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이병률 시모음

휘수 Hwisu 2007. 1. 11. 07:15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파리 영화학교 ESEC 수료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좋은 사람들> <그날엔>당선
시힘 동인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

 

거인고래

 

거인고래는 크지 않습니다

왼 눈은 감정 있는 것을 보고

오른 눈은 죽어 있는 것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상처가 생기면 상처 된 자리를 스스로 떼어내 번지지 않게 하며

백 오십년을 살 뿐 오래 살지 않습니다

그 일생의 한번 나의 천막에 들른다 하였습니다

 

밤은 어둡고 꽃들은 서로를 모른 체 하는 사이

나는 그의 눈을 받아먹고 고양이 되고 얼음이 되고 눈발이 되려

질척이며 그가 오는 소리를 향하여 몸 돌리려 하였습니다

헌데 거인고래는 살아오지 않는 존재라 하였습니다

기다리는 일은 구실이며 병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설레는 일 없도록 다 내려놓아야겠는데

팔뚝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우는 천막 밖의 저 큰 나무

큰 나무 아래 몸에서 몸위로 까무러치는 수천의 달(月)들

 

혹 내가 터를 옮길 적마다 서 있던 저 나무 한그루가 거인고래는 아니었는지요

 

그것으로 다녀간 것으로 치자는 셈은 아닌지요

거인고래가 다녀가고 나와 내 생각의 풍경들은 마지막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애지 (2005년 가을호)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

 

바람의 사생활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좋은 사람들

 

   우리가 살아가는 땅은 비좁다 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적다 하지만 햇빛은 좁은 곳 위에서 가루가 될 줄  안다 궂은 날이 걷히면 은종이 위에다 빨래를 펴 널고 햇빛이 뒤척이는 마당에 나가 반듯하게 누워도 좋으리라 담장 밖으론 밤낮 없는 시선들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게 바쁘고 개미들의 행렬에 내 몇 평의 땅에 골짜기가 생기도록 상상한다 남의 이사에 관심을 가진 건 폐허를 돌보는 일처럼 고마운 희망일까 사람의 집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일이 목 메이게 아름답다 적과 내가 엉기어 층계가 되고 창문을 마주 낼 수 없듯이 기운 찬 사람을 만나는 일이란 따뜻한 숲에 갇혀 황홀하게 밤을 지새는 일 (지금은 적잖이 열망을 끼얹거나 식히면서 살 줄도 알지만 예전의 나는 사람들 안에 갇혀 지내기를 희망했다) 먼 훗날, 기억한다 우리가 머문 곳은 사물이 박혀 지내던 자리가 아니라 한때 그들과 마주잡았던 손자국 같은 것이라고 내가 물이고 싶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노을이 향기로운 기척을 데려오고 있다 땅이 세상 위로 내려앉듯 녹말기 짙은 바람이 불 것이다

 

 시인들

 
1
 
나이 먹어서도 사람들 친근하게 못 맞아주더니
못된 놈처럼 자기만 아느라 독기로 밀쳐만 내더니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이 앞에선
마음이 열리고 바다가 보인다
 
술 한잔 오가며
-시인들이 원래 그렇죠, 뭐
낯선 이의 말 같다 싶은 말에
편 하나 끌어들인 기분 되어
진탕 마시고 마시다가 바다 앞에 선다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처음 본 사인데 말까지 놓으면서
길에 핀 꽃대를 걷어차면서도 히히덕거리는
시인들의 저녁식사
 
유난히 쓸쓸해져 걸어 돌아오면 빈집 가득한 바람
누군가 왔다 갔나 킁킁거리면
늦은 밤 택시 타면서 밤길 잘 가라고 손 흔들던 시인
언제 들렀다 간 건지 바다 소리 들리고
무릎까지 들어온 갈대밭에 발자국이 찍혀 있다
 
2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살면서 시인에게만 들었던 말
나도 따라 시인에게만 묻고 싶은 말
부모도 형제도 아닌 시인에게만 묻고
한사코 답 듣고픈 말
 
