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관련

진은영 시인

휘수 Hwisu 2006. 12. 25. 00:33
진은영 시인

 

 1970년 대전에서  출생하여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 계간 『문학과사회』 봄호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2003년 문학과지성사)가 있다.

 

진은영 시인. 그녀는 30대 중반의 시인이자 철학도이다. 학부 시절에는 내내 아르바이트, 가두시위, 노동자신문 팔기 등을 하면서 혁명적 노동시인을 꿈꾸었고, 현재에는 학문 연구자들의 코뮨인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에 적을 두고 철학관련 서적도 출간한 바 있다.

이 사람의 시를 읽으며 깊이와 더불어 현실의식까지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일까? 


 시집의 제목이 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시를 보면 시인이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를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은 자본주의를 “혼자 걸어서 지나”갈 수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 즉 혼자 있고 두 다리밖에 없는 자는 형형색색의 컴컴한 터널 속에서 익사해죽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잠깐 <도시>를 보면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혼자서 걸어가려는 이들은 버스정류장 구인광고에 붙어지내다 스러지는 하루살이이고 자본주의에 잠식된 도시에는 낮달조차 동전같은 모습으로 뜬다. 그리고 그녀는 문학을 막막하고 고독하고 공포가 엄습해올 때 한줄기 위안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이는 그저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일 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학은 무용하기에 유용하다하지 않는가? 어두운 현실 속에서 시인은 이미 부러져 쓸 수 없는 피리로라도 벽을 탕탕치며 희망이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이미 무기마저 빼앗긴 무력한 상태이지만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도 “물에 불은 나무토막”도 견뎌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시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반면에 그 안에 내가 찾는 너는 없다고 말한다. 결국 무의미한 편지일 따름이다. 혁명도 마찬가지로 눈뜨고 바라보는 현실에는 없는 별들의 회오리이다.


 위의 시 외에도 여러 시에서 그녀에 대한, 혹은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가족에 관한 부분과, 혁명과 오늘날의 청춘에 대한 언급, 그녀가 보여주는 시론(詩論)을 중심으로 보려 한다.

 

억압자로서의 가족 


 시인은 <가족>이라는 시에서 “밖에선 /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 집에만 가져가면 / 꽃들이 / 화분이 // 다 죽었다“ 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가족이란 외부에서 보기에는 이보다 더 가치있는 것이 없다. <푸른색 Reminiscence>에서 추억이 덮어놓고 냅두고 있으면 속에서 썩어가고 있다하더라도 겉보기에는 산뜻할 수 있듯, 가족도 내면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너무나도 따뜻하고 소중한 가치이다. 하지만 이 테두리는 개인을 구속하고 현실적, 전근대적 가치를 내면화할 것을 강요하는 억압기제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족이라는 혈연적 관계 내에서의 본질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갇혀 이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안에서 미적 가치는, 생명은, “다 죽었다”. 


 <귀가>에서 역시 가족, 혹은 집은 긍정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 시에서의 나는 쥐인데 우리 집, 가족 안에 숨고싶어한다. 하지만 “집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 즉, 견고하다. 내 가족이 사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들어가길 원하면 수챗구멍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결국 귀가는 따뜻하고 편안한 쉼터로의 회귀가 아니다. 어머니 사시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나는 수챗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집의 뱃속으로 삼켜짊으로 그려진다. 가족은 나를 잡아먹는 곳이다. 


