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호 시모음 1
1966년 김천 출생
대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제6회 ≪시산맥상≫ 대상 수상
200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조용한 가족>으로 시부문 당선
<난시> 동인, 인터넷 <창작노트> 동인, 부산 부일여중 교사
시집 <조용한 가족> 2007년 문학의전당
cafe 통기타
철새들이 물 좋은 강남으로 날개 짓의 템포를 올린다
오늘, 나는 cafe ‘통기타’ 속에 음표로 들어앉아
악보 같은 거리를 향해 연주되고 있다
6차선 도로, 여섯 줄의 활발한 현(鉉)위에서
차들은 ’고고’ 주법으로 공명되다가,
승강장, 쉼표 앞에서 강한 비트 음(音)을 섞어 정지!
하차하는 여자는 Am,
승차하는 남자는 Cm
보도를 걷는 사람들은 차례로
C
Dm
G7
F
……
카페 내벽에 걸린 낡은 통기타가
분주한 코드들을 읽고 있다
오선지 같은 줄 좌석에 드문드문드문
창 밖을 내다보는 사람들도 악기 같은 입술로
조막 만한 음표들을,
뱉고, 읽고, 뱉고, 읽고 또 뱉고
한물간 포크송처럼 구석진 자리에서
비브라토비브라토, 흐느낀다.
사랑은 이제 연주하기 어려운 하이 코드다.
C#m, B#m, G#m, 이런 첫사랑 같은 코드를
꽁무니에 달고 눈썹 맨 윗줄에서 철새들이
무명 가수처럼 쓸쓸히 무대 뒤편으로
말려 올라가고 있다.
사라지고 있다.
*Am, C Dm G7 F…등: 기타 코드들.
시집 <조용한 가족> 2007년 문학의전당
발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유언대로 선산에 묻어드렸다
무덤 가에는 여기저기 암세포들이 만발했다
땅 속에서 차 올랐던 복수腹水가 콜록콜록 기침소리를 내며 계곡으로 흘러들었다
손톱들이 언 땅을 벅벅 긁어대며 올라오고 있었다
땅 속에서 올라오는 것들은 모두 다 파랗게 질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본 하늘은 모처럼 액정 화면을 환하게 켜놓고 있었다
구름들이 여기저기 문자메시지처럼 찍혀 있엇다
집에 돌아와서 남은 유품들을 정리하던 중에 휴대폰이 나왔다
휴대폰도 아버지처럼 죽어 있었다
외투 주머니가 땅 속이라는 듯 편하게 누워 있었다
나는 외투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안방으로 옮겼다
따뜻하게 전원을 넣었다
휴대폰 속에서 호흡 고르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아버지가 돌아오셨다
한 순간 아버지가 액정을
번쩍 뜨셨다
시집 <조용한 가족> 2007년 문학의전당
애플 주스
부산행 무궁화호 4호차 8번 좌석에 앉아
7번 좌석의 그녀를 빨고싶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의자에 묻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평소 풍만한 가슴을 좋아했으므로
그녀의 잠든 몸에 빨대를 꽂고싶었지만
그녀의 애인이 아니어서
혼자 안타까워져갈 무렵이었다
기차는 수원역을 지나고 조치원을 지나고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나무들이 세상의 아랫도리에
뿌리를 꽂고 쪽쪽 빗물을
부끄럽게 빨아대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대전이 기차를 멈추어 세웠을 때
그녀가 짐을 챙겼다
그녀가 내 생각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자꾸만 시선이 미끄러졌다
그녀는 한번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기에
내 속에서는 그녀가 넘칠 듯 출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계단을 벗어나 역사 앞에서
지금 누군가와 키스를 나누고 있을 터였다
질투가 단맛처럼 돋았다 그러나
신맛이 약간 도는 나의
아 사과 맛 그녀
순신이 형
순신이 형,
형과의 거리가 창 밖 어둠만큼
캄캄하다는 걸 잘 알아. 별빛이 칼날이 되어
그 거리조차 뭉텅뭉텅 잘라내는
8층 임대아파트 베란다에 앉아,
접시형 안테나를 세우고 가난처럼 까마득한,
그리운 형에게 타전하고 싶었어
올해는 을유년乙酉年이야. 그러나
우리에게 임진년壬辰年 아닌 날 있었을까.
산 속에서는 잎들이 고분처럼 쌓이고
오늘도 고이즈미는 신사참배를 했다는데,
이라크에서는 포화가 끊이질 않아
산 거북이를 바다에 방생하면
거북선이 되는 걸까?
우리의 왕과 신하들은 여전히 탁상 위에
아름다운 공론을 장식 중이었어.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형이 준비한
화포라는 것을 잘 알아.
달빛이 심지가 되어 타고 있는 하늘 아래
창문을 열어놓고 지구가 왜 하필이면
구체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어
지구는 여전히 목표지점을 향해
날고 있는, 형의
포탄 맞지?
한 밤 중의 창세기
방안에는 아내의 배가 노아의 방주처럼 정박해 있다.
아내의 부푼 배가 자꾸만 들썩이는 이유를
방주 속 삼백 예순 다섯 종의
날짐승과 길짐승 때문이라고 해석하면서부터
나는 밤마다 잠을 설쳤다.
아내는 자꾸만 맹수처럼 코를 골았고
전원을 꺼놓지 않은 TV는 한밤 내 비를 쏟았다.
창 밖은 지금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
네온사인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술집의 타락한 형광등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불연 지붕 위에 신의 사자처럼 먹구름이 몰려왔다.
모든 지붕 위로 심판의 빗줄기가 그어졌다.
땅 위로 무수한 방언들이 쏟아졌을 때,
아내의 배가 서서히 노 젓기 시작했다.
나는 약속된 아침을 찾아 동승한 비둘기,
아내의 배가 가 닿아야할 아라라트 산은
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아직도 내겐 한 장의 푸른 감람나무 잎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문득 뱃속에 새 생명을 싣고 잠든 아내의 얼굴이
성경 속 말씀처럼 편안하게 보였다.
잠든 아내의 얼굴에서 감람나무 이파리처럼
맑은 한 장의 웃음을 찾았다.
나는 잠든 아내의 배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내의 부풀어 오른 방주가 내 품에
포근히 정박해 왔다.
시집 <조용한 가족> 2007년 문학의전당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