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시모음
1968년 서울 출생
고려대 노문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2002년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민음사
2005년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로
제3회 문학수첩작가상을 수상
2006년 시집「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평론집「혁명과 모더니즘」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 이장욱의 현대시 읽기」
토요일의 관심사
오늘의 푸른 하늘은 마치 어제의 푸른 하늘 같애.
진부하고 아름다워.
뭐랄까,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 상태랄까.
1루로 뛸 수도 없고 뛰지 않을 수도 없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문장은 비문인가 아닌가?
나는 허무주의자,
오타쿠,
각종 폐인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오늘 화양리 뒷골목에서 박복순 씨(82)가 모은 폐지의 양은
15.5 kg, 근래 최고였지.
하지만 내 인생에 흥미로운 것이라곤 없다.
휴대폰을 껐는데도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지 않네.
침묵의 기술을 연마한 자만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다.
늦어도 정오까지는 일어나자.
어제의 푸른 하늘이 떠 있을 테니까.
박복순 씨의 리어카를 향해
늙은 개들이 짖어댈 테니까.
오늘은 또 모든 것이
토요일의 관심사.
계간 〈序詩〉2006 여름호 발표
괴물과 함께 톨게이트
괴물을 그리자 괴물의 꼬리는 낭창 휘어지다가 낭창 당신의 허리를 감고 괴물의 뾰족한 혓바닥은 유쾌해. 당신도 웃음을 터트리지.
차창 바깥으로 한강을 건너는 괴물을 그리자 역시 비는 내려. 괴물의 슬픈 눈가에 또 눈은 내려, 한 발자국을 내 딛으면 큰물이 지겠지만 한 발자국을 내딛으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네.
오늘도 괴물은 괴물, 마천루를 짓밟고 괴물은 괴물, 등이 부드러워. 낭창 휘어지다가 낭창 허물어지기가 십상 고개를 들어 무한한 아가리를 벌리자 세상의 음악들, 그의 입 속으로 사라지네.
괴물의 다리 사이에서 우산 쓴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핥아요. 괴물은 역시 괴물, 나와 함께 영원히 톨게이트를 지나네.
시집 <정오의 희망곡 > 2006년 문학과지성사
삼분 전의 잠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발 밑으로 흘러내리는 모래들 내 잠 속에 쌓이고 있었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잠을 추억하는 자
그때 그 오래된 불행은 우연한 것이었으나 아, 이런 바람은 괜찮은데, 모든 우연을 우리는 미리 알고 있었네 삼 년 전의 문 열리고 삼십 년 전의 바람, 그대 허허로운 등 흘러가네 눈 감으면 그때인 듯 메마른 눈발 날리고 모래처럼 우연한 노래들 내 잠 깊은 모래산, 모래산에 쌓이네
용서를 빌러 그곳에 갔네 그곳에 오래 앉아 있었으나 깔깔한 모래들 아직도 내 잠 속 떠나지 않네 삼 분 전의 잠에서 깨어 삼 일 전의 기슭을 배회하는 자 삼 일 전의 잠에서 깨어 삼 년 전의 목마름을 기억하는 자 그리고 모래산 죽은 그대의 모래산
시집 <내 잠속의 모래산 > 2002년 민음사
외로운 이빨이 빛나는 아침 풍경
새벽에 눈을 뜨면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느리게 건너오는 늙은 개의 이빨을 느낀다 나는 집을 나와 외곽의 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 여자의 눈빛이 안개 저 편에 깜빡이며 저물어간다
안개가 섬을 만든다 이것은 그리운 명제이다
한 여자의 발자국이 안개의 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으나, 나는 한 여자의 발자국만을 따
라 이곳에 왔던 것이다 나는 천천히 묽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넌다 도대체 무엇을 의심할 수
있단 말인가 파리바게뜨 안에서 낯선 사내가 흐느끼고 있다
그는 멸종을 앞둔 마다가스카르 거북의 사진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거북의 눈으로
안개가 내리는 녹천역을 바라본 적이 있다 고개를 든 사내의 얼굴에 번지는 것은, 이상하게
도 냉소적인 미소였던가 여전히 안개는 섬을 만든다 섬은 그러므로 존재한다
외로운 이빨은 그렇게 비치는 것이다 붉은 등의 횡단보도를 건너간 늙은 개가 안개 너머 먼
지평선 쪽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의 마른 뒷모습을 바라본다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
그 끝의 해안에서, 이제 마지막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가 있다 나는 어떤 질문도 하지
않는다 안개는 섬을 만든다
電線들
우리는 완고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는 서로 通한다
전봇대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배선공이
어디론가 신호를 보낸다
고도 팔천 미터의 기류에 매인 구름처럼
우리는 멍하니
上空을 치어다본다
너와 단절되고 싶어
네가 그리워
텃새 한 마리가 電線 위에 앉아
무언가 결정적으로 제 몸의 내부를 통과할 때까지
관망하고 있다
투우
우리 사이에 어떤 기미가 있었다.
