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시안 신인 당선작 / 이명윤
돌 하나를 집어 드니
한쪽 모서리가 깨어져 있다
돌보다 더 단단한 힘이 다녀갔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어디론가 발설되었을 이력을 더듬는다
옛날 옛적 어느 추장의 돌도끼였나
날카로운 이빨이 만져진다
바람처럼 날던 날개가 보인다
어느 시골집 돌담이 되어
서느런 달빛에 몸을 적셨나
달빛 무늬 박힌
헤아릴 수 없는 날들
바위였다가, 돌덩이였다가, 돌멩이가 된
네가 걸어온 길을 생각한다
다시 입 다문 침묵
또 얼마큼의 세월을 달려 갈 것인가
너는 끝내 남겨지고 나는 사라질 것이다
두려운 느낌이 드는 순간
돌이 어느새 나를 던져 버리고
저만치 제 갈 길을 간다.
항남우짜 *
당신은 늘 우동 아니면 짜장
왜 사는 게 그 모양인지
시대적 교양 없이 물어보지 않을게요
그래요, 그래서 우짜라구요
우동이냐 짜장이냐
이제 피곤한 선택은 끝장내 드리죠
짜장에 우동 국물을 부어 태어난 우짜
단짝 같은 메뉴끼리 사이좋게 가기로 해요
화려한 풀코스 고급요리 식당이 진을 친 항남동
눈치 볼 것 있나요 뒷골목 돌아
친구처럼 기다리는 항남우짜로 오세요
꿈틀대는 이마 주름에 꾸깃한 작업복
당신도 면발계층이군요
면발처럼 긴 가난을 말아 올려요
입가에 덕지덕지 짜장웃음 바르고
우동처럼 후루룩 웃어 보세요
후딱 한 그릇 비우고 큰 걸음으로
호주머니의 설움을 빠져 나가야죠
달그락 우동그릇 씻는 소리
가난한 날의 저녁이 달그락 달그락 쉴 새 없이 몰려와요
아저씨 또 오셨네요, 여기 우짜 한 그릇이요
꼬깃한 지폐 들고 망설이다
문을 열고 들어선 얼굴
어쩌겠어요 삶이 진부하게 그대를 속일지라도
오늘도 우짜, 웃자, 라구요.
* 통영시 항남동에 위치한 분식집 이름. 우동과 짜장을 섞어 만든
우짜메뉴로 유명하다.
화살표를 따라 걸어요
지난 밤 서너 개의 화살이 어둠을 뚫고 지나갔지요
출근길 등에 박힌 화살을 보며 아홉 시의 남자가 웃어요
가랑이를 벌려 하품하는 두 시의 남자
승용차를 탄 오후 네 시의 남자가 손을 흔들며 지나가요
그러나 화살은 더 빠른 속도로 그를 추격하고 있지요
물구나무 선 여섯 시의 남자를 지나 나는 계속
화살표를 따라 걸어요
수억 개의 화살이 창공을 날아다니고
이미 구멍 숭숭한 밤하늘은 자꾸 자라나고 있네요
먼 산 뒤에 숨어 밤새 화살촉을 다듬는 저 토인은
누구인가요
붉은 빛 한 줄기 화살보다 빠르게
동공에 박히는데요
몸에 박힌 화살들이 부르르 비명을 떨어요
할아버지 보낸 화살 아버지 보낸 화살
온 몸의 화살을 뽑고서야 통증은 사라지겠죠
할머니 편안히 가시라고 배웅하고 오는 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
화살표가 나를 따라 걸어요.
벌초
시간은 복사기 불빛처럼 스치고 달아나요
A4용지처럼 아스라이 쌓여가는 일상을 뒤로 하고
오늘은 아버지, 당신에게 가는 날
어머니는 아버지 머리 깎는 날이라 하시고 아내는
스케줄에 의한 세 번째 집안행사라고 하지요
망자의 침묵도 아랑곳없이 여기저기 무성히 내민 손들을
저는요 아버지 근심이라 생각할게요
오랜 세월 지났어도 안부처럼 자라나는
그래요, 아버지 근심 들어 드리려고 왔어요
아가, 너희들 근심이나 밑동을 치려무나
제초기로 대출이자나 싹둑 자르거라
그렇군요 낼 모레가 또 대목이네요
왜 바람은 빈 호주머니부터 더듬을까요
근심은 잡초보다 빨리 우거져요
수풀 속에서 나비 한 마리 날아올라요
우리 기억은 너울너울 가벼워지고 있나요
거미줄에 걸린 저 벌레
기억상실증에 걸린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네요
죄송해요 아버지, 오래 있진 못하겠어요
저기 길이 한숨처럼 뱉어내는 긴 행렬을 보세요
집으로 오는 길
가지 끝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백일홍을 보았어요
쉬이 잠들지 않는 바람에
고장 난 시계추처럼 머리를 흔들며 앞다투어
가을을 넘고 있었어요.
장마
라라라,
그가 봉지를 찢고 딱딱한 라면을 꺼내 들어요 그는 라면을 희망적으로
읽지요 창문 너머 훔쳐보는 고양이의 눈빛 따윈 신경 쓰지 않기로 해요
라면, 라면, 라면,
라면은 잠시나마 그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가요 그가 부자라면 그가 실
업자가 아니라면 그가, 그가 아니라면 곧 냄비 속에서 친친 감긴 긴장을 풀
고 길이 되어 춤 출 것이죠 와글와글 끓어오를 것이에요
창 밖, 장맛비가 쫙쫙 펴진 면발처럼 내려요 라면이 끓자 전화벨이 시끄
럽네요 그는 허겁지겁 라면을 먹기 시작해요 지독한 고양이, 그는 달라붙는
고양이를 걷어차 버려요 만복여인숙 303호실 창문 너머 휴대폰을 든 고양이
가 떨어지네요 하나 남은 마지막 라면을 먹어치우며 그는 연신 중얼거리죠
빌어먹을 고양이,
똑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려요 붕대를 감은 고양이가 손바닥을 펴며 웃는
데요 이봐, 벌써 석 달이나 밀렸어,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봅니다 여전
히 장맛비가 쭈르르 쭈르르 내리는데요 얼마 못 가 거리는 퉁퉁 불어터질
것인데요,
출처, e 시인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