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근 시모음
1958 경남 양산 출생
경남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4 <실천문학>에 시 <야학일기> 발표
1984 <월간문학>에 시조 <비
오는 날의 변주> 발표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2000
한국시조작품상 수상
2001 7차 교육과정에 따라 중학교 국어교과서에 시 수록
2004 현재
<시힘> 동인, 문화공간 <다운재>운영
시집 <바다가 보이는 교실> 1987
창작과비평사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1991 빛남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경주남산>
<바다가 보이는 교실> <첫사랑을 덮다> <가족>외 다수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第 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適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이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第 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주더니 이제 그중 큰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선재(四宣齋)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며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단청, 차갑고 혹은 뜨거운
얼음 안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 있구나
그 불 안에 차갑게 어는 얼음이 있구나
단청의 화엄 장엄한 길을 따라가다
한겨울
영하의 시퍼런 저녁을 걸치고 있는
서까래 연화문(紋) 사이에 숨은 웅화(雄花)*를 바라보노라면
어두워질수록 온갖 머리초들이 겨울꽃을
피워내
팔작 지붕의 적멸보궁이 활활활 불타오르네
영축산 땅 속 깊은 곳으로 흐르는 수맥마저 얼어붙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권하는
한 잔의 물도
차가운 표정으로 결빙되는 산사의 겨울
자신의 법과 말씀을 침묵의 빙점 아래 묻고
겨울짐승 겨울나무처럼 깊이 잠들은
줄 알았는데
웅화 한 잎이 피어나며 거침없이 불타오르는 세상
살과 뼈를 태우는 불 속에서 붉고 푸른 혀들이 깨어나
혹한의
저녁부터 풀림의 따뜻한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지 말아라 잠들지 말아라 겨울잠의 이마를 치니
내 안에 얼어버린 나를 태우는 사랑의 붉은
불을 보네
그 불 안에서 얼음장 같은 지혜의 푸른 눈빛을 보네
냄비밥을 하면서
냄비밥을 해 먹어 본 사람은 안다
쌀을 물에 즐겁게 불리는 일부터
냄비에서 밥물이 끓는 절정의 찰나를
긴장 놓치지 않고
기다릴 때까지
이건 물과 불과 시간을 아는 일이며
이건 마음을 아는 일이라는 것을
센 불로 끓이고 중불로 익히고 약한 불로 뜸 들이며
냄비 속의 물이 넘쳐 불을 다치지 않게
불 위의 냄비가 뜨거워져 쌀을 다치지
않게
쌀과 불과 물이 평화롭게 하나 되어
사람이 먹는 한 그릇의 더운밥이 되는 일이란
이건 세상만사와의 집중이며
이건 우주와의 화해다, 라고
그래서 원터치 전기밥솥의 디지털 밥을 먹는 사람은
이 고슬고슬한 아날로그 밥맛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냄비밥 뜸 들기를 기다리며
나는 행복해진다
목수의 손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 목수를 불렀다. 나이가 많은 목수였다. 일이 굼떴다.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데
그는 손으로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못 하나를 박았다. 늙은 목수는 자신의 온기가 나무에게 따뜻하게 전해진 다음 그
자리에 차가운 쇠못을 박았다. 그 때 목수의 손이 경전처럼 읽혔다. 아하, 그래서 木手구나. 생각해보니 나사렛의 그 사내도 목수였다. 나무는
가장 편안한 소리로 제 몸에 긴 쇠못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니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륵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있도록 불러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