어찌할 것도 아닌데
지갑이 두둑해서도 아닌데
그냥 물어서 괜찮아지고 속이 아무는 말
 
옛 애인을 만나러 가다 말고
시 쓰는 이의 전화를 받고
그 길로 달려가서는 대뜸 묻는 말
 
어찌 사는가
방에 불은 들어오는가
쌀은 안 떨어졌는가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문학동네, 2005) 
 

봉인된 지도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지구와 달의 자리가 가까워 달이 커보였던 때

일년은 오백일이었고 하루는 열여섯 시간이었을 때

당신은 나를 데리러 왔다

신(神)과의 약속 발설할 것 같지 않던 당신은

지금 그 시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백스물 아흔 여든두 살 쭈글쭈글한 얼굴로 돌아가자 말했다

허나 내가 지켜야할 약속은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

 

달과 지구의 자리가 멀어져 달이 작아 보일 때까지

일년은 삼백육십오일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일 때까지

 

아무것도 아닌 편지

  

어느 먼 지방 우체국 사서함번호가 찍힌 편지가 배달되었네
면회를 와달라는 어느 감옥에서 보낸 편지
봉투엔 받는 이의 이름만 다를 뿐 버젓이 내 집주소가 적혀 있었네

오래 책상 위에 올려둔 알지 못하는 이의 편지
화분이 편지봉투 위로 마른 꽃잎들을 한웅큼 쏟아놓은 어느날
새 봉투에 또박또박 그의 주소를 적고 편지를 밀어넣고 풀칠을 하였네
이 편지를 되받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어서
들판이나 강가에서도 물살처럼
또 어느 먼 곳에서도 터벅터벅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일런가

며칠 뒤 편지는 나에게로 되돌아왔네
그가 출감한 것으로 치자며
마음에서 꺼낸 못으로 집 한채라도 지어올리기를 바라자며 감옥의 자물쇠들을 흔들어보네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그가 더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며칠째 새가 와서 한참을 울다 간다 허구한 날 새들이 우는
소리가 아니다 해가 저물고 있어서도 아니다 한참을 아프게
쏟아놓고 가는 울음 멎게 술 한잔 부어줄 걸 그랬나, 발이 젖
어 오래도 멀리도 날지 못하는 새야
 
지난날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근다 두 달 세 달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둔 밤 병 하나 말갛게 씻는다
잘난 열매들을 담고 나를 가득 부어, 허름한 탁자 닦고 함께
마실 사람과 풍경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저 가득 차 무거워진
달月을 두어 곱 지나 붉게 붉게 생을 물들일 사람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


당신이라는 제국

 

  이 계절 몇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 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 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 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세 걸음 봄날은 간다
 

사랑의 역사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힌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혔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

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

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나에겐 쉰 넘은 형이 하나 있다

그가 사촌인지 육촌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모른다


태백 어디쯤에서, 봉화 어디쯤에서 돌아갈 차비가 없다며

돈을 부치라고 하면 나에게 돌아오지도 않을 형에게

삼만 원도 부치고 오만 원도 부친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는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가 관계인지 높이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더 멀리 먼 곳으로 갔으면 하고 바랄 뿐

그래서 오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십만 원을 부치라 하면 부치고

그의 갈라진 말소리에 대답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어느 먼 바닷가에서 행려병자 되어 있다고

누군가 연락해왔을 땐 그의 낡은 지갑 속에

내 전화번호 적힌 오래된 종이가 있더라는 것

종이 뒤에는 내게서 받은 돈과 날짜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더라는 것


어수룩하게 그를 데리러 가는 나는 도착하지도 않아

그에게 종아리이거나 두툼한 옷이거나

그도 아니면 겹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할 뿐

어디 더 더 먼 곳에서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고 했으면 하고

자꾸 바라고 또 바랄 뿐

 

시집 <바람이 사생활> 2006년 창비

 

