> <야성은 빛나다>
<일광욕하는 가구> <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
2000년 제2회 백석문학상을 수상
산문집 <우리 앞에 문이 있다> <나들이 부산>
현재 계간 <문학과 경계> 편집위원
계간 <관점21> 편집주간
계간 <시평> 상임선정위원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편집위원
아래층 여자 그 아래층 남자
아세요 그대 아침 운동 페달을 돌리고 있을 때, 아직 곤히
잠든 아래층 여자 아랫배 위를 허덕거리며 넘어가고 있
다는 사실, 아세요 식사 후 거실 이쪽 저쪽 거닐며 콧노래
흥얼거릴 대, 점잖게 신문 보는 아래층 남자 대갈통 지그
시 밟아주고 있다는 사실, 아세요 잘 익은 생선 등으로 내
리꽂히는 당신 젓가락, 못다 푼 숙제를 향해 엎드린 아래
층 아이 등골 쑤시고 있다는 사실, 아세요 지난 밤 당신
이 누른 초인종 그 위층 그 아래층 그 옆층 뒤층 어디를
누르나 같은 웃음소리를 낸다는 사실, 아세요 다인이 뻗
을 자리는 어느 길로 접어드나 앞으로 삼보 우로 삼보 좌
로 삼보 잠시 주춤 뒤로 삼보에서 끝난다는 사실, 아세요
칫솔질하는 당신 면상으로 위층 그 위의 위층으로부터
개숫물이 쏟아져내리고 있다는 사실, 층층이 포개져 헛구
역질 아내 위에 그 위층 그 아래층 아내와 남편 사이에 겹
겹이 포개져 있다는 사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위층 아
래층을 향에 오르가슴은 달리고 있다는 사실, 잘 차려진
그득한 행복 위로 누가 자꾸 가래침을 뱉고 있다는 사실
시집, 그림자 호수(창비시선 225, 창작과비평사, 2003)
벚꽃제
저 보러 가는 동안 조금 더 참지 못하고
이제 막 진해 초입 들어서는
내 얼굴 위로 환히 떨어지네
터널 지나 장복산 고개 막 넘어서는데
때마침 불어준 산들바람 참지 못하고
풀풀 방사하고 있는 조루 벚꽃
첫 휴가 해군 옆에 선 처녀 가슴께로
후르르 떨어지네
웬 웃음 눈물 풀풀 날리며 가도 까딱 않는 꽃대궁
바닷바람에 더 단단해져
줄줄이 늘어선 질긴 가지에 맺혔네
그렇게 많은 눈들이 지나갔건만
쉽게 방사할 줄 모르고 꼿꼿이 선 지루 벚꽃
첫아들 면회온 아낙 머리 위에
낭창낭창 흔들리고 있네
그림자 호수
부여 궁남지
겨울 깊어 바람 서늘해지자
호수를 에워싼 수양버들
누울 자리 찾아 슬슬 물 가까이 내려왔다
호수를 따라 둥글게 모여선 가지들
한파가 닥치면 어서 발을 집어넣으려고
캐시밀론 담요를 깔아놓았다
서로 사우지 않으려고
저마다 대중해둔 그 담요는
정확한 일인용이다
지금 서둘지 않으면 이제 곧 바람이 와서
호수 전체를 얼음으로 덮을 것이다
수양버들은 그림자 속으로 들어와
단잠에 빠지려는 물의 지느러미를
자꾸만 흔들어 깨운다
잠들지 마 잠들지 마
벌써 저즘에서는
곯아떨어진 물의 등을 밟고
얼음이 걸어오고 있다
슬금슬금
남의 집에 발을 찔러넣어보는 살얼음들
수양버들 그림자가 그 차가운 발목을
덮어주고 있다
시집, 그림자 호수(창비시선 225, 창작과비평사, 2003)
우짜노
어, 비 오네
자꾸 비 오면
꽃들은 우째 숨쉬노
젖은 눈 말리지 못해
퉁퉁 부어오른 잎
자꾸 천둥 번개 치면
새들은 우째 날겠노
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
흥건히 고인 흙탕물
몸 간지러운 햇빛
우째 기지개 펴겠노
공차기하던 아이들 숨고
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
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
우째 먼 길 가겠노
열린시학, 2003년 여름호
풀밭에서
풀밭에 누워 하늘을 보면
하늘엔 제트기 씽씽,
뾰족한 콧등에 실밥 터지듯
주욱 하늘이 찢어지네
흰 피가 씽긋 배어나와
웃고 있네
솔개 한 마리
그 상처 닦으며 꿰매며가네
남은 흉터를
새털구름이 슬슬 닦아주고 있네.
