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이원 시모음

휘수 Hwisu 2006. 8. 12. 10:44

1968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서울예전 문예창작학과 졸.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졸업
1992년 세계문학 가을호에 <시간과 비닐 봉지>외 3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2001년 문학과지성사

 

접시 안의 달걀

 

둥근 접시 안에 둥근 달걀 세 개가 담겨 있다
서로 닿으면서 불시착한 소행성처럼 머뭇거린다
흰 껍질에는 평화와 우울이 오래된 비닐처럼 붙어 있다
달걀과 달걀의 벌어진 사이를 비집고 공기들이 블록처럼 쌓인다
관절이 없는 것들에게서 비린내가 난다
뜨겁고 동그랗게 갇힌 비명

 

오토바이


왕복 4차선 도로를 쭉 끌고
은색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오토바이의 바퀴가 닿은 길이 팽창한다
길을 삼킨 허공이 꿈틀거린다
오토바이는 새처럼 끊긴 길을 좋아하고
4차선 도로는 허공에서도 노란 중앙선을 꽉 붙들고 있다

오토바이에 끌려가는 도로의 끝으로 아파트가 줄줄이 따라온다
뽑혀져나온 아파트의 뿌리는 너덜너덜한 녹슨 철근이다
썩을 줄 모르는 길과 뿌리에서도 잘 삭은 흙 냄새가 나고
사방에서 몰려든 햇빛들은 물을 파먹는다
오토바이는 새처럼 뿌리의 벼랑인 허공을 좋아하고
아파트 창들은 허공에서도 벽에 간 금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다

도로의 끝을 막고 있던 아파트가 딸려가자
모래들이 울부짖으며 몰려온다 낙타들이 발을 벗어들고 달려온다
그러나 낙타들은 우는 모래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모래들은 울부짖으면서도 아파트 그림자에 자석처럼 철컥철컥 붙어간다
모래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여서
오토바이는 허공에 제 전 생애를 성냥처럼 죽 그으며 질주한다
아파트는 허공에서도 제 그림자를 다시 꾸역꾸역 삼키고 있다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잉크 냄새가 밴 조간신문을 펼치는 대신 새벽에
무향의 인터넷을 가볍게 따닥 클릭한다
신문 지면을 인쇄한 모습 그대로
보여주는 PDF 서비스를 클릭한다
코스닥 이젠 날개가 없다
단기 외채 총 500억 달러
클릭을 할 때마다 신문이 한 면씩 넘어간다
나는 세계를 연속 클릭한다
클릭 한 번에 한 세계가 무너지고
한 세계가 일어선다
해가 떠오른다 해에도 칩이 내장되어 있다
미세 전극이 흐르는 유리관을 팔의 신경 조직에 이식
몸에서 나오는 무선 신호를 컴퓨터가 받는다는
12면 기사를 들여다보다
인류 최초의 로봇 인간을 꿈꾼다는 케빈 워윅의
웹 사이트를 클릭한다 나는 28412번째 방문객이다
나도 삽입하고 싶은 유전자가 있다
마우스를 둥글게 감싼 오른손의 검지로 메일을
클릭한다 지난밤에도 메일은 도착해 있다
캐나다 토론토의 k가 보낸 첨부 파일을 클릭한다
붉은 장미들이 이슬을 꽃잎에 대롱대롱 매달고
흰 울타리 안에서 피어난다
k가 보낸 꽃은 시들지 않았다
곧바로 나는 인터넷 무료 전화 dialpad를 클릭한다
k의 전화번호를 클릭한다
나는 6589 마일리지 너머로 연결되고 있다
나도 누가 세팅해놓은 프로그램인지 모른다
오른손으로 미끄러운 마우스를 감싸쥐고 나는
문학을 클릭한다 잡지를 클릭한다
문학 웹진 노블 4월호를 클릭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표지의 어린 왕자는
자꾸자꾸 풍경을 바꾼다 창을 조금 더 열고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클릭한다 신간 목록을 들여다보다
가격이 20% 할인된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과 15% 할인된 가격에
르네 지라르의 폭력과 성스러움을 주문 클릭한다
창밖 야채 트럭에서 쿵쿵거리는
세상사 모두가 네 박자 쿵착 쿵착 쿵차자 쿵착
나는 뽕작 네 박자를 껴입고 트럭이 가는
길을 무심코 보다가 지도를 클릭한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길 하나를 따라가니 화엄사에
도착한다 대웅전 앞에 늘어선 동백 안에서
목탁 소리가 퍼져 나온다 합장을 하며
지리산 콘도의 60% 할인 쿠폰을 한 매 클릭한다
프린터 아래의 내 무릎 위로
쿠폰이 동백 꽃잎처럼 뚝 떨어진다 나는
동백 꽃잎을 단 나를 클릭한다
검색어 나에 대한 검색 결과로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가 나타난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찾아 차례대로 클릭한다
광기 영화 인도 그리고 나………나누고
……나오는…나홀로 소송……또 나(주)…
나누고 싶은 이야기……지구와 나…………
따닥 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지금은 영혼을 팔기에 좋은 계절

