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영 시모음
1960년 전북 임실 출생
숭실대 국문과 졸업
1989년 「민중시」5집으로 작품활동 시작
1998년 시집「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문학동네
2005년 시집「집이 떠나갔다」창비
생강나무
마흔여섯 해 걸어다닌 나보다
한곳에 서 있는 저 여린 생강나무가
훨씬 더 많은 지구의 기억을
시간의 그늘 곳곳에 켜켜이 새겨둔다.
홀연 어느날 내 길 끊기듯
땅 위를 걸어다니는 것들 모든 자취 사라져도
생강나무는 노란 털눈 뜨고
여전히 느린 시간 걷고 있을 것이다.
지구의 여행자는 내가 아니라,
생강나무임을 아프게 깨닫는 순간에
내 그림자도 키 늘여 슬그머니
생강나무의 시간 속으로 접어든다
마음 속 복성루
내 마음 속 음식점은 늘,
복성루라는 중국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인자한 얼굴로 면발을 뽑던 그 아저씨 보이지 않고
파리한 처녀애가 나와 주문을 받는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장면을 말하지만
말은 곧 우물쭈물 사라져버리고
내 손가락은 메뉴판의 치즈 버거를 가리킨다.
천육백 원 짜리 치즈 버거에는
야채가 하나도 안 들어가요,
이천 원 짜리 야채 버거를 사세요,
맛도 좋구요, 건강식이에요.
처녀애는 기계음으로 내게 권하고
나는 먹고 싶지도 않던 야채 버거를
순순히 두 개나 사 든다.
내 마음 속 복성루는 어디로 갔을까.
종적 묘연한 다향(茶香) 위로 흰눈 내려 쌓인다.
감자분
감자도 고구마처럼 줄기를 내릴까 싶어
페트병 잘라 물 붓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싹눈이 나와 자리잡는가 했더니
웬걸 제 몸뚱이만 둘러쌀 뿐,
종내 줄기 뻗지 않았다.
내 종자가 속에서 울어요, 땅에 묻어줘요.
지나칠 때마다 신경 가닥 건드렸지만
살고 싶음 지가 줄기 뻗어야지
고집 피우며 듣는 둥 마는 둥했다.
감자도 더 이상 아무런 전언 보내지 않았다.
그러구러 잊고 지난 어느날이었다.
이상한 냄새가 나 둘러보니
감자가 제 가슴살을 헐어내고 있었다.
제 슬픔 썩여서 손톱만한 감자 알갱이
여기저기 삐죽삐죽 밀어올리고 있었다.
나는 숙연한 마음으로 그 감자 거두어
화분 하나 비우고 경건하게 모셨다.
감자 분(墳) 만들어 드렸다.
얼마 후 감자 분 열고
새끼감자 몇 알 빙긋이 굴러나왔다.
시간의 그늘
새 아파트 건넌방 문을 열던 딸내미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된 폐허가 거기에 들어앉아 있었다. 난 금방 알아보았다. 곧 무너지려 하는 고향 집 사랑방이 옮겨와 있었다. 관솔불에 그을린 천장 모서리에서 말라죽은 거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길만 닿아도 부스러지는 흙벽의 노쇠한 글자들은 스스로 삭아가는 중이었다. 나 한 몸 누우면 꽉 들어차는 방에서 머슴 동식이 아재랑 조무래기들 일곱이서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독한 꽁초 담배를 애들에게 물려주며 동식이 아재는 이똥 가득한 눈으로 킬킬거렸다. 동무들은 목침에 만든 연기 달걀로 후라이를 해먹었다. 나도 따라 목침 달걀 후라이를 후르륵 빨아먹었다. 내가 먹은 후라이에서는 몽환의 매캐한 담뱃내가 콜록콜록, 새어나왔다. 거실까지 담배 연기 자욱해지자 딸내미는 건넌방 문을 쓱쓱 지워버렸다. 사라진 건넌방에서 동식이 아재와 동무들은 죽었을까, 살았을까.
거울
간짓대에 얹힌 눈이
차분한 햇살을 못 견디고
사르락 떨어진다.
적요의 팽팽한 떨림 속으로
댓잎 하나가 사부작이 날아든다.
열다섯 되는 새해 아침,
이 닦다 말고
오금이 저릴 때까지 쭈글치고 앉아
먼 미래를 건너다본다.
참 많이도 쇠락하였다.
“이 닦다 말고 뭐 해요? 새해 아침에?”
아내의 핀잔에 깜짝 깬
눈 들어 거울 들여다본다.
웬 낯선 이가 치약
허옇게 묻힌 몰골로
저 먼 과거를 내다보며
망연히 서 있다.
부푼 솜털 시리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