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정진규 시모음 1

휘수 Hwisu 2007. 2. 26. 16:05

1939년 경기 안성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마른 수수깡의 平和(1965)
        有限의 빗장(1971)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1977) 
        매달려있음의 세상(1979) 비어있음의 충만을 위하여(1983)
        연필로 쓰기(1984) 뼈에 대하여(1986)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1990)

        도둑이 다녀가셨다(2000)

        몸詩(1994)

        본색(2004)
한국시인협회상

월탄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수상
시전문지 월간『現代詩學』주간


山菊

 

   아직 무게가 나간다 가쁜하게 일어서 떠난 당신들의 뒷모습이, 하얀 고무

신 뒷굼치가 한참 보인다 비탈길 오름 쪽으론 어머니의 진솔 버선목이 보인

다 혼자 남았다 아직 다 내놓지 못했다 다 물어내지 못했다 조금 더 있어보

자 여름이 한참 가고 있다 아직 몸이 비둔하구나 누더기가 되었다 누더기는

무게가 나간다 잘 재켜지지도 않는다 지난밤 나를 개키며 밖을 내어다본다

임박했는가 오늘은 하얀 산국이 피었다

 
껍질

 
 어머니로부터 빠듯이 세상에 밀려나온 나는 또 한번 나를 내 몸으로 세상 밖 저쪽으로 그렇게 밀어내고 싶다 그렇게 나가서 저 언덕을 아득히 걸어가는 키 큰 내 뒷모습을 보고 싶다 어머니가 그러셨듯 손 속에서 손을, 팔다리 속에서 팔다리를, 몸통 속에서 몸통을, 머리털 속에서는 머리털까지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빼곡하게 꺼내어서 그리로 보내고 싶다 온전한 껍질이고 싶다 준비 중이다 확인 중이다 나의 구멍은 어디인가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쉽지 않구나 어디인가 빠듯한 틈이여! 내 껍질이 이 다음 강원도 정선 어디쯤서 낡은 빨래로 비를 맞고 있는 것이 보인다 햇살 쨍쨍한 날 보송보송 잘 말라주기를 바란다 흔한 매미 껍질 같이는 싫다 그건 너무 낡은 슬픔이지 않느냐


솔방울

 

 아직도 이따금씩 마음 시리면 손 찔러 넣어 만지작 조물락거리고 있을까 합천 묘산면 나곡마을 오 백년 묵은 龜龍木 보러 갔다가 솔방울 하나 주워서 그의 겉옷 주머니에 얼른 넣어 주었는데, 그가 저도 손을 넣어 건네는 솔방울의 내 손을 마주 잡아 주었었는데 그걸로 보아서는 틀림이 없을 게다 오 백년의 소나무, 오백 년 되도록 솔방울을 매달고 있으니! 참 좋으시다 솔방울을 매달고 있다니!

 

불교문예(2006년 가을호)

 

미수(未遂) 

- 알6


 글씨를 모르는 대낮이 마당까지 기어나온 칡덩쿨과 칡순들과 한 그루 木百日紅의 붉은 꽃잎들과 그들의 혀들과 맨살로 몸 부비고 있다가 글씨를 아는 내가 모자까지 쓰고 거기에 이르자 화들짝 놀라 한줄금 소나기로 몸을 가리고 여름 숲 속으로 숨어들었다 매우 빨랐으나 뺑소니라는 말은 가당치 않았다 상스러웠다 그런 말엔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없었다

 

 틀킨 건 나였다 이르지 못했다 미수(未遂)에 그쳤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몸시12.

 

나 요즈음 너무 들통나 있다
점심때
오천원짜리 꼬리곰탕을
건강을 핑계로 그러는 것까지
인사동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닫아 건 겨울 창문 틈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다 내다보고들 있다
나 요즈음 너무 들통나 있다
꼬리곰탕 같은 거로나 들통나 있다
이를테면
화계사 절마당 기막히게 이쁜
산수유 한 그루
그런 것들과의 은밀한 관계 같은 거나
남몰래 하고 있는
기막히게 좋은 일 같은 게 그런 게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빗장 걸어 둔 조그만 광 같은 걸
하나 갖고 싶다
습기 차고 눅눅해도
나만의 곳간 같은 걸
하나 갖고 싶다
녹이 시퍼렇게 슨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정신의 칼!
그런 걸 하나 갖고 싶다
한 그루 나무
도저를 다 열어놓은 채 잠가둔
서랍이 하나씩은 꼭 있는 법이다
그런 곳간이 하나씩은 꼭 있는 법이다
저를 다 열어놓은 채 잠가둔!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
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
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
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
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
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염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2006년 미당 문학상 최종 후보작


나무의 키스 

 

