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 시모음 1
전남 영암 출생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월동
햇빛은 눈을 빤히 뜨고 사람을 보는 버릇이 있다
셔츠에 좀이 슬어 잔구멍이 났지만
가슴을 파먹고 옮겨가는 벌레들을 막을 수 없다
숫돌을 꺼내 심장을 간다
무딘 채로 버틸 수 있다면 끝내 버텨보는 것인데
벼르고 별러도 뱃머리를 댈 곳이 없는
길이 그물에 걸린다
겁먹은 바람이 우편함에서
납기가 지난 사망 통지서를 집어다 준다
납기를 대지 못한 생은 몇 퍼센트의 연체료를 가산하는지
잘 벼린 정맥으로
북극성 귀퉁이에 풀어진 나사를 조인다
추위에 새들마저 길을 잃으면 큰일이다
냉랭하게 마음을 사리고 잠든 뱀이 소스라친다
수화기의 끈을 풀어놓고
새들이 내려앉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올해는 果樹도 쉬는 해다
해가 찢어진 그물을 당기며 하혈을 한다
해초 무침에서까지 나프탈렌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폐선의 머리를 쪼개 불을 피운 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면
가슴이 아픈 물고기를 모조리 붙잡아 식탁에 올릴 수 있다
낡은 절을 만나면 그 가슴에 들어가 못을 줍고
찬물을 떠서 마신다
바위에 노랑 각시붓꽃 뿌리가 얼룩져 있다
꽃은 죽어서도 눈을 빤히 뜨고 사람을 홀리는 버릇이 있다
누에막 살던 연순이네
못을 쳐
지네 스무 마리씩 묶어서 거는
사내가 기우뚱 올라 선 사다리 사이로
누에 철이 소낙비처럼 지나가는 중이었으니
닭 뼈를 던져두면 비자나무 그늘로 슴슴슴슴 지네가 모여들었다
청상의 코를 물어뜯어 제 여자를 삼은
사내는 동각 뜰에서 칠흑처럼 짓이겨져 죽지 않고
동네 곁을 살아내며
내 친구 연순이를 낳고 그 애 동생 순복이를 낳고 그 아래 길남이를 낳고
내가 놀러 가면 얼굴이 깨어지게 웃어 주었다
닭죽 솥을 열고
복 복자 써진 사발에 그득 떠주기도 했다
병 있는 집 음식을 얻어먹어 나는 매를 맞았고
사내는 녹슨 못에 지네를 남겨둔 채
세상을 떴다
무덤가에 끄윽끅 장끼가 울었다
코에 흉이 진 아낙이
사기그릇을 한 솥 삶아 소쿠리에 건지는 동안
몸빼 밑에 드러난 복사뼈가 고왔다
문장 웹진 1월호
저녁 무렵
문을 열고 문설주에 두 손을 받치고 선다
바다는 종일 고요했다
벌레들은 마른 땅을 더듬으며 아직 먹이를 찾는다
칡꽃들이 활짝 돌아보며 바람에게 흘리는 향내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깃줄에 앉아 저무는 해가 질 때까지
작은 새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다가 죽지를 벌려 얼굴을 가린다
서울에서 오는 전화는 늘 캄캄하다
밥은 한 끼만 먹어도 좋겠다
저녁 어선들은 불을 켜고 어디까지 들어가 그물을 던지는지
멈추지 않고 간다
창조문예 2004년 12월호
배추꽃 무꽃
몹쓸 것들
파도에 한눈 파는 척 하면서
간을 쏙 뽑아간다
당포리 돌아 월래리 드는 바닷가 비탈밭에서
심장은 내려앉아 어느 발치로 굴러 떨어졌는지 모르는 채
나는 허깨비다
내 간을 받아들고 배추꽃이 웃는다
내 쓸개를 받아들고 무꽃이 웃는다
예쁘다는 말을 꼭 그렇게밖에 못 하는지 눈을 흘겨도
조촐하고 거나한 밭둑에 서서 다른 말 다 잊어버렸다
창자까지 마저 빼주고
더 줄 것이 없어서 줄래줄래 집으로 돌아왔다
문학저널 2006년 3월호
칠량으로 지는 해
목선을 마당 앞까지 밀어놓고 칠량만은 잠이 들었다
빈틈없이 꽃피어 배롱나무가 이생을 환하게 벗어난 후였다
묵은 장처럼 찰랑한 햇살 속에
물레는 돌고
흙덩이를 말아 올리며 사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잔 흙은 떨어져
사내의 발등에 떨어지기도 하고 안 떨어지기도 하는데
나는 거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내도 없기는 한가지였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 덫에 든 쥐도 움직이지 않았다
