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이성복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2. 27. 00:54

1952년 경북 상주 출생 . 서울대 인문대 불어불문학 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7년 겨울 <정든 유곽에서>외 1편으로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1980년 문학과지성사)

          남해금산(1986년 문학과지성사)

          그 여름의 끝(1990년)

          호랑가시나무의 기억(1993년)

          아 입이 없는 것들(2003년 문학과지성사)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자국(2003년 열림원)


어떤 싸움의 기록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니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려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벌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댔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법(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 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법(法)도 없는 동네냐 법 도 없어 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罪)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門)열어 두어라 되돌아 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제대병


아직도 나는 지나가는 해군 찝차를 보면 경례! 붙이고 싶어진다.

그런 날에는 페루를 향해 죽으러 가는 새들의 날개의 아픔을

나는 느낀다. 그렇다. 무덤 위에 할미꽃 피듯이 내 기억 속에

송이버섯 돋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내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오기도 한다. 순지가 죽었대. 순지가!

그러면 나도 나직이 중얼거린다. 순, 지, 는, 죽, 었, 다


운명

 

운명이여!

 

그대가 있기에 나는 갑니다

나의 주위에 얼음판 위로

미끄러지는 사내 여럿 있습니다

 

운명이여!

 

까닭없이 허공에 펴 든 손

아직 꽃나무들은 얼음 속에 잠겨 있고

먹을 것을 찿아 새들은 눈 덮힌 벌판으로 몰려갑니다

 

운명이여!

 

이마를 숙이고

다가오는 그대 그림자를 봅니다

먼 추억처럼 그대 그림자 떠나기를 기다립니다

 

운명이여! 운명이여!

 

제3회 소월시작품상 작품집 중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본 적 없고
돌이켜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죄罪에서 지을 죄罪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 먹어도
베어 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후광後光, 너는 썩어 詩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용암熔岩처럼 가슴속을
떠돌아다니는 새들, 한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 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불온不穩한 도랑을 따라
예감豫感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지 1980)

 

어두워질 때까지

                                         
사랑하는 일도 사람의 일이라 때로는 버겁고 힘겹게 여겨질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디라도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 떠남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로부터가 아니라,
그것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떠남이다.
모든 떠남은 진정한 자신으로의 돌아옴을 의미한다.
떠남은 결국 사랑으로 가는 먼 길의 돌림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은 아무리 추악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랑을 감추고 있다.
삶은 사랑이다.
삶과 사랑이라는 결코 포개질 수 없는 두개의 다른 그림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산다는 것은 이 두 개의 그림이 사실은 동일한 것이라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무를 접 붙이는 일,
혹은 죽은 나무에서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일.


모든 것은 현실 속에 있다.
현실로부터 아무리 멀리 떠난다 해도,


우리는 엄마 등에 엎힌 아이처럼 현실의 품안에 있다.
울며 보채는 우리에게 어머니는 근심스레 타이르신다.


아들아, 아직은 밤이 깊지 않았다.
더 어두운 밤이 올 때까지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단다

 

   어둡고 추운, 푸른

            
   겨울날 키 작은 나무 아래

   종종걸음 치던

   그 어둡고 추운 푸른 빛,

 

   지나가던 눈길에

   끌려나와 아주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살게 된 빛

 

   어떤 빛은 하도 키가 작아,

   쪼글씨고 앉아

   고개 치켜들어야 보이기도 한다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레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비는 그리 단단하지 못한 송곳으로 땅을 쪼으려 내려오다 바닥에 닿기 전에 드러눕는다 자해 공갈단이다 비는 길바닥에 윤활유 들이부은 듯 아스팔트 검은빛을 더욱 검게 한다 하늘에서 내려올 땐 무명 통치마였던 비는 아스팔트 바닥 위를 번칠거리며 흐르다가 하늘을 둘러싸는 여러 다발 탯줄이 된다 아, 오늘은 늙은 하늘이 질퍽하게 생리하는 날 누군가 간밤에 우주의 알집을 건드린 거다 아니다, 아무도 다녀가지 않은 알집 두터운 벽이 스스로 깨져 무너져 쏟아지는 것이다

 

   기다림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섬                     

섬과 섬이 만나 자식을 낳았다.
끝없이 너른 바다를 자식섬은 떠돌아 다녔다.
어미섬과 아비섬을 원망하면서..
 
떠돌다 만난 섬들은 제각기 쓸쓸했고
쓸쓸함의 정다움을 알게 됐을 때
 
서둘러, 서둘러
자식섬은 돌아왔다.
 
어미섬과 아비섬이 가라앉은 뒤였다.
 

