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전태련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0. 28. 12:29

경북 칠곡 출생

효성여대 국문과 졸업

2003년 <사람의문학>으로 등단

 

눈물 끝에 걸어 줄 무지개를 누가 보았는가

                                           
 어린 계집아이는 내내 울고 있다.

 

 여름 한낮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 마당 귀퉁이에 핀 붉은 칸나 꽃잎처럼 입을 벌리고 계집아이는 이유도 모를 울음에 잡혀 그 허망한 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아이의 벌린 입 속으로 종일 마당을 지키던 햇볕이 쑥 들어오고 들에 일 나간 적막한 마을이 들어앉는다

 

 마루 밑 자던 누렁이 놀라 쳐다보는 맑은 눈자위 한 점 구름 도는데 여린 쑥잎 같은 그 속내 알아챘는가 살아가는 일이란 일몰을 지고 돌아오는 늙은 아비의 지게 위에 얹힌 지푸라기, 그건 울음 속에 자꾸 허물어지는 기둥 하나 세우는 일이라는 것을

 

 햇살 자락자락 쌓이는 빈 집 자라지도 않는 아이는 여태 두 다리 뻗대며 앉아 울고 있다 그 울음 끝에 매달아 줄 무지개 찾지 못한 채 나는 매일 밤마다 꿈속에서 허둥지둥 다녀 올 뿐이다

 

유월 들판

                         
숲 향기 층층이 내려앉는 유월
사래질 쳐놓은 무논에
뻐꾸기 울음소리
농부보다 먼저  또박또박 모를 낸다
갯가 물푸레나무 낮게 쳐진 가지 걸치고
둥지 튼 붉은머리오목눈이 바쁘게 들락거린다
그 둥지엔 난데없는 뻐꾸기 새끼 한 마리
털도 없는 빨간 날갯죽지로
주인이 없는 틈을 타
그의 알들을 밖으로 밀어뜨리고 있다
누가 가르쳐 주었는가 뻐꾸기의 본능적 살의殺意
벌레를 물고 온 오목눈이의 머리가
통째로 들어갈 만큼
찢어지라 벌린 그의 입 속으로
먹이를 넣어 주는 천진한 새보다
뼈뼈에 새겨지고 세포마다 박힌
뻐꾸기의 생존 법칙이 더 슬픈 것을

 

남의 둥지 빌리듯 나도 어쩌면
너의 밥그릇 조금 훔치고
너의 목숨도 잠시 빌려 입는 것인지도
꿈틀거리는 아카시아 뿌리 아래
어린 모 밑둥치 살지는 소리
남의 손에 키운 새끼 부르는
어미 뻐꾸기 울음소리에 무논의 모 빛깔 짙어지고
둥지가 부서져라 자라는
남의 새끼 먹여 살리느라
오목눈이 눈이 한 뼘이나 들어가는
살아가는 일로 푸른 비린내 질펀한
들판,
뻐꾸기 소리 무심하다

 

기차가 지나가는 마을

 

기차가 지나간다
마을이 붕 하늘로 달려 올라간다
마을을 지키는 정자나무가
기차 소리에 휘청 몸을 기울이고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의 지붕이 들썩인다
혼자 익은 담장 밑 앵두가
화들짝 놀라 얼굴을 붉히고
텃밭의 열무와 상추 잎들이
새파랗게 기절한다

 

하루에 서너 번 지나는 기차는
열차의 칸 수만큼
얼굴을 디밀고 순식간에
세상에서 들은 얘기를 쏟아놓는다
너무 빨리 말해 잘 알아들을 수 없어도
심심한 마을은 접시꽃 한 사발 대접하며
숨찬 그의 말을 듣는다

 

기차가 지나는 마을엔
기차소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가 다 지나 갈 때까지
누구나 입을 다물고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도
일방적인 아내의 잔소리도
그의 발자국 소리를
이길 수 없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