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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시모음

휘수 Hwisu 2006. 4. 20. 15:17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1994년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8년 제4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2001년 <창작과비평> 신인상.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 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살구나무의 무거움에 관하여


어둠이 까놓은 알들이 눈을 뜬다
살구나무의 흔들리는 두통 속에서도
붉게 뇌종양이 켜진다
그의 둥근 얼굴 위에 세워졌던 창 밖의 가로등들이
안 보이는 커브길로 사라진다

대문도, 문패도 없는 그의 막노동이
월급봉투처럼 행복하게 입맛을 다셔보았을
살구 싶다, 살구 싶다, 최면처럼 굵어진 살구알들
뇌수가 터져 발 밑에 흥건하다

바람은 늦은 조문객이 되어 흥청거리고
일찍 온 사람들의 그림자는 가늘게 춤을 추는데
그가 누워있던 방은 안과 밖을 가른다
창 밖으로 하루의 끝물인 날벌레들을 불러 모은다
텅 빈 까치집처럼 하늘에 달은 비어있고
살구 싶다, 살구 싶다, 울음 끝에
매달려 있던 살구알들이 떨어지는 밤이다



       과일가게 앞의  개들

 

 

        생선의 해진 살점처럼 구름이 떠다니는 거리는 비릿하다
        러닝셔츠만 걸치고 여름을 나던 시절이 사내를 거쳐 지나와
        다시 과일가게 앞에서 모기향을 피우고 있다
        지워지지 않는 색깔을 뒤집어쓰고 파리들은 맴돈다
        사내가 펼쳐드는 부채는 잎맥까지 다 말라버린 나뭇잎 같다
        바람이 코앞에서 우수수 떨어져 꼼짝도 않는다
        몽롱해진 정신 속에 이따금 손님처럼 졸음이 찾아오고
        검은 씨들이 검버섯으로 박혀 있는 사내의 꿈이 깜짝 놀라
        깨어질 때, 수박 속살을 파먹는 파리들은
        아무리 쫓아도 얼굴과 수박의 붉은색을 구별하지 못한다
        사내가 러닝셔츠를 들춰올리고 바람을 불어넣는다
        배꼽만 남아 배꼽이 썩어가는 배꼽참외들의 냄새
        뭐 잘못된 것이라도 있느냐는 듯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으름장을 놓는 사내의 가게 앞으로
        비루먹은 개들이 떼지어 지나간다
        제 몸을 다 토해내기라도 할 듯 헐떡이며
        입 안 가득 상한 생선냄새를 질질 흘리며
        사내는 사과를 하나 집어 러닝셔츠 안쪽으로 닦는다
        바라보는 시선들을 깔보며 으적으적 깨물어 먹는다
        목구멍까지 주름이 잡힐 갈증들이 바닥에 고개를 떨군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오후가 툭, 비닐봉지 속으로 던져진다 

 

 

가래

 

 

저녁이면 가래가 그득해진 목이 아프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희망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내 속에 뭉쳐진 욕망의

노폐물 같은 것이다 갈수록 말은 적어지고

퇴근길 혼자 걸어오다 생각하는 하루도

즐겁거나 고단하거나 결국 가래로만 남는다

아내의 부쩍 줄어든 말수도 그렇다

목에 관한 한 우리는 나눌 수 없는 제 몫의 아픔을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뿌옇게 눈을 가리고 저녁이 오고 저 황사바람은

잠든 후에도 우리의 이부자리와 옷의 식탁에

수북히 먼지를 쌓아놓고 갈 것이다

보이지 않게 조금씩 파고 들어와

쉽게 떨어지지 않는 인간의 인정이란 것도

침묵 앞에선 속수무책

아내가 화장실에서 인상을 쓰며 가래를 뱉는다

잠결에 깬 아이의 기침소리가 깊다

저 어두운 공중 위에는 뿌연 황사가

우리를 내려다보며 잔뜩 그을은 밤의 램프를

털어 내고 있다

안녕 아내여 잘자라 내일은 일요일

동네 약국도 문을 닫는 날이다

(제4회 지용신인문학상 수장작)

 

