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이영란 시모음/ 현대시학

휘수 Hwisu 2006. 4. 29. 00:10

<신인공모 당선작>

(제2회) 2000년 10월호 : 이영란

 

 

정오의 기차

 

그는 유쾌한 농담을 한다 목젖이 커다랗게 보이도록 웃는다 흰 치아를 환하게 들어내고도 웃는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쓱 가르마를 가르며 정오에 기차가 왔다 나는 다리 아래서 기차를 무심코 바라보았다 다시 레일을 타고온 그들은 한번쯤 가슴을 쓸어내린다 기차는 정녕 모르는 척 한다 한 여자가 창가의 햇빛에 바랜 종이 장미를 멀리 던진다 그는 호주머니 속에서 필터가 구겨진 담배를 꺼내문다 또다시 그가 큰소리로 농담을 한다 어깨를 들썩이며 먼저 웃는다 기차가 다음 역을 향해 떠나간다 유쾌한 농담을 하며 기침을 하며 간혹 흘러간 유행가 가락을 흥얼대며 달린다 어쩌다 열병처럼 심하게 몸살도 한다 간혹 독한 담배 연기도 흘린다 언제나 레일 위에서


 

그늘 다방

 

허름한 그늘 다방의 그림자가 길가에 비스듬이 누워있네 그림자엔 그물망처럼 미세한 빗금이 보이네 그늘 다방 여자는 커피잔 자국이 남은 낡은 탁자에서 검은 볼펜으로 사각에 빗금을 그리네 불더위를 먹은 사람들은 빗금친 부분으로 들어와 심호흡을 하고 다시 하얀 바탕으로 나가네 아무도 여자의 빗금친 부분에서 머물지는 않네 쓸쓸한 고백처럼 그림자는 짙어만 가고 여자의 검은 볼펜 자국엔 빗금조차 보이지 않네 계단이 삐걱이는 이층 그늘 다방엔 여자의 레이스 치마만 바뀔 뿐 아무 것도 바뀌질 않네 여자는 길다란 비가 내리는 어제도 종이에 빗금을 그렸네 빗금 속에 비바람이 치더니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네


 

불가사리

 

해변 전화박스에 지난 밤 빛을 게워낸 불가사리가 붙어 있었다 지친 눈빛의 불가사리는 과자봉지 속의 별사탕처럼 아무도 몰래 들어와 있었다 여름 해변의 사람들은 시럽 냄새가 나는 오일을 바르고 있었다 언제나 버릇처럼 검은 선그라스를 쓰고 있었다 나는 해변으로 오지 못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불가사리를 주웠다고 통화를 했다 그는 빛바랜 해변 사진을 보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지난날 푸른 바다를 과자 봉지마냥 찢어서 빨간 불가사리를 찾았었다고 말했다 해변엔 금빛 모래가 사금파리처럼 반짝였다 그가 빛이 바래져가는 자신의 바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의 긴 통화를 불가사리와 함께 바닷속에 넣었다 해변이 검은 전화선을 타고 꿈틀거렸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여자

 

고동처럼 말려있는 아이스크림 콘이 커다란 페인트 간판 위에 그려져 있다 거대한 고동이 바람에 부딪혀 함석이 울리는 소리를 낸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여자는 입술의 립스틱도 먹어 버린다 입 속에 페인트 냄새만 그득 남는다 눈같이 하얀 함석판을 먹은 여자가 게트림을 하자 로봇처럼 용수철 눈알이 튀어 나온다 로봇은 여자의 수동성이다 그녀는 두 번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기다린다 시간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간다 기다림에는 누런 고름만이 흥건하다 파리 한 마리가 그녀의 손등을 스쳐간다 지루한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또다시 먹는다 립스틱을 세 번째 바른다 그녀가 먹은 립스틱은 딸기 시럽처럼 붉은 색이다

 

 

오후

 

갈색 유리포트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커피 향기가 티스푼 모퉁이를 돌아나온다 프리지어가 나른한 창가에서 몸을 흔든다 흰 잔 속에 어른거리는 평화 한 다발 피어난다 향기의 축제는 시나브로 이어지고 ?참을수 없는 모호함?이란 말의 부스러기들이 한 모금씩 검은 나비 넥타이처럼 걸려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래는 턴 테이블을 돌리다 허공 중에 흩어진다 길 건너 오피스텔 푸른 유니폼이 잠시 갈색 톤으로 명상한다 하이힐이 오후를 가르며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