 

지금은 모든 것이 초록인 계절.
모든 것이 초록으로 흔들리는 계절.
우리도 흔들리는 두 팔과 다리 몸통과 머리 그리고 두 손과 두 발이 있어요.
자르고 갈고 붙이고 맞추고 쇠나 플라스틱을 끼울 수도 있어요.
공구세트는 당일 배송 되요.
지금은 초록의 계절.
모든 것이 초록 아니면 안되는 계절.
살은 다 발라내고 싶은 계절.
팔 다리 몸통 머리 그런 분할은 너무 도식적이니
단면으로 지하 1층에서부터 옥상까지처럼 몸을 통째로 쓱 자르는거죠.
3천여 개의 칼이 완비된 칼마트에서 종합 조리용 장미목 식도세트를 팔고 있어요.
왼손잡이용 칼 사용법도 동영상으로 배울 수 있어요.
지금은 진초록의 계절.
나무들의 잎잎이 공포로 꽉 찬 지금은 영혼을 팔기에 좋은 계절.
쓰지 않는 영혼을 팔아 고원이나 북극으로 떠나기 좋은 계절.
바람이 좋아서요.
햇빛이 좋아서요.


 시간에 관한 짧은 노트 1

 

 첫째날

 

 해가 지기도 전에 별이 하나 떴다 그 옆에 새가 발자국을 콱 찍었다 둘 다 반짝거렸다 그 사이로 시간의 두 다리가 묻힌다 더 이상 별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모국어 같은 순간이 있다

 

둘째날

 

 흰 초생달이 서쪽에 떴다 그 달 아래 별도 하나 떴다 버려진 거울 속에 갇힌 지난 시간이 자꾸 운다 눈앞에서 허물어지고 금방 다시 지어지는 집들의 동쪽에도 별이 두 개 떠올랐다 그 곳으로 머리를 한데 모아 비벼대는 시간들 초록색으로 떨며 서서 지구의 지붕을 뒤지는 시간들 흰 달 위에 위태롭게 올라탄 외눈박이 별들

 

세째날

 

 낮이 되어도 몸을 지우지 못하는 달이
 하늘 밖에 떠 있다
 창들이 화분을 허공에 내놓았다 내 앞으로
 시간이 사람들을 이쑤시개처럼 쑤시며 지나갔다

 

넷째날

 

 연이어 시간이 사람들을 이쑤시개처럼 쑤시며 지나갔다

 

다섯째날

 

 달이 뜨지 않았다 달이 떴던 자리에서 시간의 녹슨 뼈대가 덜커덕 올라온다 공기들이 자주 길을 바꾼다 시간은 잘 구겨지는 금속인지도 모른다 꺼진 스피커처럼 둘러선 하늘에 녹이 슬어간다

 사방에서 말더듬이 같은 별들이 돋아났다................
 부패한 별들도 자기 자리를 잡는다

 

여섯째날

 

 반달이 떴다 별똥별이 떨어져왔다 은색을 칠해 창앞에 걸어둔다 바람이 부니까 시간과 함께 달그락거린다 반달너머 하늘에도 상표처럼 납작하게 별 하나가 박힌다 순식간에 그 적막 안으로 시간이 돌멩이를 집어던진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맞는다 나?

 

일곱째날

 

 휴일이었다
 시간이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