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택 시모음
2001 문학사상
문화예술마을 헤이리사무국
신파
때로는 삼류 쪽으로 에돌아야 인생이 신파스러워
신신파스처럼 욱신욱신 열이 난다
순정을 척 떼어내자 소나기가 내리고
일제히 귓속의 맨홀로 고백이 휘감겨 들어간다
청춘에서 청춘까지 비릿한 것이 많아서
비밀의 수위에는 밤들이 넘치고 편지들이 떠다닌다
뜨거운 이마에 잠시라도 머물 것 같은 입술,
알싸한 그 접착을 지금도 맹세한다
내내 뜨거울 것, 그리고 내내 얼얼할 것
신파란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눈물을 쏟는 것이므로
누군가 나의 눈으로 너를 본다 오래도록,
우리의 날들이 철 지난 전단지처럼 붙어 있다
아직도, 열이난다
외출
햇볕이 유리창에 착 달라붙어
화한 온기가 전해지는 아침,
노인이 무릎을 들여다본다
약상자 속 파스 다발이
고무줄에 묶여 솔솔 냄새를 풍긴다
우표 한 장으로 편지가 배달되듯
파스 한 장의 힘으로
가뿐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아름다운 그녀를 위해
그리움을 봉하고 몸에
우표를 붙였으리라
중절모 쓰고 지팡이 짚고
대일파스 후끈후끈하게
붙은 봄날, 환한 골목에서
노인이 걸어나오고 있다
저녁의 질감
새들은 아무도 기약하지 않는 곳에 날아가 빈집을 낳는다
침목의 결이 커튼처럼 역과 역에 접히면 민박집 창이
열렸다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날의 연한을 모르는 낙서와 같은 고백이
빈방에 남아 시들어가는 노을을 걸어둔다
수첩 속에는 휘청거리는 문장들이 닻을 내리고
저녁의 심지 같은 쓸쓸한 몽상만이 끝없이 흔들린다
가까이 만지기 우해 손 내미는 회색 테트라포드,
삐죽삐죽한 새벽이 부서지고 또 부서져도 나는
내 빈틈으로 드나들던 슬픔을 알지 못한다
등대는 하얀 기둥을 열었다 닫으며
물결에 열주를 드리운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그림자들이 조난신호처럼 불빛을 축조하는 밤
나는 심해로 가라앉는 피아노를 생각한다
검은 건반의 음은 더 이상 항해하지 않는다
썰물이 휩쓸고 간 해변에 장갑이 떠밀려가고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은유가 운명처럼
나를 데려간다고 믿는다
안개가 꿈꾸는 부두 너머 길이 있고
가보지 못한 날이 열려 있는 가방이 있다
모든 길이 사라진 저편, 맹렬하게 소멸해가고 있는
한 점은 다시 누군가의 눈目이 될 것이다
안부
밖은 파랗고 생각은 굴참나무 밑입니다 하루가 쓸쓸한 어느
간이역이어서 차를 세우고 풍경이 차창을 내립니다 설핏 스치
면 그새 저녁놀입니다 어둑해지는 사위 속에서 붉은 신호등만
바라봅니다 기다리는 시간, 그 짧은 순간이 일생이라면 어떨까
요 기억이 가지는 섬세한 숨소리를 생각합니다 늘 쉼 쉬고 있
음에도 깨닫지 못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 숨이 턱 막히며 그 기
억의 한 가운데 몸을 데려가 놓곤 하지요. 그러니 세월은 여러
개의 기다림을 잇대어 누빈 피륙만 같습니다 결국 밤은 낮을
데리고 새벽에 한 번 더 여행을 떠납니다 꿈은 삶을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꿈으로 환기되기 위해서 마련해놓은 시간이
아닌지요 감정의, 격정의 끝점에서 세상은 잠시 멈추고, 저녁
해가 느리게 그 호흡을 끌어당깁니다 이렇게 자판이 나를 앞서
갑니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릇에 관하여
애야, 그릇은 담아내는 것보다
비워내는 것이 인생살이란다
어머니의 손은 젖을 대로 젖어서
좀처럼 마를 것 같지 않다
젖은 손을 맞잡고 문득 펴 보았을 때
빈 손바닥 강줄기로 흐르는 손금
긴 여행인 듯 패여 왔구나
접시들은 더러움을 나눠 가지며
조금씩 깨끗해진다
헹궈낸 접시를 마른 행주로 닦아내는
어머니의 잔손질, 햇살도 꺾여
차곡차곡 접시에 쌓인다
왜 어머니는 오래된 그릇을 버리지 못했을까
환한 잇몸의 그릇들
총총히 포개진다
나도 저 그릇처럼 닦아졌던가
말없이 어머니는 눈물 같은 물기만
정성스레 닦아낸다
그릇 하나 깨끗하게 찬장으로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