파리

 

 초가을 한낮에 소파 위에서 파리 두 마리 교미한다 처음엔 쌕쌕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다가 급기야 올라타서는 할딱거리며 몸 구르는 파리들의
대낮 정사, 이따금 하느작거리는 날개는 얕은 신음소리를 대신하고 털
보숭이 다리의 꼼지락거림은 쾌락의 가는 경련 같은 것일 테지만 아무리
뜯어보아도 표정 없는 정사, 언제라도 손뼉쳐 쫓아낼 수도 있겠지만
그 작은 뿌리에서 좁은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긴 생명의 운하 앞에
아득히 눈이 부시고 만다

 

<백년 후에 읽고 싶은 백편의 시>


11월  

 

1
등 뒤로 손을 뻗치면 죽은 꽃들이 만져지네
네게서 와서 아직 네게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
손을 빼치면 온통 찐득이는 콜타르투성이네
눈을 가리면 손가락 사이로 행진해가는 黃帽派(황모파)
승려들, 그들의 옷은 11월의 진흙과 안개
김밥 마는 대발처럼 촘촘한 날들 사이로 밥알
같은 흰 꽃 하나 묻어 있었네 오랜 옛날얘기였네

 

2
그대 살 속에 십 촉짜리 전구 수천 빛나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곱절 크기의 추억들
법석거리니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환하고 눈뜨면 또 어지러워 늘 다니던
길들이 왜 이리 늙어 보이는지 펼쳐놓은
통치마 같은 길 위로 날들은 지나가네
타이탄 트럭에 실려 시내로 들어가는 분홍빛
얼굴의 돼지들처럼, 침과 거품 흐르는 주둥이로
나 완강한 쇠창살 마구 박아보았네 그 쇠창살
침과 거품 흘러내려 흰 고드름 궁전 같았네

 

3
11월, 천형의 땅 삶긴 번데기처럼 식은
국물위에서 11월, 기다리지 않았으므로
노크 한번 하지 않았으므로 11월, 미구에
감긴 눈으로 쏟아져들어올 흰 눈 흰 밀가루
포대 터져 은박지로 구겨질 겨울 11월,
이젠 힘이 부쳐 일어서지 않는 성기
포르노처럼 선명한 욕망의 밑그림 11월,
삼켜지지 않는 뜨거운 수제비알 같은 여름

 

4
겨울의 입구에서 장미는
붉은 비로드의 눈을 뜨고
흰 속눈썹처럼 흔들리는 갈대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우는
가을꽃들의 울음을 나는
듣지 못한다 초록 네온사인
'레스토랑 청산' 위로 비가
내리고 나는 세상의 젖은 몸
위에 "사랑한다"라고 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전에 고등학교 때 한참 정치에 꿈이 부풀어 있을 때,
국회의원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대학 갓 들어가 예술이니 사상이니 미쳐 있을 때,
유명 화가의 전시회에서 심오한 질문을 해댔다.
화가는 한참 쳐다 보더니 쌩까버렸다.
다시는 글 안 쓴다고 군대에 가서는,
한참 뜨고 있던 여류시인에게 오밤중에 전화를 했다.
그녀가 정중히 전화를 끊었을 때,
그때도 참 부끄러웠다.
그러나 두고두고 창피한 것은
회사 들어가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저문 골짝에서 저문 골짝으로

 

저문 골짝에서 저문 골짝으로

늙은 해는 몸을 옮긴다

 

그대 발뿌리에 무릎 꿇고 매어 달리노니

공중에 흩어진 연인들의 운명을 보시라

 

그대 무릎 부여잡고 오래 어쩔 줄 모르노니

공중에서 헤메는 연인들의 운명을 생각하시라

 

저문 골짝에서 저문 골짝으로

늙은 해는 몸을 옮긴다

 
벽지가 벗겨진 벽은

 

 벽지가 벗겨진 벽은 찰과상을 입었다고 할까 여러 번 세입자가 바뀌면서 군데군데 못자국이 나고 신문지에 얻어맞은 모기의 핏자국이 가까스로 눈에 띄는 벽, 벽은 제 상처를 보여주지만 제가 가린 것은 완강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못자국 핏자국은 제가 숨긴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치열한 알리바이다 입술과 볼때기가 뒤틀리고 눈알이 까뒤벼져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피의자처럼 벽은 노란 알전구의 강한 빛을 견디면서, 여름 장마에 등창이 난 환자처럼 꺼뭇한 화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금은 싱크대 프라이팬 근처 찌든 간장 냄새와 기름때 머금고 침묵하는 벽, 아무도 철근 콘크리트의 내벽을 기억하지 않는다

 

바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 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뿐

 

                사랑은 자기반영과 자기복제
                입은 삐뚤어져도 바로 말하자.