장도열차


-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긴 시간 동안 열차를 타야한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친척들을 아주 잠깐 동안이나마 열차가 쉬어 가는 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서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이번 어느 가을날,
저는 열차를 타고
당신이 사는 델 지나친다고
편지를 띄웠습니다

 

5시 59분에 도착했다가
6시 14분에 발차합니다

 

하지만 플랫홈에 나오지 않았더군요
당신을 찾느라 차창 밖으로 목을 뺀 십오분 사이
겨울이 왔고
가을은 저물대로 저물어
지상의 바닥까지 어둑어둑했습니다

 

이사


이삿짐을 싸다 말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다 보니
그냥 두고 갈 뻔한 고추 몇 대
미안한 마음에 손을 내미니
빨갛게 매달린 고추가
괜찮다는 듯 떨어진다
데려가 달라고 하지 않으면
모른 체 데려가 주지 않을 生
새벽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을 찌르는 매운 물기


밤 열두 시

 

1


밤 열두 시는
떡복이 1/2인분과 순대 1/2인분이다
그것도 다 식은 채로
한 접시에 나란히 나오는 것이다
순대는 고추장에 닿지 않으려고
한사코 한쪽을 지키고 있고
떡볶이는 순대 쪽으로 진물을 흘리고 있다

 

순대 먼저 먹을지
떡볶이 먼저 먹을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2


밤 열두 시는
밥 한 공기를 시켜
당신과 내가 나눠 먹는 일이다
그러다 밥 속에서 눈썹이 나오면 눈섭을 떠내어
몰래 식탁 밑으로 숨기는 일이다
당신의 숟가락이 지나간 자리엔
붉게 수술자국 생겨나고
사과나무 하나 뽑혀나간 것 같은 구덩이는
두 사람이 걸어온 밤길처럼 메꿀 길이 없다

 

반찬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안 묻은 쪽을 먹어야 할지
밤 열두 시는 삶에 있어 절반이다

 

누(累)

 

늦은 밤 쓰레기를 뒤지던 사람과 마주친 적 있다
그의 손은 비닐을 뒤적이다 멈추었지만
그의 몸 뒤편에 밝은 불빛이 비쳐들었으므로
아뿔싸 그이 허기에 들킨 건 나였다
살기가 그의 눈을 빛나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환히 웃으며 들킨 건 나라고 뒷걸음질쳤다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쳤을 때도 그랬다
늦은 밤 빨랫감을 털고 있는 내 방 창문을 지나
막다른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숫그림자는
구두 굽에 잔뜩 실은 욕정을 들키자
번득이는 눈으로 달겨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럴 땐 눈이 눈에게 말을 걸면 안 되는 심사인데도
자꾸 아는 척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내 눈은 오래도록 그 눈들을 따라가고 있다
또 한 번 세상에 신세를 지고야 말았다 싶게
깊은 밤 쓰레기 자루를 뒤지던 눈과
사랑을 하러 가는 눈과 마주친 적 있다

 

내 마음의 지도 
       

1


자주 지도를 들여다 본다
모든 추억하는 길이 캄캄하고 묵직하다
많은 델 다녔으므로, 많은 걸 본 셈이다
지도를 펴놓고 얼굴을 씻고,
머리 속을 헹구워 낸다
아는 사람도, 마주칠 사람도 없지만
그 길에 화산재처럼 내려 쌓인다
토실토실한 산맥을 넘으며,
온 몸이 다 젖게 강을 첨벙이다
고요한 숲길에 천막을 친다
지도 위에 맨발을 올려보고 나서도
차마 지도를 접지 못해 마음에 베껴두고 잔다
여러 번 짐을 쌌으므로 여러 번 돌아오지 않은 셈이다
여러 번 등 돌렸으므로 많은 걸 버린 셈이다
그 죄로 손금 위에 얼굴을 묻고
여러 번 운 적이 있다

 

2


깊은 밤, 나는
그가 물을 틀어 놓고
우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울음소리는 물에 섞이지 않았지만
그가 떠내려보낸 울음은
돌이 되어 잘 살 거라 믿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