   뿌리가 길어올려 가지 끝 우듬지까지 물길 내고 있다 하여도 뿌리는 제 입술을 줄창 땅 속 깊이 묻고만 있고 가지의 입술이 오직 하늘 속살을 제 맘대로 휘젓고 있다 나무의 사랑법을 나는 잘 모르겠다 뿌리는 사랑의 생산이고 가지 끝 우듬지는 사랑의 탕진인가 정처없다 어느 게 더 사랑의 혀를 제대로 내두르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게 진짜라고 또 우길 참인가 이 겨울날에도 맨몸으로 이파리 하나 없이 허공을 휘어잡고 있는 느티나무 잔가지들 그들의 사랑법을 따라가다가 나는 손이 시렸다 허공 휘어잡기 자꾸 놓쳤다 뿌리가 성치 않은 모양이었다 자꾸 공급이 끊겼다

 

현대시학 2006년 4월호


本色


  그는 굴비낚시라는 말을 쓸 줄 안다 그는 죽은 물고기
를 살려낸다 그것도 이미 소금으로 발효시킨 짜디짠 조
기 한 마리가 퍼들퍼들 낚싯줄에 매달린다 팽팽하다 그
는 질문을 아주 잘 하려는 궁리에 골몰한다 생각의 비늘
들을 번득인다 예정된 답변 말고 누구도 모르던 本色을
탄로시킬 줄 안다 이 봄날엔 나무들이 꽃으로 초록 嫩葉
들로 本色을 탄로시키고 있다 하느님의 질문엔 어쩔 수
없이 정답이 나온다

 
* 嫩葉(눈엽)의 '嫩'은 어릴 '눈'입니다

 

시집, 本色(천년의 시작, 2004)

 

옛날 국수 가게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
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
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
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시집, 本色(천년의 시작, 2004)

 

집을 비우며

 

 문은 늘 열어두기로 했으니 외출애서 돌아오시듯 그렇게 하시게

 읍내에 혼사가 있네 군불은 때야 할 터 마른 삭정이들은 헛간 가득

쌓아 두었네 차도 끓여 드시고(커피는 바닥이 났네) 음악도 들으시게

심심하면 뜨락 마른 꽃대 사이 느리게느리게 건느고 있는 겨울 햇살

들의 여린 발목이라도 따라가 보시게나 늘 발이 시리다는 핑계로 다

가지 못한 길들을 우리는 너무 오래 던져두지 않았었나 그래도 무료해

지시거들랑 어젯밤, 이슥토록 내린 뒤뜰의 눈을 쓸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두었으니 거기 발자국 낙관이라도 찍어 보시게 새 한 마리 내려와 갸웃

거릴 것이네 그간 내가 아껴놓은 그것을 이미 그도 알고 있었기에 범접을

못하다가 그대 낙관 곁에 이때다 싶어 맨발을 재재바르게 내려 놓을 것이네

이내 가지에 올라 갸웃거릴 것이네 이제 그만 우리들의 방황을 접을 때라고

말하고 싶네 떠날려면 자네도 몇 자 적으시게 해질 무렵 산길을 지우며

올라오는 나를 창 밖으로 내려다 볼 수 있다면 더욱 고맙고

 

시집, 本色 (2004년 천년의 시작)

 

봄비

 

  미리 젖어 있는 몸들을 아니? 네가 이윽고 적시기 시작하면 한 번 더 젖는 몸들을 아니? 마지막 물기까지 뽑아 올려 마중하는 것들 용쓰는 것 아니? 비 내리기 직전 가문 날 나뭇가지들 끝엔 물방울들이 맺혀있다 지리산 고로쇠나무들이 그걸 제일 잘 한다 미리 젖어 있어야 더 잘 젖을 수 있다 새들도 그걸 몸으로 알고 둥지에 스며들어 날개를 접는다 가지를 스치지 않는다 그 참에 알을 품는다

  봄비 내린다
  저도 젖은 제 몸을 한 번 더 적신다

 

시집,本色, 2004년  천년의 시작

 

편지

 

늘 위독(危篤)했다. 위독이 위독을 지우면서 여기까지 왔다.

 

 새가 계속 울게되는 것도 소리가 소리를 일으켜 세우기 때문이다

파도가 계속 치는 것도 파도가 파도의 윗등을 연이어 때리기 때문

이다 지우기의 연속 무늬다 위독의 연속 무늬다

 

 오늘은 민박집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다 파도소리 들리니? 착착 접히는

파도소리라는 말은 처음이지? 접어서 착착 밤새 쌓아올리는 파도소리

듣고 있다 높이가 없다 지워짐의 높이 위독의 높이

 

여기까지만 해도 나로선 길고 긴 一字上書다

 

시집, 本色 (2004년 천년의 시작)

 

