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근 시모음
1971 경북 의성
한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세일중학교 국어교사 재직중
2008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물의 승천
물을 화장火葬하면 승천하여 구름이 된다네
화염을 견디어 낸 물은 보글보글 기포를 만들다가
들쑥날쑥 몸을 뒤집다가 마술처럼 펑, 펑펑
수증기가 되어 날아간다네
꼬리를 흔들며 하늘로 올라가는
이무기를 본 적이 있다네
목욕탕 굴뚝을 빠져나오는 묵은 뱀의 꼬리를
숱한 사람들이 들어와 묵은 때를 밀고 가는 곳에서
이무기는 가장 순한 동물이 된다네
허물을 벗듯 벌거숭이가 된 사람들의
땀과 땀이 짠 옷을 마저 벗겨준다네
오래 전 나도 혀를 날름거리는 이무기에게
묵은 슬픔을 밀려본 적이 있다네
자기의 꿈을 표절한 용문신의 덩치들까지
아이처럼 구석구석 씻기는 것을 본 적이 있다네
물은 씻길 때가 가장 아픔답다네
가장 순한 일을 하고 이무기는 승천을 한다네
슬픔을 벗고 나오며 나는 보았네
여의주를 물고 있는 구름
온몸이 불덩어리인 용 한 마리
그런 용이 가끔 강림降臨도 한다네
지상에 물이 부족하면 제 살을 찢어
지상으로 내려와 다시 이무기로 산다네
하모니카를 불다가
도레미파 부는 정도지만
불면 불수록 까다로운 악기다
'도'를 불고 다음 음을 내려면
급하게 자리 옮기지 말고
같은 구멍에서 거꾸로 들이마셔야 한다
불고 마시며 건너는 징검다리
나는 지금 생의 어느 음에 와 있을까
임종 전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높은 '시'음을 내셨던 할머니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찰나에 내신 음은
끝이자 시작인 '도'였을 것이다
호상好喪이었다
언젠가 할머니 곁에서 잠든 날
거친 숨을 들이마시며
코 골아 내던 음은
낮에 밭을 갈다 후- 내뱉던 음과 같은 자리였다
어느 자리도 소홀히 건너뛴 적 없이
한 음 한 음 밟고 가신 길
관 속에 넣고 땅 속 깊이 묻어도
땅을 뚫고 나오는 푸른 가락
한 음도 놓칠 수 없다
꿘투
관장님께 권투는
권투가 아니라 꿘투다
20년 전과 바뀐 것 하나 없는 도장처럼
발음도 80년대 그대로다
가르침에도 변함이 없다
꿘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란다
관중의 함성을 한데 모으는 KO도
쨉 때문이란다
훅이나 어퍼컷을 맞고 쓰러진 것 같으나
그 전에 이미 무수한 쨉을 맞고
허물어진 상태다
쨉을 무시하고
큰 것 한 방만 노리면
큰 선수가 되지 못한다며
왼손을 쭉쭉 뻗어 보인다
월세 내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20년 넘게 아침마다 도장 문을 여는 것도
그가 생에 던지는 쨉이다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생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도장 벽을 삥 둘러싼 챔피언 사진들
그의 손을 거쳐 간 큰 선수들의 포즈도
하나같이 쨉 던지기에 좋은 자세다
등나무
곁가지가 없어
균형을 잡지 못하는 등나무는
결코 혼자서는 오르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몸이 기울면
왼쪽으로 끌어 당겨 줄
다른 등나무와 함께 오른다
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애로틱해
오르는 것보다 껴안는데 더 몰두하는 듯한 등나무는
그렇다고 둘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여럿이 한데 뭉쳐 시샘도 없이
굵으면 굵은 대로 가늘면 가는 대로
꼭 자기가 껴안아야할 자리를 찾아
휘 감아 하나가 된다
애시당초 오르는 것은 목적이 아니다
지붕 높이까지만 오르면 허리를 꺾어
살 속에 품어온 녹색 천을
쫙 하고 펼치는 나무
등나무 아래에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아
하늘을 향하던 고개 꺽어 자연히
둘러앉은 옆 사람을 보게 되는데
사람도 자꾸 보고 있으면
콱 껴안고 싶은 구석이 하나쯤은 있더라고
등나무 아래에서 얘기가 길어지는 것도
그늘 때문만은 아니다
단소소리
노인은 속이 비어 있는 나무를 찾았다
비어 있는 것도 막혀 있으면
채워진 것과 다를 바 없다며
위쪽 마디를 잘랐다
열린 곳을 통해 아침마다 이슬이 모이자
비우지 못하면서 담아 놓는 것도 채워진 것이라며
아래쪽 마디를 마저 잘랐다
위아래가 뚫혀 한 줌 바람도 담지 못하게 된 나무는
막힘없이 흘려보내는 일이
자신이 도달할 마지막 경지라 생각했지만
노인은 막힘없이 흘려보내는 일도
채워진 것과 다를 바 없다며
나무의 몸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어
흘려보내는 일에 장애를 만들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나무
노인은 관 같은 나무 끝에 입을 대고
손가락으로 상처를 짚으며
후후 제 몸에 들어찬 마지막 바람까지 내뱉었다
상처만큼 맑고 깊은 소리가 있을까
노인의 몸에 바람이 닿으면
소리의 옷을 입고 멀리 날아갔다
母子의 시간
아내의 가슴이 울고 있다
입고 있는 면티
젖꼭지 닿은 부분이
흥건히 젖은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는 아내
때 맞춰
젖먹이 아들이 잠에서 깬다
저 母子 사이를 흐르는 시간에는
때가 살아 있구나
비워야 할 때와 채워야 할 때
가슴이 부르고 배가 부르는 때
세상의 그 어떤 시계와도
사이클이 맞지 않는
그들만의 간격으로 흐르는 시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아내가
아들의 입에 젖을 물린다
쪽 쪽 쪽
태엽 감는 소리가 힘차다
파문
결혼을 코앞에 두고
여자는 한강에 투신했다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물은
여자를 결과로만 받아들였다
파문을 일으키며 열리고 닫히는 문
물은 떨어진 곳에 과녁을 만든다
어디에 떨어져도 적중이고 무엇이 떨어져도 적중이다
투신한 죽음도 다시 떠오른 삶도
물은 과녁을 만들어 적중을 알렸다
적중을 알리며 너는 왔다
온몸에 파문처럼 돋던 소름
빗나간 너의 말도 떨어지는 족족 적중했다
사랑처럼 민감한 것이 또 있으랴
이유 없이 떠나도 결과는 적중이었다
이유 없이 너는 가고
나는 안개 같은 거짓말로 너를
미워했다, 그리워했다, 지웠다, 썼다
사랑처럼 가벼운 것이 또 있으랴
구름이 되어 제멋대로 문장을 만들다
지치면 낱글자가 되어 떨어졌다
지금도 비가 온다 몸에 소름이 돋는다
네가 오고 있는 것이다
이 밤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랑이 투신할 것인가, 투신하는 족족
파문을 일으키며 적중할 것인가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