 또다른 시 <달팽이>에서는 집을 짐으로 표현한다. 이 짐 속에는 아버지가 주무시고 가족이 있다. 이런 짐을 가진 달팽이는 서글픔, 눈물을 상징하는 달로 가야한다. 시인은 짐을 벗기 위해 꿈에서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파한다. 가부장을 부정하는 시인으로서는 아버지가 나타나면 자꾸 살해할 수밖에 없으므로 아버지에게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외친다. 하지만 아버지는 핏빛 노을이 있어야만 달로 갈 수 있다고 일러준다. 그리고 달이 창백한 이유를 가족 안에서 일찍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아픔에 의한 출혈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내’가 아픔에 성숙하여야지 달이 되어 잔잔하게 안정할 수 있다. 기실 이런 공간으로서의 가족 내에 태어나는 것은 <유괴>에서 파악할 수 있듯 안식처에서 아버지에 의해 끌려온 유괴일 수 있다. 플라톤이 인간의 몸뚱이를 일종의 감옥으로 보듯 시인도 별들의 놀이터에서 놀던 나를 아버지라는 유괴범이 유괴해 와서 좁은 철창에 가두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깥 풍경>을 보면 아버지역시 다른 가족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구조 안에서 불균형적인 의무지워짐에 피해받고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아버지는 폐수 속에서 보였는지 안보였는지도 모르겠는 금빛 고기떼(희망)을 바라, 낚는 행위를 중단치 못하고 계신다. 그 스트레스로 인해 집에서 술병을 산산이 깨뜨리고 그걸 본 나는 독 품은 뱀에게라도 뒤꿈치를 물리기를 바란다. 이런 집안에서 동생들이란 존재는 누이인 나에게 그저 던져버렸으면 하는 짐이 된다. 하지만 버릴 수 없는, 기어이 매달고 가라앉아버릴 수밖에 없는 짐이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강인하고, 무정하고, 메마른 플라스틱 꽃 같았으나 자식(가족)으로부터 말 한마디에 의해 상처를 받으면 견디지 못하고 시들어버린다. 모든 구성원을 슬픈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가족 안에서 스물 세 살의 나는 눈물이 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모습과 지향하는 자세 


 시인에게 있어서 오늘날의 사람들, 혹은 자신은 무언가에 억압되어있고 치열하지 않다. 깊은 내면적 성찰이 가능한 시간대인 새벽 3시에 깨어있는 사람은 잠을 자기 위해 도망치는 불면증 환자이고, 직업에 얽매여있는 늙은 세일즈맨이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되면 내일을 위해 자야하고 그동안의 빛날 수 있었을 사고는 쓰레기로서 은빛 레일 밖으로 치워진다. <새벽 세시>


 그리고 나는 수많은 날의 어제를 굶겨죽여 후회스런 날로 쌓아온다. 이제 오늘을 베껴쓰기의 시간으로 명명하여 미래를 채우려 한다. 무수한 어제들을 모아 쌓아서 오늘을 빛나게 하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이런 다짐을 통해 우리에게 살찌운 어제를 점철시켜 자신을 그려가라는 요구를 한다. <어제> 청춘의 시절에 있는 자는 특히 어느것도 정확히 규정된 바가 없이 중간자적 위치에 존재하고 있기에 더욱 이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에게는 어린 날의 가능성은 말살되어가면서도 숙달된 노련미는 아직 없다. 그리하여 어디에도 적을 두지 못하고 "사이만을 돌아다"니게 되며 결국 아무것도 채우지 못해 "언제나 가뭄"의 시기를 보낸다. <청춘1>


 위와같은 오늘날의 휘둘리고 방황하는 사람들, 특히 스무살 청년들은 너무 높은 곳에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입을 축이는 기쁨을 선사하지 못한다. 그가 흘리는 눈물은 타인에게 양분이 되어주지 못하고 저 높디높은 첨탑 꼭대기에 매달린 일개 포도송이가 되어 어느누구의 그늘도 되어주지 못한다. 그에게 수천개의 물방울이 모인 이유는 수많은 학살과 노동자의 분신, 억압, 부당한 사망들을 기억하고 쓰고 말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스무 살 메마른 입술, 투명한 포도알은 채워지지 않고, 색깔을 가지지 않고, 입장을 가지지 않는다. 결국 열정도, 혁명도, 의지도 없다. 그는 건조한 현실에 건조하게 거居할 뿐이다.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


