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남 시모음 3
1965년 인천 덕적 출생.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등
1992년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9년 현대문학상 수상
한진여
나는 나에게가기를 원했으나 늘 나에게 가기 전에 먼저 등뒤 해가 졌으며
밀물이 왔다 나는 나에게로 가는 길을 알았으나 길은 물에 밀려가고 물
속으로 잠기고 안개가 거두어 갔다 때로 오랜 시간을 엮어 적막을 만들 때
저녁 연기가 내 허리를 묶어서 참나무 숲 속까지 데리고 갔으나 빈 그 겨울
저녁의 숲은 앙상한 바람들로 나를 윽박질러 터트려 버렸다 나는 나인 그곳
에 이르고 싶었으나 늘 물밑으로 난 길은 발에 닿지 않았으므로 이르지 못
했다 이후 바다의 침묵은 파고 3 내지 4미터의 은빛 이마가 서로 애증으로
부딪는 한진여의 포말 속에서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침묵은 늘 전위 속에만
있다는 것을
5월
아는가,
찬밥에 말아먹는 사랑을
치한처럼 봄은 오고
봄의 상처인 꽃과
꽃의 흉터로 남은 열매
앵두나무가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앵두꽃잎을 내밀듯
세월의 흉터인 우리들
요즘 근황은
사랑을 물말아먹고
헛간처럼 일어서
서툰 봄볕을 받는다
묵집에서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
꽃 피는 오이넝쿨만한 여항생에게 마음의 닷마지기 땅을 빼앗
기어 허둥거리며 다닌 적이 있었다.
어쩌다 말도 없이 그엘 만나면 내 안에 작대기로 버티어놓은
허공이 바르르르르 떨리곤 하였는데
서른 넘어 이곳 한적한, 한적한 곳에 와서 그래도는 차분해
진 시선을 한 올씩 가다듬고 있는데 눈길 곁으로 포르르르르
멧새가 날았다.
이마 위로,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는 나
뭇가지가,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여 끝내는 자기 속으로 불러
들여 속으로 흔들리는 저것이 그때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외따로 뻗어서 가늘디가늘은, 지금도 여전히 가늘게는 흔들
리어 가끔 만나지는 가슴 밝은 여자들에게는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저 저 저 저 심사가 여전히 내 마음은 아닐까.
아주 꺾어지진 않을 만큼만 바람아,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어디까지 가는 바람이냐.
영혼은 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가늘게 떨어서 바람아
어여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시집, 젖은 눈(솔)
가을
오래 살았다
城벽 담쟁이 넝쿨 色이 변했다
오랜 面壁으로 이제 色을 알았다는 걸까?
기사식당 골목을 올라오며
가난한 사람이 등꽃을 가꾸는 걸 보았다
그게 傳燈이리라
내 가꾸는 공작 단풍 사이로 오는
포레의 파반느
城이 내게 되비쳐주는 저녁 빛은
동향집에서는 저녁 빛이 되비쳐온다
성의 화강암들 저녁 빛 받아 던진다
저녁에 동쪽으로도 석양은 찬란하다
호랑이 가죽 같은 빛깔들 깔려온 마당가에
죽은 강아지를 묻는다
동향집에서는 저녁 빛이 가슴께에서 빛난다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05)
매화꽃을 기다리며
매화분 하나를 구해 창가에 두고는
꽃봉오리 올라오는 것 바라보니
피멍 든 듯 붉은 빛이 섞여서
겨우내 무슨 참을 일이 저렇듯 깊었을까 생각해본다
안에서는 피지 마 피지 마 잡아당기는 살림이 있을 듯해
무언가 타이르러 오는 꽃일지 몰라
무언가 타이르러 오는 꽃일지 몰라
생각해본다
집은 동향이라 아침 빛만 많고
바닥에 흘린 물이 얼어붙어 그림자 미끄럽다
後日, 꽃이 나와서, 그 빛깔은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인가
그 그림자 아래 나는 여럿이 되어 모여서
그 빛깔들을 손등이며 얼굴에까지 얹어보는 수고로움
향기롭겠다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 2005)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