늙은 갯벌이 슬그머니 바다를 당겨 덮는
기척에 등 뒤가 서늘하였다
저 큰 물레를 누가 돌리고 있었나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옹기 한 잎
물레에서 툭 떨어져 바다를 넘어갔다
붉은 골목
길을 잘못 들기는 흔한 일이어서
별 수 없이 다음 골목으로 꺾어들어도 길은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 골목에서
늙은 개가 내 차의 브레이크를 밟은 건 아니었고
번호 붙은 유리문들이
홍등 아래 딸 하나씩 담고 사열 중이었다
나는 남대문 시장 지하에 앉아
아무도 내가 파는 물건을 사가지 않는 헐벗은 밤을 생으로 삼켜가며
오장육부를 조금씩 헐어 빚을 갚을 때였는데
길을 잘못 드는 사내도 없는 대낮 골목에 차를 세우고
생수 한 병을 사고
편의점 의자에 앉아 버렸다
와이드 판탈롱 밑 이십 센티 통굽 샌들에 저마다 잘못 접어든 길을 끌고
딸들이 흔들흔들 걸어 나와
내 간과 쓸개와 가래가 잡히기 시작한 허파를
뚝뚝 떼어 먹었다
기도한 지 오래 되어 약도 되지 않는 나는 미안할 뿐이었다
A-6호 유리를 닦고 난 여자가
A-7호, A-8호 앞으로 물이 흐르는 양동이를 옮겨가는 동안
생수를 마시며
남자 없이 아이를 배고 싶었다
백 명도 더 되는 딸들을 담아갈 내 자궁을 살펴보았다
날마다 골방에 들어가
낳고 낳아야 할 딸들을 담고 나오는 골목이 붉었다
다도해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어린 솔이 돋았다
몇 번이나
바다 곁으로 너울거리던 불이
솔씨 몇 톨을 남기고 갔다
섬 뒤에 섬이, 또 섬이
발을 구르며 우는 동안
죽은 개처럼 그슬려 버린 산
엎드렸다가 내다보면
옥색 바다
울다가 내다봐도
옥색 바다
그 얇디얇은 눈물이 흘러 겨우내 칠량 바다가 반짝였다
오늘도 너를 보고 있어
한정 없이 긴 침묵 끝에 다가와
귓속말을 전하고
섬들이 고요히 제 자리로 헤엄쳐 갔다
노인이 어린 솔을 피해 염소를 맨다
되돌아와 가만히 솔잎을 쓰다듬은 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간다
광주행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고 지나간다
현대문학 2000년 4월호
애기 옹관
그릇인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여자가 없어서
나는 그릇이 아니었다
젖은 가슴을 불 속에 두고 애기를 받아 안은
나는 어미였을까
어린 새는 죽어서도 내 그물을 끊으며 날아갔다
애끓고 소란하여
천 년이 하루 같았다
머리맡에 풀이 욱거나 봄이 보습 날을 물고 지나갔다
꽃대 튼튼한 용설란이 흔드는 산산조각 흰 요령 소리를 듣는다
질라래비 훨훨
굴삭기 큰손을 따라 애기가 정수리를 부시고 들어온다
나는 외롭고 마음 평평한 사금파리다
옹기장이가 나를 반죽하여 다시 무엇을 만들 수 없다
빈집
죽은 시계가 벽에 붙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 굽은 부엌문 안에서
시커멓게 다리를 벌리고 쏘아보는 아궁이에게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던가
뒤란 마타리꽃 얼굴이 눈에 부실 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룩 뱀이 등을 빛내며 장독 그늘로 스며들어갔다
마음이 먼지처럼 줄어
빈 손바닥으로 마루를 쓸어 주었다
시작되기 전에 넘치고 멈추지 못해 지나친 기다림이었다
속이 비치는 여름옷 위로 칠점박이 무당벌레들이 날아앉아
살을 더듬어 왔다
등燈 같은 어린 것들이
얼굴 깨어진 사진틀을 지나 목구멍까지 늘어진 거미줄을 타고 가물가물
주저앉은 방구들 틈
없는 무릉을 메고 떠도는 쥐며느리 떼를 비추어 주었다
개가죽나무처럼 어두워져서 나는 기우뚱 저승으로 몸을 기울인채였다
계간, 시선 2006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