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유정이 시모음

휘수 Hwisu 2006. 9. 19. 00:13

 1963년 천안 출생
 1986년 홍익대학교 국어교육학과 졸업
 1993년 월간 <현대시학> 신인상 당선 
 석사학위논문 <전봉건 시연구- 전쟁체험시를 중심으로> 
 시집 <내가 사랑한 도둑> 
 현재 동국대학교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침

 2002년  <동화 읽은 가족>으로 푸른문학상 수상
 2003년 동화집 < 이젠 비밀이 아니야>

 현재 홍익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로 재직

 

이름들·3 

             - 슬픔

 

슬픔은 내 기둥서방
끝이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저,
깜깜한 거리에
붉은 등 주욱
내다 걸어 놓고
내 위독한 혼을 팔지요

 

거칠게 몰아세우는
그 거리의 바람에게
내 마음 날마다 거칠게 벗겨지고
언제나 다 헤진,
허청거리는 몸으로
그의 거처에 들어서면

 

세상에 흠씬
매맞고 돌아오는 나를
씻기는 남자
슬픔은 끝내
버리고 달아날 수 없는
내 오랜 정부(情婦)이지요
지상에는 없는 순결을
날마다 묻어두고 나오는
푸른 내 유곽의 남자이지요

                    

불혹

 

길바닥에 엎어졌는데
생각해보니 마흔이었다
일어서서 가야할 시간인데
둘러보니 부엌이었다
밥물은 끓어 넘치고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는 열쇠가 없어
울고 서 있었다. 생각을
일으켜야겠는데 줄곧
오래 입은 옷들이
발을 걸었다. 호호호
내가 네 엄마가 맞단다
어서 문을 열어주렴 꽁꽁 닫힌
문 속으로도 언제나 불쑥
들어와 있던 엄마가
베란다 바깥 허공을
따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엄마를 붙잡아야겠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내 소리를 파먹은 게
분명해 거실에 넘어졌는데
부엌이었다. 밥물은 끓어 넘치고
오래 입은 옷이 열쇠를 흔들며
호호호 웃고 있었다. 그에게서
더는 편지가 오지 않는다. 돌아보니
마흔이었다.

<미발표작>

 

개미

 

개미에게는 개미의 생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생이 있다
반나절 개미의 생을
게으르게 내려다 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으로
흘금 흘금 드나드는 개미의 하루를
느린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개미의 종교가 궁금하다
개미의 학교 개미의 슈퍼마켓
개미의 부업
개미의 비애가 궁금하다
개미처럼 걸어서 식당에 가고 싶은 날
개미처럼 작은 구멍에 집을 짓고 싶은 날
개미같이 작아진 생각으로 웅크리면
정말 개미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날

        

밤바다에, 거룻배가 떠 있다

 

새벽 네 시 깜깜한 바다 위에
드문드문 불을 켠 거룻배 몇 척
얼룩처럼 떠 있다. 배에게는
파도의 갈피가 모두
벼랑이었을 것이다. 벼랑마다
환하게 핀 꽃 거룻배는 
제 처소에 들지 못하고
검은 그림자로 밤바다를
기웃거린다. 바다가 긁어 놓은,
딱지 앉은 상처 같다

그는 날마다 나를 가려워했다
언제나 날이 선 손톱으로 나를
벅벅, 긁어댔다


後景으로 하르르 떠 있던
나는 내가 누군가의
가려움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었다
뿌리 내리고
꽃이 피었던 기억도 없는데
열매를 가진 기억은 더욱 없는데
벌써 내가 아, 너무 딱딱하다

                                  

 
한 때의 그는 담배를 피우며
내 생의 봄볕을 종일
쬐다 갔네. 그가 존재하는 힘으로
화들짝 열려 있던 날들
온통 나를 열어젖히고 바라보던
구름 없는 하늘,
살구꽃, 새끼를 업은 비비새여

 

그는 언제나 소리가 많이 나는
신발을 질질 끌고 왔네
그러므로 그가 돌아가는 길
내 마음 얼마쯤
그 소리에 질질 끌려가다
돌아오곤 했다네

 

얼마나 흐른 것일까
그를 향해 열어놓은 창의 시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마음이 있어
나를 쾅쾅 닫아걸 수 없었네
외출 하거나 깜빡
낮잠에 빠질 수도 없었네
반쯤 닫힌 창으로 보이던
샌들을 신은 여자들과
비 맞는 옥수수, 긴 뱃고동
장항의 흑빛 어둠이여. 나여

 

지루한 사랑을 견디느니
아찔한 허방을 클릭하자
잘못된 연산을 수행하여 부디
복구가 불가능해지자
정말 삭제하시겠습니까?
예, 아니오 사이를 머뭇거리는
그의 마음을 빠르게 덮어쓰고
기꺼이 삭제된
창이 되자 나여
까만 커튼 뒤집어쓴
빈 화면의 나여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