길에서 길까지


자동차에 오르자 곧 내 숨통은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다
푹신한 의자와 안전벨트의 포옹 속에서
부디 즐거울 수 있기를 내 여행에 시동을 걸며 나직이 중얼거리면
벌써 나는 행복해진다
창 밖으론 흥겹게 눈이 내리고 있고
사람들 또르르 미끄러져 백미러 뒤로 사라지는
거리는 돌아가는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추억을 상영한다

나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다
너무 어렸거나 너무 몰랐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피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중에는 눈처럼 맑은 음으로 나를 허물고 지나간
내 인생의 곧은 발자취가 되어준 사람들과의 만남도 있었다
라디오에서 듣는 흘러간 노래의 리듬처럼 익숙하지만 더러는 잊혀진
그러나 삶의 창가에 문득문득 하얗고 깨끗한 성에처럼 어리는
그들을 통해서 나는 부드러운 커브의 곡선처럼 완만해지는 법을 배웠다
이제 나는 급제동을 걸지 않고도 그 옛날의 자리에 멈추어 서서
지금의 내 속도를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삶의 이유를 안다

길은 금방 미끄러워져 세상은 느린 춤곡으로 움직이고 있고
쌓인 눈 속에서 투명한 얼음의 눈이 내다보고 있을 세상엔
길 위에서 만나는 얼굴 익은 사람들 깔깔깔 엉덩방아 찧는 사람들의
풍경들이 한 화면에 슬로로 천천히 지나가고 약속이나 한 듯
길 위의 발자국들이 어깨동무로 하나 둘씩 일어나
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을
저렇게 이웃처럼 살다가 가야 할 곳 거리에서
힐끗 돌아본 그들 속에 내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다
아예 핸드브레이크를 당겨놓고 라디오 볼륨을 높이고 나는 노래한다
그리고 오늘도 무사히 인생에 도달할 수 있기를

 199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흐와 함께 하는 달빛 감상


밤하늘엔 잘려나간 귀 하나가 걸려 있고
달빛을 물고 날아드는 환청을 그는 아파했을까
간지러워, 종일 호밀밭을 뜯어먹는
노란색을 누가 치워줬으면 좋겠어, 아버지는 당나귀,
사제관에서 노동하도록 서품을 받았지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서 맹세를 하고 싶었는데
아버지, 저는 훌륭한 사람을 그릴 수가 없어요,
온 몸의 털을 세워 어둠을 터치하는 삼나무들만 눈에 보여요
그는 울었는지 몰라, 해바라기 위에 머무는 빛에 눈멀어
훔칠 수만 있었다면 무덤이라도 팠을 거야
모든 색의 혼합인 어둠, 속에 뜨는 별들
까페와 중절모와 붓꽃 위에 소용돌이치는 별들, 미친!
날아다니는 물고기와 비릿한 석양 그리고
한 곳을 맴도는 바람과 회중시계와 개미, 미친!
왜 어떤 이들은 나서 그런 것에 제 귀를 대어보는 걸까
생레미 요양원 위로 달은 다시 뜨고
달은 그의 접시안테나, 보청기, 투명한 비닐 백
그는 방부제 처리가 되어 어둠 속에 누워있다
잘려진 귀 한쪽이 공중에 떠다닌다
무심한 듯 혹은 아주 근심스럽게
어린 풀꽃들을 향해 귀를 기울이며 숨을 쉬고 있다

 

 

 

바다거북 
                 
그는 수족관에 침몰선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에 문신을 한 아랍인의 우울 같은 것이
주름살을 파들어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유리를 들여다보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 앞발을 휘젓고 있었다
햇빛도 들지 않는 수족관에서
그는 알비노증에 걸린 사람처럼 등껍질 속으로
자주 희멀건 얼굴을 숨겼다
여기서 나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갑골문자야, 하지만
등껍질에 새겨진 세월의 이면은 점치지 못한다
한번도 깨진 적 없는
그는 몸을 벗어 던지려는 듯 한참을 끙끙거렸다
나는 신하도 하나 없는 왕이야, 그는
임금 王자가 새겨진 배를 유리에 문지르며
입을 뻐끔거렸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나마나 다 안다는 듯
그의 시선은 유리벽 밖에까지 맺히지 못했다
짤막한 꼬리로 물 속에 무수한 마침표를 찍으며
그는 그렇게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등판에 펼쳐진 별자리판에서
제 운명의 슬픈 점괘 하나를 얻은 것처럼
알라, 알라, 코란을 읊는 것처럼 그는
자꾸 콘크리트 바닥에 몸을 끓어앉히고 있었다

