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 시모음
경북 안동에서 1960년에 태어난 조은 시인은
1988년 계간 '세계의문학'에
「땅은 주검을 호락호락 받아주지 않는다」 외 삶과 죽음에 대한
묵시론적인 통찰을 보여주는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
그후 세 권의 시집 『사랑의 위력으로』 『무덤을 맴도는 이유』
『따뜻한 흙』을 출간, 산문집 『벼랑에서 살다』, 장편동화집
『햇볕 따뜻한 집』과 『동생』을 출간.
현재 서울 종로의 소담한 한옥집에서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문고리
삼년을 살아온 집의
문고리가 떨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았던 문
헛헛해서 권태로워서
열고 닫았던
집의 문이
벽이 꽉 다물렸다
문을 벽으로 바꿔버린 작은 존재
벽 너머의 세상을 일깨우는 존재
문고리를 고정시켰던
못을 빼내고
삭은 쇠붙이를 들여다 보니
구멍이 뻥 뚫린 해골처럼 처연하다
언젠가 나도 명이 다한 문고리처럼
이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나라는 문고리를 잡고 열린 세상이
얼마쯤은 된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
내가 살기 전에도
누군가가 수십 년을 살았고
문을 새로 바꾸고도 수십 년을
누군가가 살았을 이
집에서
삭아버린 문고리
삭고 있는 내 몸
따뜻한 흙
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
씨앗들이 묻어 왔다
씨앗들이 내 몸으로 흐르는
물길을 알았는지 떨어지지 않는다
씨앗들이 물이 순환되는 곳에서 풍기는
흙내를 맡으며
발아되는지
잉태의 기억도 생산의 기억도 없는
내 몸이 낯설다
언젠가 내게도
뿌리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 뿌리에서 꽃을 보려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는 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내 고통은 그곳에서
샘물처럼 올라온다
씨앗을 달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담쟁이
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
나를 가두었던 것들을 저 안쪽에 두고
내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겠다
지금도 먼 데서 오는 바람에
내 몸은 뒤집히고, 밤은 무섭고, 달빛은
면도처럼 나를 긁는다
나는 안다
나를 여기로 이끈 생각은 먼 곳을 보게 하고
어떤 생각은 몸을 굳게 하거나
뒷걸음질치게 한다
아, 겹겹의 내 흔적을 깔고 떨고 있는
여기까지는 수없이 왔었다
한 번 쯤은 죽음을
열어 놓은 창으로 새들이 들어왔다
연인처럼 은밀히 방으로 들어왔다
창틀에서 말라 가는 새똥을
치운 적은
없어도
방에서 새가 눈에 띈 건 처음이다
나는 해치지도 방해하지도 않을 터이지만
새들은 먼지를 달구며
불덩이처럼
방안을 날아다닌다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숨죽이고 서서
저 지옥의 순간에서 단번에 삶으로 솟구칠
비상의 순간을 보고 싶을
뿐이다
새들은 이 벽 저 벽 가서 박으며
존재를 돋보이게 하던 날개를
함부로 꺾으며 퍼덕거린다
마치 내가 관뚜껑을
손에 들고
닫으려는 것처럼!
살려는 욕망으로 날개짓을 한다면
새들은 절대로
출구를 찾지 못하리리라
한 번쯤은 죽음도
생각해 본다면……
내게도 저런 곳이
나뭇잎들이 시멘트바닥에
수북 모여 있다
(내 안에도 드문드문 저런 곳이 있다)
지난해에도 그 전 해에도
나뭇잎들은
저곳에 모여 웅성거렸다
(四柱에 큰 나무로 태어났다는
내 안에서도 가끔 저런 소리가 들린다)
봄에는 수많은 꽃잎이
저렇게 모여 떠날 줄 몰랐다
결속을 풀지 않는 나뭇잎들
길 속에 뇌처럼 들어있는 나뭇잎들
언제부턴가 움푹 꺼진 시멘트
바닥엔
균열이 생겼다
(내 안에 드문드문 저런 곳이 있다)
그 틈으로 생성의 활기로 가득 찬
상쾌한 물의 기운이 올라온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