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관련

이기성 시인의 시집, <불쑥 내민 손>

휘수 Hwisu 2007. 11. 5. 10:59


고통을 머금고 한없이 떠도는 낯선 자들의 풍경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닌 자들, 불길하고 기괴한 장면들 안에 파묻힌 이들이 그려내는 공포스러우면서도 황홀한 공간을 체험하게 하는 시인 이기성의 첫 시집 『불쑥 내민 손』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되었다. 이 시집은 죽음과 부패로 얼룩진 도시의 풍경을 꼼꼼히 기록하는 동시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삶의 이면과 그 균열을 그려냄으로써 지리멸렬한 세계의 실상을 통렬히 쏟아낸다.

지하철 안에서 졸다 눈뜨면 불쑥, 어떤 손이 다가온다. 무거운 고개를 처박고 침 흘리며 졸고 있던 나를 뚫어지게 보며 움푹한 손 내밀고 있는 노파. 창 밖에는 가물가물 빈 등(燈)이 흐르고 헛되이 씹고 또 씹던 질긴 시간을 열차가 거슬러 갈 때, 내가 마신 수천 드럼의 물과 불, 수만 톤의 공기와 밥알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혓바닥으로 무수히 핥아댄 더러운 손. 환멸의 등은 꽃처럼 발등에 떨어지고 움켜쥔 손바닥에서 타오르던 길은 뜨거운 머리카락처럼 헤쳐진다. 살얼음 낀 공중변소 깨진 거울 앞에서 천천히 목을 졸라보던 손, 이제 검은 넥타이는 풀어지고 딱딱한 벽돌처럼 혀는 굳어 있다.
그러니 이 지리멸렬의 세계여, 내민 손을 거두어라. 찌그러진 심장을 움켜쥔 누추한 손을 이제 그만 접어라. 젖은 이마에 등을 켜고 열차가 터널을 빠져나갈 때 천장에 매달린 가죽 손잡이 한꺼번에 흔들리고 세계의 지루한 목구멍이 찬란하게 드러난다. 악착같이 손 내밀고 있는 노파의 구부러진 등 힘껏 떠밀고 나는 어둠으로 꽉 찬 통로를 달려간다. 눈과 귀를 틀어막고 입에 물고 있던 무수한 칼 쨍강쨍강 뱉어내며. 팽팽하게 당겨진 검은 피륙의 시간을 찌익 가르며 열차는 광폭하게 달린다.

-「手」전문


일상적인 장면으로부터 시작되는 시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풍경들에서 불편함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지하철에서 문득 손 내미는 노파, 은행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은 떠돌이 여자, 뭉툭하게 잘린 세 손가락을 지닌 열쇠공 등 어느 날 문득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장면들에서 이기성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이 벌리고 있는 틈새를 엿본다. 이 틈새는 노파의 ‘불쑥 내민 손’과 같이 생생한 폭력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기성이 그려내는 사람들은 이렇듯 세계의 외곽에서 불편하게 존재하며, 기괴한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이 ‘외곽의 불편한 존재들’은 그러나 단일한 구도 속에 가두어지지 않으며 자유롭게 분절되고 전환된 시공간 속에서 공포와 황홀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통로의 저편 감시 카메라 둥그런 눈이 두리번거리며 허공을 빨아당기기 시작할 때, 흰 페인트로 칠해진 광막한 시간이 펄럭이고 아, 나는 황홀한 아이였군요. 훔친 사탕을 움켜쥐고 비좁은 통로를 마구 내달리던 나는,

검은 미역처럼 미끌거리는 시간이 귓속을 흘러가고, 거대한 손아귀 따라와 머리채를 휘어잡을 듯한데. 검은 스커트 휘날리며 나는 마구 달리고 있었군요. 힐끔거리며 비켜서는 저 벽은 비극적인 텍스트처럼 잔뜩 굳어 있고요.

젖은 비린내는 브래지어 속까지 따라오고, 지금 내 혓바닥 위에서 천천히 녹고 있는 건 어떤 기억의 순간인가요. 나는 시간의 주름을 활짝 펼쳤죠. 빨강 보라 주황의 투명한 사탕들이 좌르륵 바닥에 흩어지고,

이렇게 달고 끈끈한 시간이 녹아내리는 동안, 벌건 손자국이 찍힌 뺨 위로 카메라는 스르르 돌아가고. 차가운 손은 조용히 스커트를 들추고 저, 저, 흰벽은 아득히 멀어지는데……

