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최문자 시모음

휘수 Hwisu 2006. 5. 31. 10:12
                     

 1943년 서울출생  
성신여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귀 안에 슬픈 말 있네』『나는 시선 밖의 일부이다』

       『나무고아원』『울음소리 작아지다』
협성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파란 대문에 관한 기억


막다른 집에서 꽤 오래 산 적이 있다.
헐어빠진 나무대문들을
희망처럼 보이게 하려고
페인트로 파랗게 칠을 했었다.
대문의 나뭇결은 숨을 그치고
그날부터 파랗게 죽어갔다.
늦은 밤 돌아와 보면
길고 좁은 골목 마지막 끝에
자기 그림자 꼭 껴안고
바다 속으로 뛰어들 것 같은
그런 흔들림으로 서 있던 파란 대문
그 대문을 바라보고
가끔 생각난 듯 개가 짖어댔다.
덧바른 낯선 색깔을 알아보고 짖어댔다.
어느 날은
죽은 나무대문이 다시 나무로 살아날 것처럼
사정없이 짖어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긴 골목도 없이 나를 막아서는 802호
지금은 거기에 산다.
열쇠를 돌리려면 한참씩 문 앞에서 달그락거리지만
잠긴 저 안은 언제나 쇠처럼 고요하다.
하루 종일
이 색깔 저 색깔로 덧칠 당하고 돌아온 나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희망처럼 보이는 푸르딩딩한 폐허를
아무도 짖어대지 않는다.
사라진 개를
찾아나서고 싶다. 

 

 

벽과의 동침

 

  이십 년 넘게 벽 같은 남자와 살았다. 어둡고 딱딱한 벽을 위태롭게 쾅쾅 쳐 왔다. 벽을 치면 소리 대신 피가 났다. 피가 날 적마다 벽은 멈추지 않고 더 벽이 되었다. 커튼을 쳐도 벽은 커튼 속에서도 자랐다. 깊은 밤, 책과 놀다 쓰러진 잠에서 언뜻 깨보면 나는 벽과 뒤엉켜 있었다. 어느새 벽 속을 파고 내가 대못처럼 들어가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숨도 벽 속에서 막혔다.

 요즘 밤마다 내가 박혀 있던 자리에서 우수수 돌가루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벽의 영혼이 마르는 슬픈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벽을 때릴 수 없는 예감이 든다. 나는 벽의 폐허였다. 그 벽에 머리를 오래 처박고 식은땀 흘리는 나는 녹슨 대못이었다.

                                                                                         

꽃잎

 

유럽 여행 중
이름 모를 이국의 해변에서
온몸에 머드팩을 한 적이 있다.
몸에다 진흙을 바르고 진흙 속에 누웠었다.
분명,
여자의 몸에는 깊은 꽃잎이 있는 듯 했다.
흙냄새 풍기는 꽃잎이 있는 듯했다
진흙은 꽃잎을 덮고도 꽃잎 위에서 넘실거렸다.
비누보다 몸에 익숙한 꽃잎
몸의 정맥에 대고 속삭이는 꽃잎
자신만의 풍경을 가지고 있는 꽃잎
이브가 수치를 가릴 때
흔들리던 부표, 그 떨리던 꽃잎
자장가처럼 간지럽게 흘러내리는 꽃잎
태초에 신이 진흙을 주물럭거릴 때
진흙을 뚫고 여자로 움트던 꽃잎
진흙 위에 진흙을 바르며 꽃잎을 느꼈었다.
가장자리가 다 닳아빠지도록
그 동안 얼마나 창백하게 내버려둔 꽃잎인가?
삶의 들판 사이사이에서 울고 웃던 꽃잎
울다가 구름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꽃잎
진흙인 줄 모르고 쇠처럼 써버리던 꽃잎
진흙 속에 누워 유년의 꽃잎을 기억했다.
파들거리며 부끄럼 타던 발그레한 속꽃잎
그 발기한 분홍색 꽃잎을.

 

                                                          

고백

 

향나무처럼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제 몸을 찍어 넘기는 도낏날에
향을 흠뻑 묻혀주는 향나무처럼
그렇게 막무가내로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외출

 

시인이 생선을 고른다

값을 물어보기 전에

 

깊은 바다에 얼마나 드나들었나?

아가미를 열어본다

 

바다에서 나와 땅에서 떠돌기 얼마나 쓸쓸했나?

지느러미 힘줄을 들쳐본다

 

정말 바다의 자식인지

등짝에서 파도에게 매맞은

푸른 멍자국을 찾아본다

 

얼마나 바다를 토애내야 죽을 수 있었나?

핏발 선 눈알을 들여다본다

 

아직도

뻐끔거리던 입마다 바다가 몰려있는데

와르르 와르르 파도가 몰려와 좌판을 때리고 가는데

싸요, 싸

단 돈 오천 원에 싱싱한 주검이 두 마리

수산시장 비린내만 묻히고 그냥 돌아온다

나를 따라 일어서는 겨울 바다

노량진 역에서 같이 지하철을 탄다

 

출처, 네블,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