                내가 너를 통해 사랑하는 건
                내가 이미 알았고 사랑했던 것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해서,
                시든 꽃과 딱딱한 빵과
                더럽혀진 눈(雪)을 사랑 할 수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해서,
                썩어가는 생선 비린내와
                섬뜩한 청거북의 모가지를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을 사랑할 뿐,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

                아장거리는 애기 청거북의 모가지가
                제어미에게 얼마나 예쁜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1959년」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姙(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性器(성기)에는 까닭 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移民(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 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南洋(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無氣力(무기력)과 不感症(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修飾(수식)했을 뿐 아무것도 追億(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春畵(춘화)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倫理(윤리)와 사이비 學說(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監獄(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그대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간이 식당에서 져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었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편지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바다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 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 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낮은 노래 2

 

 나의 하나님, 기쁨의 통로 저 편에 계신, 여태까지 나는

막힌 동굴 같은 것이었나 봅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내게서

피어난 것들은 당신의 흔적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이제

당신에게로 가서 끝없이 빛으로 새어나오는 동글이 되렵

니다 물밀듯이 밀려가는 기쁨의 통로 저편, 나의 하나님,

봄부터 여름까지 막혀있던 당신의 실핏줄 하나 이제 열립

니까

 

시집, 그 여름의 끝 (문학과지성사)

 

잔치국수 하나 해주세요

 

허나 사랑이란 피곤해지면 잠자야 하는 것
또 굶주리면 먹어야 하는 것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죽은 이도」

  내가 담장 너머로 ‘복분식 아줌마, 잔치 국수 하나 해 주세요’ 그러면 ‘삼십 분 있다가 와요’ 하기도 하고 ‘오늘 바빠서 안 돼요’ 하기도 하고, 그러면 나는 할매집 도시락을 시켜 먹거나, 횡단보도 두 번 건너 불교회관 옆 밀밭 식당에 아구탕 먹으로 간다. 내 식욕과 복분식 아줌마 일손이 일치하지 않을 때, 재빨리 내 식욕을 바꾸는 것이다. 아니 식욕을 바꾼다기보다, 벌써 다른 식욕이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알던 여자들도 대개는 그렇게 왔다. 하루 이틀 지나면 그때는, 무얼 먹고 싶었는지 생각도 안 나는 세월에서.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2003)

 

산길 2 
 
 한 사람 지나가기 빠듯한 산길에 아카시아 우거져 드문드문 햇빛이 비쳤습니다 길은 완전히 막힌 듯했습니다 이러다간 길을 잃고 말 거라는 생각에, 멈칫멈칫 막힌 숲 속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떨면서, 가슴 조이며 우리는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언제나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었지요

 

 K와 프리이다의 첫 번째 性 
 
  어떤 수컷은 일 끝나면 제 성기를 부러뜨려 코르크 마개처럼 입구를 막아 버린다. 다른 수컷들과 교미하는 것을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어떤 수컷은 국자처럼 생긴 그것으로, 다른 수컷들이 쏟아놓은 즙액을 퍼내고 제 볼일을 본다. 사람의 남성이 그렇게 생겼다는 설도 있다. 어떤 갈매기는 짝짓기 예물로 암컷에게 준 물고기를 일 끝내자마자 물고 달아나고, 어떤 반딧불이는 암컷의 신호를 보내 흥분해서 찾아오는 수컷들로 식사한다. 다들 미쳤냐고? 다소 야비하지만, 철저히 제 정신이다.

 

꽃 피는 아버지

 

1

아버지
만나러 금촌 가는 길에
쓰러진 나무 하나를 보았다 흙을
파고 세우고 묻어주었는데 뒤돌아보니
또 쓰러져 있다
저놈은 작부처럼 잠만 자나?
아랫도리 하나로 빌어먹다보니
자꾸 눕고 싶어지는가보다
나도 자꾸 눕고 싶어졌다
나는 내 잠속에 나무 하나
눕히고 금촌으로 갔다
아버지는
벌써 파주로 떠났다 한다
조금만 일찍 와도 만났을 텐데
나무가 웃으며 말했다 고향 따앙이 여어기이서
몇리이나 되나 몇리나 되나 몇리나되나……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이 노래불렀다
내 고향은 파주가 아니야 경북 상주야
나무는 웃고만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는 쓰러진 나무처럼
집에 돌아왔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너는 내가 떨어뜨린 가랑잎이야

 

2

언덕배기 손바닥만한 땅에 아버지는
고추나무를 심었다
밤 깊으면 공사장 인부들이
고추를 따갔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는 고추나무 키 위에
머뭇거렸다
모기와 하루살이 같은 것들이
엉켜붙었다

내버려두세요 아버지
얼마나 따가겠어요

보름 후 땅 주인이 찾아와, 집을 지어야겠으니
고추를 따가라고 했다

공사장 인부들이 낄낄 웃었다

 