마지막 가을

여름을 여름답게 들끓게 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가을이 왔다 모든 귀뚜라미들의 기인 더듬이가 밤새도록 짚은 울음으로도 울음으로도 가 닿지 못한 어디가 따로이 있다는 게냐 사랑으로 멍든 자죽도 없이 맞이하는 가을의 맨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른 새벽길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바닷가 민박집 여자의 아침상도 오늘로 접어야 하리 늘 비가 내렸다 햇살들의 손톱 사이에 낀 푸른 곰팡이들이 아직도 축축하다 부끄럽다 이 손으로 따뜻한 네 손을 잡겠다 할 수는 없구나 딸이 늦은 시집을 간다는 편지를 객지에서 받는다 노동의 지전을 센다 마지막 그물을 거두었다 이러는 게 아니지 너무 오래 혼자 있는 가을에 익숙해졌다 서둘어 돌아가야 하리 왜 이토록 서성거리는 게냐 슬픔이 떠난 자리는 늘 불안했다 낡은 입성으로 오는 마지막 가을

 

문학사상 2003년 가을호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어쩌랴, 하늘 가득 머리 풀어 울고 우는 빗줄기, 뜨락에 와 가득히 당도하는 저녁나절의 저 음험한 비애(悲哀)의 어깨들 오, 어쩌랴, 나 차가운 한잔의 술로 더불어 혼자일 따름이로다 뜨락엔 작은 나무 의자(椅子) 하나, 깊이 젖고 있을 따름이로다 전 재산(全財産)이로다

 

어쩌랴, 그대도 들으시는가 귀 기울이면 내 유년(幼年)의 캄캄한 늪에서 한 마리의 이무기는 살아남아 울도다 오, 어쩌랴,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때가 아니로다, 온 국토(國土)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이 보일 따름이로다

 

어쩌랴, 나는 없어라 그리운 물, 설설설 끓이고 싶은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 우리네 아궁이에 지피어지던 어머니의 불, 그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 어쩌랴, 또다시 나 차가운 한잔의 술로 더불어 오직 혼자일 따름이로다 전 재산(全財産)이로다, 비인 집이로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하늘 가득 머리 풀어 빗줄기만 울고 울도다


<해설> 최동호(고려대 교수)

 

정진규의 시집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는 그의 60년대를 지배하던 방황을 모태로 하고 있다. 그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던 방황의 방향성은 점점 더 그를 일방적인 한 곳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마침내 가족으로부터도 추방당한 극단에서 그의 절창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가 쓰여진다.

추방 당한 자의 비애감이 이 시의 격정적 어조를 드높이고 있다. 빈 들판에서 오로지 혼자 차가운 술을 마시는 고립되고 소외된 자, 그리하여 마침내 버려진 자의 격앙된 비애는 `때가 아니로다'와 같은 탄식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게 만든다. 때를 만나지 못한 이무기가 과연 자기 자신인가. 왜 그 이무기는 때를 만나지 못하고 온 국토의 벌판을 기어가는가. 그는 한 가마솥의 물을 덮이던 어머니의 불을 왜 그리워하는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자의 파멸감이 이 시의 비애감에 깊게 배어 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를 떠올리며 '때가 아니로다'를 외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어머니의 불로 지피어진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로 삶의 모든 허물을 씻어버리고 새로이 태어나고자 하지만, 음산한 하늘, 뜨락에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홀로 있게 만드는 그의 처절한 자의식은 아마도 그에게는 이무기처럼 운명적인 것일는지도 모른다.

고립된 자의 고독하고 쓸쓸한 내면은 `들판의 비인 집', 뜨락의 `작은 나무 의자 하나', `온 국토의 벌판을 기일게 기일게 혼자서 건너가는 비에 젖은 소리의 뒷등' 등의 서글픈 이미지를 통해 잘 형상화된다. 비어 있고, 버려졌으며, 조그맣고 혼자인 존재, 더구나 그 뒷모습은 뼈저린 고통을 겪은 자의 것일 터이며, 그가 있는 곳은 춥고 황량한 장소임이 분명하다. 비 내리는 들판의 비인 집에서 차가운 한잔의 술로 혼자인 자신을 위로하는 그에겐 지금 한줌의 따뜻함이 얼마나 간절히 그리울 것인가.

 

그는 행복했던 유년 시절의 추억을 더듬는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따뜻한 기억을 품고 있는 아늑한 시간일 것이다. 잃어버린 꿈인 듯 시인의 유년에는 한 마리의 이무기가 살아남아 울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한 가마솥의 뜨거운 물과 아궁이에 지펴지던 어머니의 불이 있다. 뜨거운 물과 불이 있는 유년은 비와 차가운 술밖에 없는 현재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춥고 하강적인 현실에서 시인은 뜨겁게 불타 오르던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때 어머니가 지피던 불을 다시 타오르게 할 수가 없다. 지금은 `잘 마른 삭정이들, 불의 살점들 하나도 없이' 오직 혼자일 뿐이며, 한잔의 술만이 전 재산이기 때문이다.

 

'로다(도다)'의 단정적이고 고압적인 어투는 이 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절망적인 현실을 더욱 벗어날 수 없는 속박으로 느끼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