그리움을 위하여
딸아이의 구두 한 짝을 버스간에 흘리고 와서
오늘밤은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는다
제 몸처럼 간수하던 구두 한 짝을 잃고
저녁 내내 보채던 딸아이의 투정은
내일 아침 맞이할 새 구두 한 켤레로 금세 밝아지겠지만
정작 걱정스러운 일은 만원 버스 속에 빠뜨리고 온
몇 달을 신어 뒷굽이 알맞게 닳은 딸아이의 구두 한 짝이다
지금쯤 퇴근길 승객들의 발굽에 무심히 짓밟혀
만신창이로 아파할 작고 아담한 구두 한 짝은
이제 어느 만큼 딸아이의 발에 익숙해져서
자갈밭 흙길도 마음대로 내닫던 것이었다
그렇게 한 쌍이 되어 늘 활달한 뜀박질로 즐겁던 것이
하나는 안방 아랫목에서 세상모르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또 하나는 신발장 한편에 어둡게 놓여
나머지 하나의 행방을 알기나 하는지 태연한 표정들이다
딸아이의 투정쯤이야 다시 맞게 될 친구와 나날이 친숙해져서
어느날에는 또 예전처럼 자갈밭 흙길도 마음대로 내닫겠지만
따로따로 떨어져 서로가 맞닿을 수 없는
그 외톨박이 구두 한 짝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한 켤레 모두를 잃고 왔다면
딸아이같이 작고 아담한 발을 가진 주인을 만나
지금쯤 제 한몫은 넉넉히 하고 있을 터인데
어디에서 쉽게 짝을 이룰지 난감하기만 한
낡고 볼품없는 구두 한 짝을 누가 행여 거들떠나 볼까
각기 묻혀 눈뜨지 못하는 기다림의 마지막 날까지
서로들 그리움의 갈증에 목말라 안타까움으로 지새울
딸아이의 구두 한 짝을 생각하며
아무래도 오늘밤은 잠이 오지 않는다.
내가 소나무 잣나무 같은 것이었을 때
바늘잎나무가 사철을 사는 것은
그 뾰족한 입을 허공에 꽂고
산자락 가득 찬 공기를 배불리 빨아먹기 때문
단번에 잘려
기둥이나 마루판 되어서 오래 견디는 것은
그 뾰족한 침의 기억으로
달려드는 못된 것들을 모두 물리치기 때문
자꾸만 뾰족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제 허벅지를 찌르지 않으면 안되었던
긴긴 수절의 시간을 잊지 않았기 때문
꼭꼭
꾹꾹
시집, 그림자 호수(창비시선 225, 창작과비평사, 2003)
소주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쟝르에 있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지금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
어디 불같은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냐고
함부로 내지를 토악질로 여기가지 보려고
차가운 것을 버리고, 뜨거운 것을 버렸다.
물방울 하나 남아 속살 환희 비친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은 아니다.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같은 주름이 있다.
오래 곰삭아 쉽게 불그레진 청춘이
남은 저를 다 마셔달라고 기다린다.
밤에
하늘로 가 별 닦는 일에 종사하라고
달에게 희고 동그란 헝겊을 주셨다
낮 동안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밤에 보면 헝겊 귀퉁이가
까맣게 물들어 있다
어두운 때 넓어질수록
별은 더욱 빛나고
다 새까매진 달 가까이로
이번에는 별이 나서서
가장자리부터 닦아주고 있다.
