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이인철 시모음 1

휘수 Hwisu 2007. 7. 19. 10:04

전북 순창 출생
2003년 <심상>으로 등단
현재 <한라콘테이너> 대표이사

 

오리의 강

 

오리들이 흰 연적 같은 엉덩이 흔들며

줄지어 강으로 간다, 꽁지에 지푸라기 묻은 놈도 있다

똥을 지려 묻힌 놈도 있다 나는 오리들이 꽥꽥거릴 때마다

뒤에서 막대기 탁탁 두드리며 맨 끝에 따라 간다

 

강은 얼음을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다

얼음 위에서는 오리들의 물갈퀴가 헤집을 세상은 없다

나는 강 모퉁이에 오리들의 어장을 만들어 주려고

해머를 들어올려 얼음을 내리친다, 언 강을 때린다

쩡쩡 비명을 지르며 실금들이 그물처럼 나를 가두려고 한다

 

잠깐 비켜섰던 오리들이 저희끼리 주둥이를 부비더니

찰랑거리는 물 위에 몸을 띄운다, 웅덩이가 오리들을 껴안는다

웅덩이 가장자리에 웃자란 돌미나리가

얼음 위로 작고 푸른 손톱을 내밀고 있다

 

오리들이 돌미나리를 쿡쿡 쪼아대자

강은 멍이 든다, 그렇다고 강은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해질녘 오리가 한 줄로 꽥꽥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흉터처럼 움푹한 웅덩이에는

서서히 살얼음이 깔릴 것이다

겨우내 언 강이 강물을 보듬고 살듯

저녁이 그 살얼음을 가만히 덮을 것이다

 


눈 내리는 세상은 하얀 섬
길모퉁이에 핀
주황색 나리꽃 속
나는 그 포장마차에서 하얀 국수를 먹습니다

 

국숫발을 들어올릴 때마다
뒤엉킨 실타래를 쓱쓱 자릅니다
밤새워 평생 육 남매의 실타래를 풀던 어머니는
줄 끊긴 연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고

 

나는 뒤엉킨 실타래를 쓱쓱 자릅니다

  

조각달을 보면 홍두깨로 밀고 싶다

 

해가 진 여름저녁

어머니는 흰 살 한 점 떼어 홍두깨로 늘린다

반상 위에 가난이 점점 넓어진다

가난도 곽 차면 달이 된다

얇아진 반죽 아래에 반상의 굳은 피가 보인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만든 둥근 달을 접어

칼로 잘근잘근 썰어 나간다

하얗게 쏟아지는 국숫발들

 

어머니는 그 국숫발들을 가마솥에 끓여

식구들에게 한 그릇씩 퍼준다

우리는 마당 평상에 앉아 국수를 먹으며

가난한 배를 불렸다

 

조각달이 뜨면 가끔은 홍두깨를 들고 나가

달을 둥글게 늘리고 싶다

 

들깻잎 3장

 

가난한 재수생이

미용학원 다니는 사촌 진숙이와 화순이가 사는 자취방에

쌀 한말 메고 들어가 한 식구가 되었다

 

효자동 자췻집 길 건너 공터엔 키 큰 들깻잎들이

손바닥을 활짝 펴고

밤이면 우리 셋은 큰 손바닥 뒤에 숨은

작은 잎들을 따서 맨 간장에 졸였다

흰 살꽃송이 틈에서 나는 아찔하게 잠이 들고

꽃봉오리들은 꼴깍꼴깍 마른침을 삼키며

밤새 봉오리를 키워갔다

 

맨 밥 세 그릇

들깻잎 간장조림 하나

숨이 채 죽지않아 고개를 들고 일어나는 깻잎

점심도, 저녁도.

그 여름 푸른 색의 얼굴로

푸른 똥을 싸며

우리는 푸른 목숨으로 살았다

 

화한 들깻잎 3장

 

유리꽃


앞차에서 튀긴 작은 돌멩이가 앞 유리창에 부딪힌다
작은 봉오리가 맺혔다
달리는 꽃이 핀다
작은 균열들이 방사형으로 꽃잎을 키운다
그 위에 테이프를 붙이며 따라가다 보면
차 안에도 꽃이 환하다

 

햇볕에 꽃의 그림자가 내 속으로 투영된다
꽃잎에 붙어있는 흰 반창고

 

정비공장 마당
해머소리
꽃들이 상처를 중심으로 되돌아 달린다
우수수 유리꽃잎들
정비공장 앞마당에서 바스러지고 있다

 

나무는 레코드판을 돌리고 있다

 

인사동 화랑 벽에 걸린 그 판화 속
나는 목향木香 내음 따라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가네
나무가 보듬고 있는
동심원의 울림 위에서
나는 레코드판의 바늘, 그의 노래를 거꾸로 읽어가고
옹이에 음이 튀는 곳에서 발을 바꿔 왈츠리듬에
춤을 추며 가네
막다른 길목 탯줄같이 둥근 갈색파이프
흐르던 노랫말이 거기 굳어져 있네
아! 배꼽이다
전생에서 이생으로 쫓겨날 때 떨어진 배꼽
그래서 나무들이 걸어다니지 않고 붙박이별처럼 살았구나
그의 배꼽이 더 단단해지고 있네
레코드판이 지지직 지지직
한결 굳은 배꼽 위에서 전축바늘을 따라 돌고 있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