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시모음 4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세계사, 1996)
<흰 책>(민음사, 2000)
<삼천갑자 복사빛>(민음사, 2005)
현재 명지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
밀물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허공의 나무
- 박수근 풍(風)으로
그 나무에 꽃 없다
피우지 못하고 꺾어버렸다
가슴에 더 할 말 없다고
사랑에게 뻗어가는 어깨 잘라버렸다
마음 다 펼칠 수 없다고
사랑에게 달려가는 발 묻어버렸다
문자 밖에서야 쓰여지게 될 것이라고
터져 나오는 꽃들 삼켜버렸다
그 나무에 숨 없다
뿌리처럼 비틀린
빈 목숨만이 붙어
옆얼굴이 울고 있다
얼굴을 파묻다
흐르는 것들에서는 묵은 쌀겨 냄새가 난다
갓 담근 술항아리에서 포도알을 훔쳐 먹고
얼굴을 파묻던 한마당의 쌀더미는 따뜻했다
누렇게 좀먹던 스무 살 페루의 하늘도
쏟아질 듯 무겁기만 하던 원산도 별밭도
비어 있던 대성리 철둑길도 그늘 무성해
소나기 퍼붓고 세상은 선뜻 변했다
쌀벌레들은 다시 쌀더미에 향기로운 집을 짓고
푸른 들판에 누워 한 백년쯤 자고 싶어,
지친 男子는 잎도 지기 전 창백한 女子를 떠났고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서늘한 질투도
이만큼 지나쳐서야 눈치채는 것인데
이 늦은 저녁 쌀을 씻으며
치댈수록 부예지는 쌀뜨물에 얼굴을 묻고
다행이다, 쌀벌레 껍질처럼
어제가 낙낙히 뜰 수 있다는 것은
부박했던 노래가 떠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은
촤르르 촤르르 말갛게 씻겨진 마음이
잘 익은 밥 냄새를 피워올릴 수 있다는 것은
물을 뜨는 손
물만 보면
담가보다 어루만져 보다
기어이 두 손을 모아 뜨고 싶어지는 손
무엇엔가 홀려 있곤 하던 친구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북한산 계곡 물을 보며
사랑도 이런 거야, 한다
물이 손바닥에 잠시 모였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이 고였던 손바닥이 뜨거워진다
머물렀다
빠져나가는 순간 불붙는 것들의 힘
어떤 간절한 손바닥도
지나고 나면 다 새어 나가는 것이라고
무연히 떨고 있는 물비늘들
두 손 모아 떠본 적 언제였던가
공전
별들로 하여금 지구를 돌게 하는
지구로 하여금 태양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문득, 별을 떨어지게 하는
저 중력의 포만
팔다리를 몸에 묶어놓고
몸을 마음에 묶어놓고
나로 하여금 당신 곁을 돌게 하는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져
기어코, 나를 밀어내게 하는
저 사랑의 포만
허기가 궤도를 돌게 한다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