 게다가 현실은 규정된 일만 일어나는 백주대낮이다. 어둠이 깔리고서야 칠판에 적혀있는 글씨들은 불명확하지만 희미하게 빛나서 겨우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줍잖은 시혜로서의 강철 드롭프스를 바라 하루종일 침묵한다. <교실에서> 이런 현실에서는 잠꼬대조차도 조심하지 않으면 곧바로 총성과 살해, 취조를 부른다. 이런 안개속의 도시에서 우리는 감각기관도 잠식당하고 신도 역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창문을 닫고 우리를 외면하여버리고 만다. <燃霧도시>


 그런 상황에서 시인은 사람들의 "한 알의 밀알로 썩어 / 거대한 밀밭을 꿈꾸는" 모습을 언급한다. 그들은 거대하게 부활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저 썩어 한방울의 향기로 흩어지기를 원한다. 이를 통해 시인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여 후일담을 멋들어지게 늘어놓는 것보다 아득하게 흩어져 세상의 모든 바람에게 의미를 가지는 존재를 지향할 것을 노래한다. <하나의 밀알이 썩어>

인식도구로서의 시 


 시인은 시를 손가락으로 쓴다. 손가락은 현실을 직접 만질 수 있기에 머리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손가락과 동일시되는 가지에서는 몸에서 외부를 향해 뻗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손가락도 외부를 향해, 나로부터 가장 멀리 '뻗어있기에' 대상을 가리키고 인식하기에는 좋다. 하지만 '멀리' 뻗어있기에 인식대상을 내가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지의 여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멀고도 먼 존재의 인식에 있어서는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불분명하게라도 더듬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인은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긴 손가락으로 "그래도 나는 시를 쓴다". <긴 손가락의 詩>


 하지만 불분명한 인식인만큼 그녀는 자신의 시에 "아무것도 없"으니 기대치 말라고 한다. 이 시에는 그저 가벼운 "창고의 먼지", 허약한 "기침 소리", 마실 수 없게 얼어버린 "한 컵의 물"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불확정적이기에 "쉽게 말할 수 있는 미래"와 가까이 있으므로 "규정할 수 없는 "지금 여기""가 있으며 올바로 인식치 못하고 "더듬거리는 혀들"이 있다. 이 거리에는, 이 시에는 원하는 선물이 따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치않는 선물을 받는 어린이, 나와 멀리 떨어져있는 존재자가 아닌 가까운 곳의 사실적 존재를 말하고자 하는 자가 있다. 이러한 시들에는 간극이 있고 그 곳에 내리는 눈은 쌓이지 않으며 흩어져버린다. 결국 그 사이는 채워지지 않는다. <이전 詩들과 이번 詩 사이의 고요한 거리> 


 <詩>를 보면 시에 대한 시인의 정의를 엿볼 수 있다. 이 시의 전반부에는 "-이야"라는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시에 대한 규정을 짓는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이여"라고 하면서 규정된 시를 부르고 갈망한다. 여기에서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예민함과 민감함을 지닌 풀잎이고 촛불이면서, 폐부를 찌르는 칼, 빙산을 갈라뜨리는 열기이다. 그리고 현실속에서 절박하게 울부짖는 아이, 여린 종잇조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이 <나의 일> 속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바를 볾으로써 그녀의 현실에 대한 입장, 시론(詩論)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 시에 의하면 시인이란 시간 속에서 자연의 언어를 번역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연은 침묵하고 있음에, 침묵 당하고 있음에 나는 실업자가 되었다. 가끔 생기는 일마저도 핏빛 깃털들이 거리에 휘날리는 5톤 트럭에 깔린 비둘기들의 말을 해석하는 정도 뿐이다. 그녀로서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이제 현실에서 시인이 번역할 수 있는 것은 참담한 핏빛·검은빛일 뿐이다. 현실의 참상이 이러할 뿐이다. 그녀의 시에 잔인하고 어두운 일면이 나타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긴 손가락의 詩 /진은영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
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
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어지도  못하고 나
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
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

 

출처, 우원호와문화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