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이성복 시모음 3

휘수 Hwisu 2007. 4. 23. 08:13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1977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지성사, 198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사, 1993)
   『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 1994)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4)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0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2003)
시선집
   『정든 유곽에서』(문학과지성사, 1996)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잎을 핏물 들게 하는가
마라, 생각해보라
비린내 나는 네 살과
단내 나는 네 숨결 속에서
내숭 떠는 초록의 눈길을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초록 잎새들이
배반하는 황톳길에서
생각해보라, 마라, 어떻게
네 붉은 댕기가 처음 나타났는지
그냥 침 한번 삼키듯이,
헛기침 한번 하듯이 네겐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
내게 어렵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배반 아닌 사랑은 없었다
솟구치는 것은 토하는 것이었다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

 

시집 '아, 입이 없는 것들'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석회증이 깊었다 

 
노래의 기억


  기억의 남쪽 바다 십자성과 야자수는 노래 속에 있다 진한 박
하와 따뜻한 망고향 흐르는 노래 하얀 조개 껍질 같은 섬들 돈벌
레처럼 미끄러지는 통나무배들 수시로 끓는 납덩이 같은 노래의
추억은 내 속에서 해저 화산처럼 폭발한다 진흙을 싸발라 구운
원숭이 두개골처럼 이승의 붉은 털이 다 빠지고도 남을 노래, 그
러나 노래가 알지 못하는 이승의 기억은 시퍼런 강물이 물어뜯는
북녘 다리처럼 발이 시리다

 

현장비평가가 뽑은 2004 올해의 좋은 시(현대문학) 

 

비단길 1


깊은 내륙에 먼 바다가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 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이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림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시집 '그 여름의 끝'

 

찔레꽃을 따먹다 엉겁결에 당한


웬 미친놈이 학교 가는 사내애에게
황산을 끼얹었다
아이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푸른 잎새 넘실거리는 보리밭에서
깜부기를 뽑을 때처럼
삶은 난감한 것이다


삶이란 본래
시골 마을 질 나쁜 젊은 녀석들이
백치 여자 아이를 건드려
애 배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만


찔레꽃을 따먹다 엉겁결에 당한
백치 여자 아이는
눈부신 돛배처럼 내 앞에서 놀고 있다

 

출처, 간이역에이는시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