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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수 시모음

휘수 Hwisu 2006. 7. 25. 12:43

윤희수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드라이플라워] 와 [풍경의 틈]이 있다.


그 집


늙은 감나무 두 그루 서서
꽁지가 붉은 바람과 놀다가
햇살을 뒤집어 슬레이트 처마에
그늘을 깁고 있는

 

항상 거기서 끊어져
그림자에 갇혀 주저앉는
길과 발자국 깊은 붉은 마당

 

시간을 걸어온 놀빛들
감잎마다 등불을 달고
하루살이, 불나방들
불빛이 구원이었을까
빛살을 거슬러 가르는
두려움 없는,
어둠 속 그 단정한
둥글고 차가운 기억과
불빛에 푸른색 수맥이 눅눅한 벽

 

잠 속의, 표정 없는
붉은 바람과
낮고 익숙한 소리로 부르는
푸른 눈언저리
어디쯤

 

날벌레들만 알을 만드는
신기루같은
묵은 집


어디로 가시나요

 

 갯여 그늘에, 빛살 버려져 있다. 꿈을 팔까요. 자갈돌들 바다에 머리 박고 몸을 떤다. 동백숲 아래 물결소리 요란하다. 젊은 바람 맞으며 물결 속에서 간지럽게 불켜는 산다화. 한 여자가 머리풀고 꽃빛 옷자락 바람에 날린다. 새벽마다 옷 벗는 소리 해초들 수런수런 엿본다. 늙은 사내가 젖은 눈썹으로 기웃거린다. 정오의 물살 바쁘게 섬어귀를 빠져 나간다.
 해변을 헤매는 늙은 영혼의 헝클은 머리 위로
 달아나는 시간
 새벽에서 정오까지 멈추어 있다
 확대 복사기 속에 갇힌 꿈들
 반복적 리듬으로 시간을 토해낸다 조용히
 꽃 피는 동백섬에 산다화

 

 어디로 가시나요 어디로 가시나요

 

 빛살에 붉은 꿈 바래고 있었다
 새벽에서 정오까지 시간이 바래고 있었다


오래된 걸음

 

풍문으로 젖은 기억에 빠져있다
무엇을 얻어내겠다는 것인지
반다지 속의 낡은
사진과 명주옷 헤집고 있다

젖어 비린내나는 얼룩들이
맨살의 언어들로 고개 치켜들고
속절없는 년, 속절없는 년,
중얼거렸다

낡은 것은 기리운 법이야
오래된 걸음들 꺼내고 다둑이며
기억의 뒷축은 닳아
빚을 갚는다

마른 풀잎 같던
때때로 희망은 짐이던
생애가 첨벙 첨벙
봄을 가로질러 오다
기억의 매듭 뒤뜰
목련 가지에
표정들이 궤양처럼 목을 꺾는다


슬픈 시 읽는다

 

슬픈 시 읽는다
바람 없는 길 따라 누운 풀섶 읽는다
서너 번째 만났을 사랑 읽는다
나보다 먼저 떠난 네가
火刑臺에서 싹 트고 꽃 핌 읽는다
불길 지피는 내 살갗 거느리고
나의 눈에 박히는 용가시찔레
나도 네 뒤 따라 대 위로 올라야 함
읽는다 문득 뒤돌아 보는
또 다른 슬픈 눈이 슬픈 시 읽는다


추락한다

 

낮은 담벼락에 기대어 아이는 꽃술을 세고 있다
기름종이 루핑지붕 위 햇볕 추락한다
팽이꽃 고개를 들고 순종한다
송편나무 벽틈새에 버들바구미 묻어 있다
그 고정된 숫자 바람이 흔들어댄다
창틀 안에 먼 산은 먼 산으로 서 있다
아이는 셈을 훼방당하며 하나씩 분해한다
딱 딱 손뼉치는 손아귀 바람이 잡혀있다
숨차게 바라보는 새들이 꽁지를 감추고 긴장한다
운동장을 지나 들길로 나서는 산자락이 늦은 안개에 걸려있다
순간 터지는 아이의 기침
유리창에 갖힌 놀 깨지고 산이 얼른 고개를 처박고 있다
놀의 파편 날카롭게 팽이꽃 목 꺾인다


빈 풍경


장마 지난 잡초들
우수수 몸 세우다
여름내 비워둔
빈 풍경
비 사이에서 자리다툼하다

마음 무거운
자주꽃괭이
떨리는 몸으로
오래도록 훔쳐 심은
표정들
그 집 입구에 그득하다

 

2005 한국시인협회 사화집 원고


정류장은 비었네


텅, 텅 비었네
숙소 없는 여행자들 거리로 떠나고
숨지는 불빛 위해
모닥불 지피네

가슴이 뚫린 길가의 빈집들
무거운 눈 내려
무거운 발걸음으로 나는
정류장에 떠있네

철커덕 소리 울리고
목까지 숨찬 벌레들
식은 난로 연통 틈에
관절 다독이며
지친 내 눈꺼풀 위로 슬며시 다가와
불씨를 모닥불에 묻어두었네

흰 언덕이 보이는 정류장에서
입김으로 차가운 손을 녹이며,
우리들의 집은 왜 따뜻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집은 왜 오래 머무를 수 없을까

정류장 다시 비고
뒤달려온 사람들
눈 덮힌 길 따라 사라진
버스 뒤에서
이젠 그리움이지, 가슴에 바람 품었네
흰 눈 같은 것 흰 집 같은 것 품었네

아무 것 아닌 것
언제인지
오오래 전부터
집 품었네 
 

현대시학. 2004. 10.


어쩌면 미열일지도

 

앵초꽃 이마 짚네
둥글게 부푼 흉터 몇 개 
토라져 있었네 아무런 기척 없네
마당에 놀던 햇살,
가까이 다가서고
앞서 지나던 구름 몇 개, 안간힘으로
토라진 마음 쓰다듬네

 

한 치 혹은 반 치쯤 흔들린다고
치렁치렁 옷자락 끌며 맑게 웃네
기척 없었네 몸을 찌르는
꽃그늘, 발걸음 무겁네
이러할까 사랑이었을까
어쩌면 미열일지도
바람에 이리저리 젖다가
아직도 토라진 표정으로
뒷뜰로 숨어든 흔적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