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 시모음
정철훈鄭喆熏 1959년 전남 광주
1997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살고 싶은 아침』 『내 졸음에도 사랑은 떠도느냐』
눈 반짝 골목길
아직도 연탄 때는 집이 있나 보다 하고
무심코 지나칠 뻔했다
골목길 깊숙이 탄을 져 나르던 사내가 털퍼덕
맨땅에 주저앉아 두 발을 주물러대는 것이었다
저만치 팽개친 신발 속은
어느 무너진 갱도처럼 어둡고 막막한데
발가락 하나가 양말을 뚫고 나와 꼼지락거리고
사내는 발을 주무르다 말고 오가는 행인 속으로 눈길을 파묻는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무슨 이유가 있다거나
혹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한들
거기 삐죽 삐져나온 새까만 발가락이 있는 한
게다가 연탄을 들인 돼지갈비집 입간판에 막 불이 들어왔으므로
살아볼수록 세상은 아름답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산다는 게 희망일 수는 없는 일이겠지만
사내의 시선 밖에서 내가 사내를 지켜보듯
내 시선 밖에서 또한 나를 지켜보는
무참한 눈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꼼지락대는 발가락처럼 나 자신이면서 내가 아닌
그 검고 반질반질 반짝이는
문예중앙 ( 2004년 여름호)
빈집
영하 이십도
산장에 주인장은 없고
씩씩 하얀 김을 뿜어대며
기름보일러만 요란하게 돌아간다
주인은 일주일에 한번 내려온다니
나머지 엿새는 집이 집의 주인이요
집 속에 집이 산다
지붕이 들썩였던가
고드름이 퍼석 떨어지고
문고리를 잡은 손이 쩍 달라붙는다
문고리는 길손의 손을 바싹 잡아당기며
말한다
네 안에 사람을 들여라
돌아서서 내려오는 길에
소나무는 가지를 흔들어
마른눈을 뿌린다
외로운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정오에서 슬며시 비낀
시간인데도 앞이 캄캄했다
캄캄하면 됐다
그 먹먹함을 길동무 삼아
산을 내려왔다
창작과비평, 2003. 가을호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