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윤준경 시모음

휘수 Hwisu 2006. 8. 22. 02:30

경기도 양주 출생
서라벌예대 방송과 졸업
서울방송통신대 교육학과 졸업
1994년『한맥문학』신인상 수상
우이동시낭송회 회원

시집 <나 그래도 꽤 괜찮은 여잡니다 > 1999년 우이동사람들

 

노끈  


어둑한 사랑채에서 할아버지는 노끈을 꼬고 계셨다

잘 다녀오너라 하실 때에도 잘 다녀왔니 하실 때에도

긴 가래를 목으로 넘기시며 노끈을 꼬셨다

노끈은 길게 이어져 둥근 타래를 만들며

구부러진 시렁 위에서 아무의 눈길도 받지 않았다

할머니는 이따금 아무짝에 쓸모 없는 짓이라고 투정을 하셨고

그런데 어느 날은 "노끈이나 꼬시구려" 하며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부추기셨다

나는 노끈 없는 할아버지를 상상할 수 없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할아버지는 노끈을 꼬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없고 노끈만 있었다.


리원에서 

 

당신 닮은 아기 하나 낳고 싶다

열달 무겁던 몸을 풀고

뜨신 아랫목에 허리를 지지며

팔팔 끓는 미역국에 혀를 데이고 싶다 

 

꿈같이 노곤한 삼칠일

오직 아기에게 눈 맞추고

불어오르는 젖으로

아기를 재우는

살결 보드라운 엄마이고 싶다

 

당신 닮은 아기 하나

비바람 눈보라 다 막아

당신보다 더 용감하게

더 크게 키우겠노라

그 여린 귀에 속삭이

젊고 당찬 엄마이고 싶다

 

 

어머니는 밥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밥 먹었니?
밥 먹어라
더 먹어라

갖은 나물에 더운 국
뜨거운 밥 한 그릇 듬뿍
먹이시는 일 뿐
남자나 사랑 따위는
당초에 모르시는 분이었다

치매 걸려
세상일 다 잊으신 뒤에도
잊지 않으시던 말, 밥
밥 먹고 가라

언제부턴가 나도
밥밖에 모르는 여자가 되었다

아들 딸 며느리 불러놓고                                                       
밥 먹어라할 때에
양양한 목소리
열사날에 한번쯤
목을대 빳빳이 일어서는
밥심

 시인의 연금軟禁

 

 가수 Y군이 나타나려하자 수많은 카메라맨들이 취재경쟁을 벌이느라 공항은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고 바리케이트를 친 팬들 때문에 Y군은 도저히 발을 뗄 수 없는 상황,
 경호원에 이끌려 힘겹게 사람의 터널을 뚫고 나오지만 그의 발이 닿는 곳은 어디나 人山이다.

 

 뉴스의 초점에 한 시인이 서있다
 그분의 한마디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들은 몸을 던져 싸움을 벌이고
 그분의 얼굴 한번 보기 위해 밤을 새며 기다린 수많은 팬과 문학도들,
 때문에 그의 작은 키는 人海에 묻혀 보이지 않고
 그의 옷은 하마터면 찢어질 뻔.

 마침내 그는 가택연금된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교통을 마비시킬 우려가 크므로 당신의 인기가 떨어질 때까지 외출을 삼가하시오'
(부질없는 상상이다.)

                                                                         

11월의 어머니  

 

11월 들판에
빈 옥수숫대를 보면 나는
다가가 절하고 싶습니다
줄줄이 업어 기른 자식들 다 떠나고
속이 허한 어머니

큰애야, 고르게 돋아난 이빨로
어디 가서 차진 양식이 되었느냐
작은애야, 부실한 몸으로
누구의 기분 좋은 튀밥이 되었느냐
둘째야, 넌 단단히 익어서
가문의 대를 이을 씨앗이 되었느냐

11월의 바람을 몸으로 끌어안고
들판을 지키는 옥수숫대

날마다 부뚜막에 밥 한 그릇 떠놓으시고
뚜껑에 맺힌 눈물로
집 나간 아들 소식을 들으시며
죽어도 예서 죽는다 뿌리에 힘을 주는
11월 들판의 강한 어머니들에게
나는 오늘도 절하고 돌아옵니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