거미
집을 가지면서부터 나는 이 세상의 많은 집들을 잃어버렸다
하늘은 그 집 창으로 보이는 보자기만 한 허공
빗소리는 그 집 지붕을 두드리는 젓가락만 한 콧노래
집으로 가면서부터 나는 집으로 가지 않는 모든 길들을 잃어버렸다
헛디디지 않고 걷는 일은 헏디디고 걷는 일보다 쉬웠다
바람이나 개울이나 알이나 잎이나 모두 집을 박차고 나와
비로소 온전해진 떠도는 우주
8차선 지나 4차선 지나 2차선 지나 비탈진 골목길
그리고 잠시 후 끊어진 거미줄
나는 그때 내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들기 위해
내가 지나온 경로를 박차고 나갔다
비틀 또 비틀
어제 갔던 길을 구부리고 끊으며 나는 가고 있다
머리카락보다 질긴 회로의 비밀번호를 다 털어버리려고
비틀 또 비틀
아무리 발을 헛디뎌도 한 발 떼어놓는 순간
나머지 한 발이 찰싹 외줄을 부여잡고 있는
부여잡으며 죽어가고 있는 나는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거미가 거미줄에 걸리지 않는 건
거미줄 밖의 세상이 더 이상 저를 걸고 넘어지지 않기 때문
거미줄 안의 세상이 더 이상 저를 내치지 않기 때문
나는 내 집 밖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모두
내 더듬이를 떠났다 실낱같은 몇 갈래 선을 즈려밟고
나는 지금 그 길을 거미처럼 가고 있다
거미줄을 타면서 거미줄 밖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으면서
거미줄 위에서 소리 없이 죽어가면서
거미가 되어가는 내가 거기 있다
백일홍
구차하게 따르지도
구차하게 침묵하지도 않으려고
같이 낯붉히고 가는 덕천강
늦게 피고 빨리 지는 꽃잎 따라
점점이 물드는 늦은 햇살의 홍조
먼저 간 마음 따라 남으로 와서
여린 꽃잎 다 주고
홀가분한 몸을 강물에 마저 비추며
네가 붉어지니 나도 따라 붉어지네
묵언 정진 붙박여 엿보고 있는
가지의 짧은 기억들
수천년의 윤회가 부서져 흙이 된
떨어진 잎새 향기로 한 백 일쯤 피어
제 갈 길 먼저 가는 강을 보는
나무의 면벽.
인연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자장면집 한켠에서 짬뽕을 먹는 남녀
해물 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다 옆에서 앵앵거리는 아이의 입에도
한 젓가락 넣어주었다
면을 훔쳐 올리는 솜씨가 닮았다
뒷간이 멀어서 생긴 일
오줌이 강을 이룬적이 있다
밥상머리에 곯아떨어지는 아이들을 일으켜
간신히 오줌을 뉘고
다음은 초저녁잠이 많은 노인들
다음은 그 틈에 합궁하고 난 젊은 부부
새벽녘에 일어난 노인들은 넘칠락말락 출렁이는
요강을 집 앞 개울에 씻었다
얼굴도 씻고 입도 헹궜다
둥근 요강에서 밤새 뒤섞여 짜한 냄새가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손주의 오줌이
새벽 개울물에 소용돌이치며 한번 더 자리를 바꾸며
동구밖 천리를 달려갔다
달리기에 느린 할머니 오줌을 아버지가 들쳐없고
아이들 종종걸음이 놓칠세라 그 뒤를 따랐다
이른 아침 일어나 마당 수돗가에
아직 뜨뜻한 기운 남은 요강을 비우는데
그때 개울가에서처럼 네 식구의 오줌이 마구 소용돌이친다
야호 함성을 지르며 하수구로 흘러들어간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오줌은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 것이라고
흘러가서 강이 되고 바다가 되고
머나먼 육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피붙이 오줌들은 오랜만에 한통속이 되어 짜한 냄새를 풍긴다....
862원
설날 아침 통장에 찍힌 돈 862원
이 엄동설한 설렁설렁 부는 바람이 공수레공수거
울적한 내 심사를 어루만진다
혹시 아는 이라도 만나면 이 붉은 눈시울은
지랄 같은 겨울바람 때문이라고 말해야지
정말 지랄 같았던 작년이 죄다 이월되지 않고
단돈 862원만 따라와서 다행이라고
참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재수없는 돈 862원을
어디에? 지하도에 엎드린 노인을 보았지만 그렇잖아도
무거웠을 생에게 이 천덕꾸러기를 떠넘길 순 없는 노릇
무수한 허탕의 공수표 사이에서 중상모략 사이에서
분질러지고 곡예를 한 862원은 파란만장한 세파를 용케 넘어
쉽게 용해되지 않을 것이다 쉽게 휘발되지 않을 것이다
악착같은 놈 악착같이 해를 넘어 나를 따라온 862원을
눌러 죽이려는데 862원은 새까맣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나 없으면 너 살겠니? 조롱하듯 내 속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이게 씨가 되어 아라비아 숫자들은 올 한해 새끼에
새끼를 칠 것이다 나오기 무섭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눌러 죽여도
줄기를 뽑아도 잔돈푼의 뿌리는 여전히 남아 살아날 것이다.
