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최광임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1. 10. 16:44

전북 부안 변산 출생 
2002년 <시문학> 등단 
987년 진주개천예술제 연극부분 최우수 연출상 수상 
<시와 상상> 편집부장, <다층> , <빈터>동인 
시집 <<내 몸에 바다를 들이고>>(모아드림, 2004) 
대전대 강사
 

 

담쟁이

 

이제 나는 더 이상 벽이 아니다
내 살 속 뿌리를 내리고 키돋움하며 오르는 일
처음엔 나의 알맞은 집은 아니었다 어느날
달그락거리는 뼈만 모여 살던 삶
떡잎의 네 사다리가 되어도 좋을 듯 했다 옆에는
흐드러진 능소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내가 너를 만났다는 것이다
다족류의 곤충처럼 셀 수 없는 네 손길은
갈비뼈를 어루만지며 살을 붙이기도 하고
뼈와 뼈를 맞추기도 하고 살과 뼈 사이
아귀틀림을 다듬기도 하며 나를 지워갔다
미처 허공에 줄을 긋지 못한 거미들이
너와 나 사이를 지나쳐 가기도 하였으나
벌레들이 네 몸을 뒤집어 집을 짓고
얼크러진 꿈들을 채우는 일 보며
나 없이 너의 뼈가 되어 살아도 좋았다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계절풍처럼
일정하게 떠나기도 하지만 이내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그길 지워지지 않도록
검게 야윈 금들을 붙잡은 축원
끝나고도 식지 않는 사랑이다

 
봉분 만들기

 

장마가 시작되기 전 마늘을 샀다
여름내 바구니에 담아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람을 친다
김장철 지나고 풍장의 시간을 건너고서야
제 집으로 돌아가 눈 뜨던 마늘,
지나간 시간에 봉분 하나를 만들고 있다
제 몸 섞었던 땅 바람 비
밤마다 채마밭 근처에서 울어주던
풀벌레와 별들까지 生 하나를 지운다
목 잘린 몸뚱이에 간간이 낯선 바람이 기웃거리고
장난감 찾는 아이들이 무심코 건드리고 지나가는 베란다
제 몸에 자해를 하며 자진하는 몇몇의 마늘 옆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해안으로 앉아있다
예전보다 일찍 마늘을 깐다
아직 흔적을 벗어내지 못한 마음에 칼을 댄다
추위 속에서 싹들을 뿌리째 뽑아 텃밭을 나오던 날
무딘 바람에도 베어져 나가던 마음을 기억한다
밤낮으로 정을 쳐도 날카로워지기만 하던 봉분,
오 이토록 처절한 즙 같은 눈물이라니
매운 삶을 안으로 삭이고 있지 않은가
왼쪽 검지 손가락이 싼득싼득 아린다
생채기도 없이 아물지 않는 쓰라린 生
지워지지 않는 緣을 지우라 한 죄,
베란다에서 또 누가 울고 있다

 

목련꽃 진다

 

아름다운 것이 서러운 것인 줄 봄밤에 안다
미루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
흔들어 대던 낮바람을 기억한다
위로 솟거나 아래로 고꾸라지지만 않을 뿐
바이킹처럼 완급하게 흔들리던 둥지
그것이 의지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이라고
의지 밖에서 흔들어대는 너
내 몸에 피어나던 목련꽃잎 뚝뚝 뜯어내며
기어이 바람으로 남을 채비를 한다
너는 언제나 취중에 있고
너는 언제나 상처에 열을 지피는 내 종기다
한때 이 밤, 꽃이 벙그는 소리에도 사랑을 하고
꽃이 지는 소리에도 사랑을 했었다
서러울 것도 없는 젊음의 맨몸이 서러웠고
간간이 구멍난 콘돔처럼 불안해서 더욱 사랑했다
목련나무는 잎을 밀어 올리며 꽃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이 밤도 둥지는 여전히 위태롭고
더욱 슬퍼서 찬란한 밤 또 어디서
꽃잎 벙그는 소리 스르르,
붉은 낙관처럼
너는 또 종기에 근을 박고 바람으로 불어간다
꽃 진다, 내가 한고비
진다


이상한 날 

 

수술 환자가 마취에서 덜 깨인 듯한 날이었다
지나간 버스 꽁무니를 따르는 비포장길 흙먼지 같기도 했다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도로 위 차들뿐이었고
포도밭의 포도송이는 수의를 입은 채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오전 열 시가 무기력한 표정으로 껌벅껌벅 지나갔고
야윈 두루미 몇 마리 가파른 공중에 날개를 걸치고 있었다
나무의 손들은 조용히 하늘을 향해 모아져 있었지만
기도는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 듯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안개보다 더 희멀건 해져갔다
푸른 독이 올라 있어야할 벼이삭에서는 연두비린내가 나고 있었다
버스 안 사람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으나 염분기가 빠진 생선들 같았다
구부정한 어깨로 시계는 오후 네 시를 지나가고 있었고
세상은 귀가 시간도 아닌데 귀가를 서두르고 있었다
오늘도 태양은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문만 퍼졌다
나는 습관처럼 내일 버스를 탔다가 빈혈 앓는 오늘을 버스에 실었다
놓쳐버린 무엇인가 아귀 틀린 톱니바퀴처럼 삐걱대기 시작했다
밤의 어둠을 견디는 일은 어둠이 아니었었다
절망일 때 절망을 견디는 일 따윈 절망이 아니었었다, 라고
불완전한 내일 속으로 관성의 버스가 달리며 바람을 만들었다

 

도로변 플라타너스, 커다란 손바닥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꺼운 옷 입고 있었다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밥때를 비켜 혼자 아무렇게나 끼니를 때우는 일이다
식은 밥에 고추장 얹고 통깨 몇 알 뿌려 비빌 때의 느낌과
타올로 제 몸의 때를 밀 때의 퍽퍽 함이나 같은 일이다
싱크대 위, 흐린 햇살을 쳐놓고 선 채로 쓸쓸함을 뜬다
식도를 타고 오르는 간밤의 취기
나 말고 또 누구를 만났었던가
붉은 밥수저 안에서 역류성 식도염이 따끔거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다
겹겹의 웃음이 번지고 있지만, 장기 공연하는 배우들 같았다
말이 건배를 하고 술잔이 건배 할 때도
형광등보다 도수 높은 쓸쓸한 눈빛들, 외투 속
어깨를 심하게 들먹이며 골목 어디로 흩어지던 사람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보다
사랑 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은 더 쓸쓸한 일이다
사랑이 없다는 것과
사랑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다른 일,
유치환의 행복이, 한도 초과 카드 명세표처럼 거치적거린 날
살얼음 얼던 간밤의 거리는 무표정하다
누군가 혼자서 밥을 뜨고 두꺼운 외투를 걸치는 하루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