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유홍준 시모음

휘수 Hwisu 2006. 7. 31. 01:25

1962년 경남 산청에서 출생했으며

1998년 <시와반시> 로 등단

2004년 실천문학사에서 첫시집 <상가에 모인 구두들>을 발표

                                                          
깊은 발자국


봄가뭄 보름에 그만

물 가둬놓은 못자리, 논바닥이 때글때글 말랐다

못자리 만든다고 내 맨발이 딛고 다닌 발자국 옴폭한 곳에

올챙이 새끼들이

오골오골 말라죽었다

아! 내 몸뚱어리 무게를 싣고 다녔던 발자국 속이

저 올챙이들의 生死가 걸린

궁지였다니,

울음으로 밤 하나 새워보지도 못한 저것들이

떡잎 같은 발꿈치 여린 울대 더 이상 적시지 못하고

죽어 갔다니,

봄가뭄 보름 끝에 기어이

후드득 비가 듣는다 금방, 깊은 발자국 속을 채운다

반갑다 어미개구리 哭소리......

봄가뭄 보름이 저 울대 저렇듯 맑게 단련시켜 놓다니,

바람 자는 내일 아침이면 무논 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백로처럼

죽음이 지나간 물 속의 내 발자국

물끄러미 들여다 볼 수 있겠다

무논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백로가

내 발자국 속의 주검 집어 올려 삼키는 것, 볼 수 있겠다


계간 <시와시학> 2000년 여름호

 

저울의 귀환    
 
쇠고기 한 근을 샀다
하얀 목장갑 낀 정육점 여자의 손이
손에 익은 한 근의 무게를 베어 저울 위에 얹었다
주검의 一部를 받아 안은
저울바늘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저울이
내게 물었다 인간들의 약속이란 고작
이 한 근의 무게가 모자란다고 보태거나 넘친다고 떼어내는 것?
맞아 저 쪽 봉우리에서 더 먼 저쪽 봉우리로
주먹만한 고깃덩어리들이 고단한 날개를 저어 날아가는 황혼녘
국거리 쇠고기 한 근 담아 들고
부스럭대는 비닐봉지 흔들며 늙은 어머니를 찾아가면
저울을 떨게 만든 이 한 뭉텅이 주검의 무게가
왜 이렇게 가벼운가 문득
저울대가 된 나의 팔이여
모든 것을 들어냈을 때 비로소 평안을 얻는
빈 저울의 침묵이여 나는 제로에서 출발한 커다란 고깃덩어리
주검을 다는 저울 위에 올라가 보고서야 겨우
제 몸뚱어리 무게를 아는 백열 근 짜리
四肢 덜렁거리는人肉
 
 반달

 

 또 야근인가, 상평공단 굴뚝 위의 저 반달 천날만날 그 옷이 그 옷인 저 반달 검은 작업복 반달 낡은 주전자 들고 느릿느릿 물 뜨러 갔다오는, 동서산업 경비아저씨 같은 반달 이제는 별 쓸모 없는 눈칫밥, 장기근속자 같은 반달 피부병 걸린 반달 아끼고 또 아껴 겨우 몇 푼 모아놓으면, 먹구름 같은 우환이 찾아와 홀라당 앗아가는 반달 썩을 놈의 세상, 이러나 저러니 안 되는 놈은 안 되는 반달 산업재해 입은 반달 그래도 고단할 땐 한숨이라도 되게 한 번 몰아 쉬는 게 힘이지 아암, 아암 오늘도 반대가리짜리* 야간잔업 나가는 반달 아무 생각 없이 떴다가 지는 반달 상평공단 굴뚝 위의 저 반달

이제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해버린 늙은 근로자 같은 반달


*반대가리짜리, 하루 여덟 시간 근무의 절반인 네 시간 잔업을 근로자들은 이렇게 부른다.


안경

 

이런
너는 두 다리를
귀에다 걸치고 있구나 아직
한 번도 어디를 걸어가 본 적이 없는 다리여
그러나 가야할 곳의 풍경을 다 알아서 지겨운 다리여
그렇구나 눈(目)의 발은
귀에다 걸치는 것
깊고 어두운 네 귓속
귀머거리 벌레 한 마리가
발이란 발을 모두 끌어 모으고 웅크리고 있구나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보고 듣는다는 것의 고역이여
얼마나 허우적거렸기에 너는
눈에서 귀로 발을 걸치는 법을 배웠을까
콧등 훌쩍이는 이 터무니없는 생각들
콧등 아래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이 형편없는 나의
眼目들

 

直放 


아아 이 두통 지금
나에겐 직방으로 듣는 약이 필요하다

 

그렇다 얼마나 간절히 직방을 원했던지
오늘 낮에 나는 하마터면 자동차 핸들을 꺾지 않아
직방으로 절벽에 떨어져 죽을 뻔했다

 

직방으로 骨로 갈 뻔했다

 

오, 직방으로

 

다가오는 연애, 쏟아져 내리는
눈물, 폭포

 

안다, 미친 자만이 직방으로 뛰어간다

 

십오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날린 直放人처럼
바닥 밑의 바닥, 과녁 뒤의 과녁을 향해 뛰어내리고 있는

 

이렇게 40년 동안을 뛰어내리고 있는  나는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