옹알거리며 862원에 팔린 노예 862원에 저당잡힌 종신감옥
설날 아침 나는 끝내 862원을 해치우지 못하고 내일로 이월 했다
몇푼 동전들이 통장속에서 서로 몸을 부딪치며 또 알을 까고 있었고
시집, 그림자 호수(창비시선 225, 창작과비평사, 2003)
폐 가
큰방 문설주 위에 걸어놓고 가버린 컬러 가족사진
햇볕에 색 바래 흑백사진 같다
무슨 큰 난리처럼 휩쓸고 간 세파에 밀리다가
이 집 일가족은 외양간 여물통에도 숨고 디딜방아
절구통에도 숨고 뒷간 지푸라기에도 숨고 부엌
불쏘시개로도 숨고 뒤란 우물 수렁에도 숨고
그때마다 요령소리 나게 달리다 울긋불긋
혈색도 고우시던 얼굴 물 다 날아갔다
붉은 색은 육이오에 훨 날아가고 노랑색은
오일육에 훌 날아가고 파랑색은 오일팔에 활 날아갔다
그을린 흙벽 중간 더러 날짜를 건너뛰며 동구라미 쳐진
새마을달력 동네 경조사 메모 위에서
의원님은 근엄한 치사를 하고 있다 땅속에서
갓 건져올린 미라처럼 눈이 움푹 파인 괘종시계 아래
반쯤 남은 대병 소주 아직 아릿하다 팔순 잔치
저마다 차려입은 알록달록 치마저고리 단물 다 빠져나간
액자 속 까만 눈과 하얀 이빨이 웃고 있다 배꼽마당
수북한 잡초 안으로 빨강 파랑 노랑은 숨고
까맣게 탄 머리칼과 하얗게 센 손가락이 비죽 나와 있다
시집, 그림자 호수(창비시선 225, 창작과비평사, 2003)
고목을 지나며
고목 후원을 거닐다 만난 오래된 향나무의 뒤틀린 몸이
만방으로 뻗치는 한민족의 기상이라 말하는 안내원 몰래
그 몸통 가슴께를 가만히 손으로 어루만졌습니다
한번도 담 너머 나가보지 못한 왕조의 적적한 한나절이
왕도 아니고 왕비도 아닌 자태로 구부러져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으려나 가슴을 콩닥거리며 섰습니다
이것도 위엄이라면 위엄일까요
다정하게 가두어진 못물로 그 못물에 떠서 숨죽인 연잎으로
내내 가슴을 쓸어내리고 산 이것도 위엄이라면 위엄일까요
수백년 향나무의 지그재그 용트림은
외간 범부의 등에 업혀 담이라도 넘고 싶어 주리가 틀린
주리가 틀려 비명을 내지르다 줄줄이 실려 나간
사대부의 말년이었습니다
어린 권좌 앞에 엎드린 고관대작 할아버지들이 우스워 주리가 틀린
주리가 틀려 마침내 권좌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한 말씀 하신
백면서생의 말년이었습니다
줄줄이 역여 나간 왕조의 흥망성쇄를 한자리에서 다 보아버려
이제 맘대로 죽을 수도 없게 된
죽어 제 맘대로 걸어나갈 수도없게 된
저 향나무의 말 못하는 위엄이
내 초라한 위엄인 것만 같았습니다
시집, 그림자 호수(창비시선 225, 창작과비평사, 2003)
동태
펄펄 끓는 물 속 더운 국 한 그릇 되려고
너는 지금 꽁꽁 얼어 있는 것이다
토막토막 난도질 당해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 속내 한 번 보이려고
저렇게 냉담한 것이다
저를 송장처럼 만들어버린 이의
간담이나 서늘하게 하려고
내장은 이처럼 시원한 것이다
스스로 견뎌 온 침묵이 있어
다 말 못하고 술로 달랜 이의
속풀이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