-「흰벽 속으로」 전문


이기성은 이 첫 시집에서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을 그려내려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풍경 안에서 낯설고 불편한 존재들은 어두운 마을의 전설(「마을」)이 되기도 하며 천 개의 눈을 가진 ‘제국’(「산책」) 속에서 몽환적으로 그려진 우화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낯선 풍경은 꼼꼼히 기록된 객관적인 현실로서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이 풍경들을 들여다보며 몹시 낯설어하고 불편해하는 그 순간 이 풍경의 바깥은 없으며 저마다 고통을 머금고 한없이 떠도는 낯선 자로서, 시집에 촘촘히 들어박힌 공허와 고독을 나누어 갖고 있음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가등의 그림자 어두운 길 한쪽 무심히 비추고 있다.
조금전 사내의 차가 쿵 하며 벽돌담을 들이박았고
아직 말끔히 닦여지지 않은 끈적한 흔적은
사내의 머릿속을 채운 채 응고되었던
권태가 허공으로 흘러나온 것에 불과하다.
담배연기가 산발하며 흩어지듯
그도 길의 끝까지
달려가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스펀지를 두드리듯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머리가 박살났을 때
누구도 들여다볼 수 없었던
무성한 숲처럼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
헤치고 검은 살쾡이 한 마리
번개처럼 튀어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걸,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견인차가 끌고 가는 차의 번호판을
무심히 읽으며 길가의 은행나무는
그가 마지막 부른 이름을
무성한 노란잎으로 바꾸어 달고 있다.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전문

저자 및 역자 소개

이기성
시인 이기성은 196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이화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98년 『문학과사회』에 시 「지하도 입구에서」「우포늪」「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열정
고독
마을
입구
열쇠
일요일

동물원

산책
일식
휴일
제야
누에가 노래한다
모란시장에서
복수
소행성 에로스에 대하여
홍수

제2부



장미원

흰벽 속으로
축제
연등
나팔
미궁
만남
구름의 창
신촌에서 원숭이를 보았네
2월
저녁식사
불운
동물원 2
부엌
어떤 풍경
골목

제3부

소풍
고독 2
소풍 2
북어를 일별(一瞥)하다
모독
꽃집 여자
푸른 슬리퍼
정오
송년파티
소문
광장
얼굴
첫 페이지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간 사람
저녁
횡단보도
슬픔
공원

제4부

몰락
분홍신을 추억함
귀환
어떤 강
희망
구두를 버리다
아귀

어항
내가 본 것
새점을 치는 노인
우포늪
지하도 입구에서
십이월의 書架
늪 2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

▨ 해설·고독의 유물론·이광호

보도 자료

[앞날개 소개글]

시집 『불쑥 내민 손』은 죽음과 부패로 얼룩진 도시의 풍경와 그곳의 삶에 대해서 꼼꼼하게 기록한다. 기록한다고 했지만, 보이는 것만을 그리지 않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이면을 통해 세계의 실상을 통렬하게 쏟아낸다. 묘사와 진술이 기묘하게 섞인 이 시들은 매끄러운 리듬으로 흐르면서도 곳곳에 날카로운 비판의 광채를 숨기고 있다. 이 산문시들을 읽는 즐거움은 묘사의 독창성과 새로움을 넘어, 예기치 않은 비관의 열정을 넘어, 산문시에서만 빚어낼 수 있는 독특한 문맥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바로 세계와 삶의 동형의 구조를 시가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말]

염천(炎天)을 이고 걷는다.
추억할 만한 슬픔도 없는데
몸의 구멍마다
이상한 울음이 자꾸 쏟아진다.
벗이여,
나는 봉인되고 싶다.

2004년 10월
이기성

[시인이 쓰는 산문]

모니터에 붙어 있던 파리 한 마리가 이리저리 몸을 튼다. 검은 허구의 문자를 죄다 빨아먹으려는 듯 갈급한 놈의 방황이 자판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게 한다. 총총히 흩어진 문자들 그러모아 사라진 별자리를 다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백지 위에 뚝뚝 떨어지는 시간의 검은 즙액을 빨아먹으며 누추한 혀는 더듬거리고 나는 모니터의 허공에 뿌연 안개처럼 펼쳐진 폭력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를테면 병원의 구내식당에서 흰 달걀을 내밀던 어떤 손. 늙은 환자의 동공에 잠긴 끈질긴 물음처럼 불쑥 내밀어진 손은, 생생하게 폭력적이다. 느닷없이 생의 발목을 낚아채는 그 텅 빈 손에 맨 처음 담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플라스틱 식판에 놓인 껍질 벗겨진 달걀을 내려다본다. 미지근하고 눅눅한 시(詩)처럼 그것은 내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영원히 그걸 삼킬 수 없을 거다. 그리고 이 차갑고 뻣뻣한 손가락으로 쓸 수 없었던, 쓰여질 수 없었던 창백한 별자리를 그리워한다.

 

출처,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