우리 사이에 꽃이 피었다.
우리 사이에 물이 얼었다.
적어도 나는
명료하다.
나의 몸은 집중적으로
지속된다.
나는 끝내
외향적이다. 끊임없이
나의 유일한 외부,
당신을 향해
이송 중이다.
단 하나의 소실점이 확장될 때
내가 단 하나의 소실점에 갇힐 때
그것은 확률인가?
볼록 렌즈를 통과한 햇빛이
검은 점을 이루는 순간,
나의 첨단은 나를 떠나
드디어 당신을 통과하였다.
나의 질주는 뜨겁고
결국 완성될 것이다.
나는 타오르는 얼음과 같다.
수많은 발자국들이 허공을
질주 중이다.
시집 [정오의 희망곡]
객관적인 아침
객관적인 아침
나와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고
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
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
이제 막 종이 비행기 떠나가고 종이 비행기,
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
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
구름을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와
종이 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
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
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
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
겨우 제 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지나치게 사소한 딜레마
언제나처럼 해답은 지극히 간단한 데서 온다.
타조가 날지 못하는 이유는, 요컨대 몸이 너무 무겁다는 것. 열대의 황혼 쪽으로 한없이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타조.
딜레마는 이런 것이다.
15층 아파트 창틀에 끼어 가볍게 죽어 있는 잠자리. 텅 비어 마른 날개.
어느 오후 쓰레빠를 끌고 비디오 빌리러 동네 언덕을 내려갈 때마다,
그때마다 인수봉에 내리는 황혼 쪽으로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날아가는 것들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네. 나는 아무 때나 끔찍해진다. 퉁퉁 불어버린 生의
부기를 확인시키는, 저 거대한 거울.
나는 그 거울 속으로 아예 터벅터벅 들어와버린 타조처럼. 열쇠를 안에 두고
열리지 않는 문, 한량없이 두드리고 있네.
이 삶은 코믹한가, 트래직한가. 언제나처럼 해답은 지극히 간단한 데서 온다. 다만,
더듬이만으로 일생을 기어가는 벌레, 벌레의 없는 눈 위로 가득한, 가득한, 가득한, 노을.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 이야기
내 얼굴이 안경을 찾아 쓰고 천천히 단단해지는 아침, 창 밖 가로수의 애벌레는 마침내 나비가 된다. 내 발이 1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을 때, 멀리 인수봉 암벽에 가파른 바람 한 줄기 지나간다. 내 몸이 기어나가 어느 사립대학 담 아래를 걷고 있을 때, 아주 먼 항성에서 드디어, 천천히, 지상에 도착하는 빛.
그 순간에 나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가령 나는 바위 틈으로 화사하게 일렁이는 산철쭉. 절벽에 사선으로 그어진 그 가지 아래서 막 처음 편 제 날개에 놀란 호랑나비. 그러므로 나는 햇빛 속에 눈 감고 최초의 바람을 느끼는 자.
“지나치게 낙관적인 변신 이야기”라고 나는 중얼거린다. 외포의 갈매기들이 부리를 적시는 저녁에, 나는 더 이상 당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근해에 저물어가는 수평선. 까마득한 上空의 구름이 작은 빗방울로 변신하는 순간에, 나는 비상구 앞에 멈춰 움직이지 않는 구두.
내 몸은 불 꺼진 방에 안장된다. 지상의 빛이 녹아 사라진 시간, 내가 문득 눈을 뜨면 내 곁에 누군가 모로 누워 있다. 나는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깨운다. 이봐, 누군가 널 부르는군. 창 바깥 지나치게 낙관적인 하늘에 비는 내리는데.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