3

아무 일도 아닌 걸 가지고 아버지는 저리
화가 나실까 아버지는 목이 말랐다 물을
따라드렸다 아버지, 뭐 그런 걸 가지고
자꾸 그러세요 엄마가 말했다 얘, 내버려
둬라 본디 그런 양반인데 뭐 아버지는
돌아누워 눈썹까지 이불을 끌어당겼다

1932년 단밀 보통학교 졸업식
며칠 전 장날 아버지 떡 좀 사먹어요
그냥 가자 가서 저녁 먹자
아버지이…… 또! 이젠 너 안 데리고 다닌다
네 월사금도 내야 하고 교복도 사야 하고……
아버지, 아버지는 굶었다 그해 모심기하던
날 저녁 아버지는 어지러워 밥도 못 잡숫고
그 다음날 새벽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藥 한 첩 못 써보고

아무도 일찍 잠들지 못했다 아버지는 꽃 모종
하고 싶었지만 꽃밭이 없었다 엄마, 어디에
아버지를 옮겨 심어야 할까요 살아온 날들
물결 심하게 이는 오늘, 오늘

 

4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두기 며칠 전부터 벌레가 나와 책장을 갉아 먹고
있었다 처음엔 두 군데, 다음엔 다섯 군데 쬐그만 홈을 파고
고운 톱밥 같은 것을 쏟아냈다 저도 먹어야 살지, 청소할 때마다
마른 걸레로 훔쳐냈다 아버지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만 계셨다
텔레비 앞에서 프로가 끝날 때까지 담배만 피우셨다 벌레들은
더 많은 구멍을 파고 고운 나무 가루를 쏟아냈다 보자 누가 이기나,
구멍마다 접착제로 틀어막았다 아버지는 낮잠을 주무시다 지겨우면
하릴없이, 자전거를 타고 水色에 다녀오시고 어머니가 한숨 쉬었다
그만하세요 어머니, 이젠 연세도 많으시고…… 어머니는 먼 산을 바라보며
또 한 주일이 지나고 나는 보았다 전에 구멍 뚫린 나무 뒤편으로
새 구멍이 여러 개 뚫리고 노오란 나무 가루가 무더기, 무더기
쌓여 있었다 닦아내도, 닦아내도 노오랗게 묻어났다 숟가락을 지우며
어머니가 말했다 창틀에 문턱에 식탁에까지 구멍이…… 약이 없다는데,
아버지는 밥을, 소처럼, 오래오래 씹고 계셨다

 

남해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어머니 1

 
  가건물 신축 공사장 한편에 쌓인 각목더미에서 자기 상체보다 긴 장도리로 각목에 붙은 못을 빼는 여인은 남성, 여성 구분으로서의 여인이다 시커멓게 탄 광대뼈와 퍼질러 앉은 엉덩이는 언제 처녀였을까 싶으쟎다 아직 바랜 핏자국이 수국(水菊)꽃 더미로 피어 오르는 오월, 나는 스무 해 전 고향 뒤산의 키 큰 소나무 너머, 구름 너머로 차올라가는 그녀를 다시 본다 내가 그네를 높이 차올려 그녀를 따라잡으려 하면 그녀는 벌써 풀밭 위에 내려앉고 아직도 점심 시간이 멀어 힘겹게 힘겹게 장도리로 못을 빼는 여인,

 

   어머니,
  촛불과 안개꽃 사이로 올라오는 온갖 하소연을 한쪽 귀로 흘리시면서, 오늘도 화장지 행상에 지   친 아들의 손발의, 가슴에 깊이 박힌 못을 뽑으시는 어머니……

 

시집,  남해금산(문학과지성사)

 

그렇게 소중했던가


버스가 지리산 휴게소에서 십 분 간 쉴 때,
흘러간 뽕 짝 들으며 가판대 도색잡지나 뒤적이다가,

자판기 커피 뽑아 한 모금 마시는데 버스가 떠나고 있었다.

종이컵 커 피가 출렁거려 불에 데인 듯 뜨거워도,
한사코 버스를 세 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가뿐 숨 몰아쉬며 자리에 앉으니,
회청색 여름 양복은 온통 커피 얼룩.

화끈거리는 손등 손바닥으로 쓸며,
바닥에 남은 커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소중했던가,
그냥 두고 올 생각 왜 못했 던가.

꿈 깨기 전에는 꿈이 삶이고,
삶 깨기 전에 삶은 꿈 이다.  

 

추석 


  밤하늘 하도 푸르러 앞산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빨래하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다시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정말 살았다는 느낌 한번 들었던가


 발

 

이렇게 발 뻗으면 닿을 수도 있어요 당신은 늘 거기 계시니까요
한번 발 뻗어보고 다시는 안 그러리라 마음먹습니다
당신이 놀라실 테니까요
그러나 내가 발 뻗어보지 않으면 당신은 또 얼마나 서운해하실까요
하루에도 볓 번씩 발 뻗어보려다 그만두곤 합니다

 
느낌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