 

 

 

월식


1.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업고 신작로에 서 있었다. 커다란 달이 아버지 머리통을 삼키고 있었다. 짚가마니 썩은 냄새가 났다. 미루나무 아래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아버지 검은 뒤통수에 대고 나는 물었다. 저기, 죽은 여자는 언제 부활할까요. 아버지가 고개를 홱 돌리셨다. 아버지는 구멍 숭숭 뚫린 메주통, 곰팡이 포자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까치집에서 달이 돋았다. 받아라 네 어미다, 아버지는 지푸라기로 여자를 엮어 내 목에 걸어주셨다, 어머니.

2. 첫사랑
나는 팔을 뻗어 달을 집어 삼켰다. 목구멍이 찢어졌고 순식간에 나는 깜깜해졌다. 나는 돌멩이를 움켜쥐고 그녀 뒤로 다가섰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어, 다시는 수음을 하지 않겠어, 나는 떨며 돌멩이를 움켜잡고 그녀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달이 내 속에서 몸을 뒤틀고 있었다. 반짝, 꽃들이 보석처럼 빛이 났다. 그녀가 웃었다. 내 몸 속의 뼈들이 투명한 생선가시처럼 다 보였다.
나는 들고 있던 돌멩이를 들어 내 성기를 마구 찍기 시작했다. 내 몸에선 석유 냄새가 났다. 나는 흐느끼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검게, 검게, 꽃물 드는 밤이었습니다, 아버지.

 

 

조용한 가족 

 

노파는 파리약을 타 마시고 죽었다
광목으로 지어 입은 속옷엔 뭉개진 변이 그득했다
입 속에 다 털어 넣고 삼키지 못한 욕설들이
다족류처럼 스멀스멀 벽지 위를 오르내렸다
어디 니들끼리……한번 잘 살아봐라……
스테인리스 밥그릇처럼 엎어진 노파의 손엔
사진 한 장이 구겨져 있었다
손아귀에 모아진 마지막 떨리는 힘으로
노파는 흙벽을 긁어댔으리라, 뒤집혀진 손톱
그 핏물을 닦아내는 여자의 완고한 표정을
노파는 허연 게거품을 물고 맞서고 있었다
호상이구만 호상, 닭 뼈다귀 같은 노파의 몸을
꾹꾹 펼쳐놓으며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코를 막았다
서랍장 곳곳에서 물래 먹다 남긴
사과며 과자부스러기들이 쏟아져 나온 것말고도
썩은 장판 밑에선 만 원 짜리 몇 장이 더 나왔다
발가벗겨진 노파의 보랏빛 도는 입엔
서둘러 쌀 한 줌이 콱 물려졌다, 복날이었고
뽑힌 닭털처럼 노파의 살비듬이 안 보이게 날아다녔다

 

최씨 종친회

 

솔밭에 납작한 돌멩이 하나씩 깔고 앉아
사타구니 아래로 꼬리처럼 그림자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가며 노래 한 가락씩을 하는 최씨 종친회
머리 위에는 돌아가는 저녁 햇무리
서로의 닮은 입속에 고기를 쪽쪽 찢어 넣어주며
충직하고도 길쭉한 얼굴 상판들끼리
서로 대견해하고 서로 안쓰러워
자꾸 배부른 음식만 권한다
묘 자리 잘못 옮겨 망한 가족사를 남루하게 걸치고 모여
옛 족보에 나오는 유복한 조상의 함자나
퍼줄처럼 제 돌림자에 애써 끼워맞춰보다가
솔밭에 빙 둘러앉아 원을 그리고
하릴없이 수건돌리기를 할 때
언제부터 그들이 만든 저 둥글고 쓸쓸한 테두리
유전자 배열처럼 서로서로 꼬인 것들이
저들을 엮어놓고 있었던 걸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건돌리기를 하는 최씨들
그 푸석한 혈통의 새끼줄 따라 돌고 도는 햇무리, 해의 무리들
어디서 살든 서로 잊지 말자고 내년에 또 보자고
낡은 표정 한 장씩 서로의 품에 끼워주며
사진을 찍으면
눈알마다 어김없이 흘러나와 번지는 붉은 색
과부와 홀아비와 고아와 노인만 모였다가 가는 최씨 종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