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숙 시모음
이지숙 시인
경기도 안성 출신
1989년 7월 현대문학에 사월의 아침, 귀신나무 등으로 등단
시집, <시간의 풀밭>
물고기들이 도시
눈물어린 눈으로 세상을 보면
도시는 깊은 물 속, 거대한 그물 속
한 떼의 물고기들이 몰려가고 몰려오고
끝없이 밀려오는 차가운 물살 속을
속살 가시까지 떨며 흘러간다
물속에서도 늘 목마른 무리
물고기들은 잠들 수 없는 서러운 눈과
손잡을 수 없는 외로움으로
소리 없는 호흡만 되풀이 한다
한껏 부레를 부풀려 떠올라 봐도
흐린 별빛 아래 온기 없는 네온불빛이
차가운 지느러미를 흔들 뿐
물 속에 잠겨서는 알 수가 없다
어디쯤 흘러왔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귀신나무
네게 남은 것
모조리 내어줄 테니
내 무덤 위에 나무 한 그루 심어줘
난 나무가 되고 싶어
곧은 뿌리 심장에 박고
흩어지려는 뼛조각을
잔뿌리로 껴안을 거야
난 꽃 피고 싶어
지나가는 바람에 웃음을 터뜨리며
탐스런 열매를 키우고 싶어
터질 듯 붉고 향기로운 열매
가을이 와도
난 외롭지 않을 거야
겨울 뒤에 오고 있는 봄을 아니까
슬프도록 찬란한 단풍옷을 차려입고
두 팔을 벌려
찬바람도 따뜻이 껴안을 거야
눈이 오면 눈을 덮고 꿈을 꿀 거야
그렇게 세상에 남아 있을 거야
지구가 사라질 때까지
난 나무가 되고 싶어
귀신나무.
죽음 뒤의 아침
마음속에서 잦아드는
촛불을 끄고
어둠 속으로 꼬르륵 가라앉으면
끝날까?
이 목마름
그 뒤에도 아침이 온다면
진저리 치며 울어대는
자명종의 목을 비틀려고
팔을 휘저어야 할
아침이 온다면
내가 가야 할 나라는 어디인가?
시간의 풀밭
풀 베는 남자를 보았네
무성한 풀밭 한가운데
익숙한 솜씨로
길을 내고 있었네
초록 초록 초록의 풀잎들이
낫날에 순순히 베어져 쌓여가고
풀더미 속엔
조촐한 꽃들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네
베어진 뒤에도 한동안
웃는 낯을 하고 있었네
엊그제 낫날이 지나간 것 같은 자리엔
새롭게 돋아 있는 풀들
더러는 꽃망울도 맺고 있었네
생각하면 우리도
시간의 풀밭에서 풀 베는 사람
들판을 지나, 언덕을 넘으며
시간을 베고 길을 내지만
시간은 우리가 지나간 뒤에도
자꾸 새롭게 돋아 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