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 시모음
1976년 서울 출생
연세대 국문과와 서울예대 문창과를 졸업
2004년 「초식」외 6편의 시로 『문학동네』로 등단
2006년 시집 <선명한 유령> 실천문학
선명한 유령
그는 일종의 유령이므로 어디든 막힘없이 떠돌아다닌다.
그의 모습은 선명하지만 누구의 눈길도 받지 않는다.
다만, 개들이 알아채고 짖을 뿐이며 비둘기들이 모여들 뿐이다.
그에게는 땅이 없지만 발을 딛는 곳이 모두 그의 땅이다.
그는 사람의 집이 아닌 모든 집에 세 들어 살 수 있다.
쥐와 함께 자기도 하며, 옷 속을 바퀴벌레에게 세 주기도 한다.
그의 땅은 기후가 사납다. 폭우가 내리기도 하고
폭설이 내리는가 하면 모래바람이 불기도 한다.
그래도 그는 걱정이 없다. 그가 지나가면 그의 땅은 사라지므로.
오히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물과 먼지를 빨아들여 갑옷처럼 단단해진다.
그의 옷은 그의 살갗이다.
그의 몸은 카드와 화투 마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그것들을 먹었는지 그것들이 그를 먹었는지 알 길은 없다.
분명한 것은 그것들이 발효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서는 썩어가는 생선대가리 냄새가 난다.
사람들, 저마다 작은 집과 작은 땅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몸만큼의 권리를 지닌 채 실려가는 지하철에서 나는
그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칠 인용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가 누우면 의자는 침대가 되었다.
그가 움직이면 그 칸은 그의 전용객차가 되었다.
그의 냄새 앞에서 사람들은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다.
그는 냄새의 포자를 뿌리며 번식한다.
포자를 덮어쓴 사람들은 잠재적 유령이 된다.
그가 걷는 길이 곧 그의 길이며, 그가 먹는 것은 모두 음식이다.
일단 그가 되고 나면, 그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냄새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유령이다.
복덕방 노인
유리창은 거대한 지도였다
그는 지도를 등지고 앉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녹슨 풍향계처럼 삐걱거리며
그의 목뼈만 조금씩 틀어졌다
찾아오는 구매자나 매매자는 없었다
그의 머리는 먼 우주의 한 지점을 가리킨 채
기다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가 사람들은 하나 둘 짐을 꾸려 떠났다
비둘기들이 날아와 그의 눈을 파먹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입을 벌려 검은 연기를 뿜어올렸다
연기의 꼬리가 끊어지면 고장난 엔진 소리를 내며
단칸방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방이 나오는 족족 비둘기들이 물고 날아갔다
상가를 배회하던 개들은 비둘기들이 놓친 방을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거리며 다투었다
한번 벌어지자 그의 입은 계속해서 방을 낳았다
지도 위에서 붉은 집들이 뚝딱거리며 세워졌다
그의 팔과 다리가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건물주가 찾아왔을 때 유리창 앞에는
젖은 나무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인부들이 해머를 휘두르자 복덕방은 허물어졌다
벽돌더미 사이로 노인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시집, 선명한 유령(2006년 실천문학)
草食
바람이 불고 부스럭거리며 책장이 넘어간다.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을 노려보던 눈동자가
터진다. 검은 눈물이 속눈썹을 적신다.
그는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의 독서를 막는다.
손가락 끝으로 겨우 책장 하나를 잡아누르며
보이지 않는 종이의 피부를 더듬는다.
그곳은 활자들의 숲, 썩은 나무의 뼈가 만져진다.
짐승들의 배설물이 냄새를 피워올린다.
책장을 찢어 그는 입안에 구겨넣고 종이의 맛을 본다.
송곳니에 찍힌 씨앗들이 툭툭 터져나간다.
흐물흐물한 종이를 목젖 너머로 넘기고 나서
그는 이빨 틈 속에 갇힌 활자들의 가시를 솎아낸다.
검은 눈물이 입가로 흘러든다. 재빨리
그는 다음 페이지를 찢어 눈물을 빨아들인 다음
다시 입 속에 넣고 느릿느릿 씹는다.
입술을 오므려 송곳니를 뱉어낸다.
그의 이빨은 초식동물처럼 평평해진다.
다음 페이지를 찢어 사내는 송곳니를 싸서 먹는다.
검은 눈물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
텅 빈 눈동자 속에 활자들이 조금씩 채워진다.
2004 문학동네 당선작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