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이진심 시모음

휘수 Hwisu 2006. 8. 15. 10:58

1966년 인천출생

1993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졸업

1992년 11회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타버린 집 >2002년 포엠토피아

<맛있는 시집> 2005년 시선사

 

이 한 권의

 

 

엉금엉금 기어서

일생동안 겨우 당도한 책상 위에

이 쓸모없는 손을 올려 놓는다

 

두 손의 겉장은

몇 개의 칼자국과 굳은살로 너덜너덜하게

닳아있다

 

살아생전의 일을 고하라고 한다면

이 손을 읽어달라고 간구하겠다

이 손위에 난 흔적들을 들여다보아

달라고

이것이 내 일생의 주행기록이라고

 

이미 괴로움이란 괴로움은 다 지워져버린

가여운 책을,

길들이란 길들은 다 흐려져 있는

삼중당문고 같은 손바닥을

책상 위에 고요히 올려놓겠다

 

찢어버린 페이지가  많았던

그 책에 엎드려 나는 잠들었다

 

어두운 강물에 누워 멀리멀리 떠내려가는

꿈을 꾸었다

밑줄 그었던 구절마다 커다란 웅덩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악기 다루는 아름다운 책을 원했으나

도구와 무기를 다루는 목록뿐이었다

도구를 다룰 때마다

무기를 휘둘러 조금씩 전진해 나갈 때마다

이 가벼운 삶을 악기처럼

이 무거운 일상을 악기처럼

이 느린 괴로움을 내가 가진 악기처럼 연주하였다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책을

두 손을 나는 갖게 되었다

아무 것도 쓰여져 있지 않은 책

너무 가여웠으나

너무 무거워 아무도 훔쳐 갈 수 없었던 .

닳고 닳아 누구라도 건드리면 푹 먼지를

날리며

저 혼자 무너져버릴 가엾은 책

 

나는 책에게 조금씩 먹혀 들어갔다

여백마다 적혀진 굵은 글씨를 보면 알수 있다

어떻게 책의 입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갔는지를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웅덩이

 

사나흘 비 내린다.

하수구는 한꺼번에 몰려든 물을 단숨에

들이키지 못한다.

 


웅덩이들,

물을 머금고 있다가

가만히 눈 감고 있다가

신발이 들어오면 덜컥 물어버린다.

아이들이 한 발짝 들어오면

하얀 스타킹에 덥석

물의 검은 발가락들이 거미처럼 들러붙는다.

 


서서히 말라붙어 가다가

표면에 맨 나중 밟은 자의 발자국이

범죄현장처럼 보존된다.

 


거의 말라붙으면

틀니가 빠진 늙은이의 입처럼 쪼그라든다.

잔주름이 조금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 웅덩이는 없다.

 


웅덩이는 물이 고여 있을 때만

제 이름을 가진다.

 

물이 없으면 웅덩이는 다만 식물처럼 조용하다.

                                                                        
 나는 게으른 비단구렁이


나는 가만히 엎드려 기다렸을 뿐이다

 

비단을 두른 내 몸,
무늬들은 미끄러지지 않고 엷어지지도 않는다
단청 같은 옷을 끌고
검은 흙바닥을 미끄러져 다닐 때마다
나는 내 몸이 너무 두려웠다.
화려한 이 옷은 결코 보호색이 될 수 없었으니
마음의 주머니 오랫동안 헐렁해져 왔다
나는 아직도 새로운 옷을
몸을 꿈꾸고 있다
그것은 바로 추억의 힘, 추억의 보호색.

 

이 평화스런 흙과 풀 아래
수많은 개미떼들이 길을 따라 가며 길을 만들고 있다
그 길 위에서 껍질을 벗고 다시 껍질을
죽음을 벗고 다른 죽음을 갈아입는다

 

무시무시한 것은 끝까지 버텨야 할 것이
없을 때도
끝장 낼 수 없다는,
끝장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生이 질리지 않는다
천천히 누추해져 갈 뿐이다

 

솔기도 없는 옷을
찢어낸 구석도 없이 벗어내기에는 수천 년도 짧다
수천 년을 게으르기란 쉽지가 않다         

 

명태 코다리

 

노끈에 주둥이를 묶인 채

나무 좌판에 끌려나와 누워있다

몸 움직이는 것도 귀찮은지

입만 크게 벌린 명태,

햇빛이

냉동 된 몸에서 흐르는 물기를 수금해간다

 

저녁, 녹았던 몸은 다시 얼어붙는다

녹았다가 얼어붙자 명태들의 몸이 왜소해진다

행주치마에 두 손 집어넣고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오늘 찍을 일수 돈을 센다

 

오늘 우리 무사한 거 맞냐

응, 조금만 마르면 돼

그러면 형편없어 지거든

 

딱딱한 입을 다물 수 없어 명태들 노래 부른다

그만 닥치라고

바람이 뺨을 갈겨도

명태 입 속에 가득 차 오르는 얼음 덩어리들

일수를 채우려면

할머니. 오늘 저녁도 아주 길게 살아야 한다

어둠은 검은 털장화처럼 할머니 발목까지 올라와 있다

 

할머니를 묶고 있는 노끈에

세 명의 입이 더 꿰어져 있다
 

집오리 

 

천둥 번개 칠 때마다

건초더미에 목을 묻고 내려다본다

저 넓은 들판을,

 

내 주위에 조용하게 엎드려 있던 것들

아아, 내 속에 들어오려 하던 것들,

내가 삼킬 수 없어 입다물고 있었던 것들,

평생토록 잠잠 했었던 그것들이

창틀을 붙들고 고통스러워 펄럭거린다

 

마음만 먹으면 저 하늘을 천천히 헤엄쳐 오를 수도

있다

날개에 힘을 주고 공기를 잡아 당기듯 힘껏

발을 박차고

이 먹이통을 버리고 날아가야 한다

 

또 다시 지루한 생,

나는 모이통에 머리를 박는다

이 두려움을 잊지않으리라

날아갈 수 있는데도 날아가지 않은 집오리가 있다

 

왜 남았는지에 대해 평생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

그의 몫이다

집오리는 그렇게 자신에게 집중한다

몸은 이 안에 그의 영혼은 이미 저 바깥에 놓여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