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위선환 시모음

휘수 Hwisu 2006. 10. 10. 12:04

1941년 전남 장흥 출생
1960년 용아문학상 수상으로 작품활동 시작
1970년 이후 30년간 시를 끊음
2001년 <현대시> 9월호에 <교외에서> 외 2편 발표하면서 다시 시쓰기 시작

2001년 첫시집 <나무들이 강을 건너갔다>

2003년 <눈덮인 하늘에서 넘어지다>                                                                                  

                                                                                          

모퉁이

 

 모퉁이는 쓸쓸하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쓸쓸하고, 모퉁이를 돌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이 쓸쓸하다. 어느 날은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는 내가 쓸쓸하다. 아침부터 걸었고, 날 저물었고, 이내 깜깜해졌고, 긴 하루 내내 모퉁이에 부딪치고 쓸린 나의 모퉁이 쪽이 허물어지더니, 모퉁이가 드나들게 파였는데, 모퉁이만 하게 비고, 빈 모퉁이처럼 쓸쓸한데, 나는 더듬대며 아직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모퉁이 쪽 빈 옆구리가 한 움큼씩 무너지고, 무너지는 모퉁이 쪽으로 내가 자꾸 꺾이고, 어디쯤일지, 언제쯤일지, 모퉁이는 끝 간 데 없고  

 

빈소리

 

 襄陽의, 法水峙로 더듬어 들어가는 골짝에 가면 너왓장 틈새로 하늘이 바라 뵈는
 한 찻집이 있다
 몸집 큰 개를 가리키며 물었더니 이미 주인과 손님을 나누어 보지 않았다 하고, 또 대답하기를
 짖는 짓도 그만 두었다 한다

 

개 짖는 소리마저 그친 골짝은 오직
적막했을 것이다 이따금씩 쩌르렁, 저 혼자 울었을 것이다 잔 이슬이 내리고 젖어서 척척해졌다가는
어느 새인지 마르곤 했을, 젖으면서 마르면서 조금씩 야위었을
이 골짝에, 아직은
시름이 골 깊을 것이다 와서, 못 떠나고 머무는 이유다 약도 못 쓰고 며칠째 앓는다

 

개는 맨 먼저 눈을 감았고
주둥이를 잠갔고
들을 일 없다, 귀를 덮었다
허리를 길게 늘여 땅바닥에 깔고는 앞발을 모아서 턱을 얹었다
그리고는, 내내 조용하다

 

갈참나무 몇 그루가 헐벗더니 마당에 묵은 잎이 한 불 깔린다 내다보며 찻잔을 비운 뒤에
개에게로 걸어가서
개의 눈가죽을 연다 텅,
눈 속이 비었다
그동안 버려둔 주둥이 속과 귓속 사정은 또 어떨는지
이빨들은 넘어져서 나뒹굴고 귀청은 찢겨서 널려 있고...., 그렇게 휑하지 않겠는지
낱낱이 받아 쓴 글귀 한 줄을 접어서, 품는다

 

뒷산 그림자가 처마 끝을 덮었다 설핏하게 햇살이 얇아졌는데 두 번을 더 불러도 안 들리는 듯
주인은, 사립 밖 멀리까지 길을 쓸고 있다

 

양양의,
외지고 좁고 여러 번 막히더니 겨우 트인 골짝 안에, 길을 가다 쉬다 그만 아랫몸을 부린 듯이
한 찻집이 주저앉아 있다
앞 뒷산이 그늘을 겹쳐서 금방 어둡고 급하게 땅거미가 내려서 골바닥에 누운 굵은 돌들이 검어질 때
굽으며 깊어지며 한 번 더 굽는 골짝을 따라 서너 구비 더 굽어 들어간 거기 어디쯤에서
컹,
컹,
개가 짖는가 싶다

 

소록도(小鹿島)

 

 문둥이는 발가락이 없었다 딛어도 자국이 찍히지 않았다


 어느 날은 문득 죽어 있었다 발등에다 고무신을 신겨 보냈다 신짝 끄는 소리가 여러 날 들렸다


 지금은 어디쯤을 걸어가고 있는지, 거기까지 걷기는 걷겠는지, 거기서는 발가락이 자라는지, 한 문둥이가 내게 물었다 목덜미에 손바닥만한 반문(班紋)이 보였다


 그 사이 바다가 썰물 했다 개펄에 돌멩이들이 흩어져 있었다


 손가락이 또 한 개 떨어졌다고, 집어 들고 나가서 손수 파고 묻었다고, 짚어도 자국이 찍히지 않는다고....,


 멀리서 길게 뻐꾹새가 울었다 한동안 그쳤다가 지금 또 운다


 나루에 문둥이가 오래 서 있었다 그 섬이 늘 등 뒤에 있다

 

새떼를 베끼다


 새떼가 오가는 철이라고 쓴다. 새떼 하나는 날아오고 새떼 하나는 날아간다고, 거기가 공중이다, 라고 쓴다.


 두 새떼가 마주보고 날아서, 곧장 맞부닥뜨려서, 부리를, 이마를, 가슴뼈를, 죽지를 부딪친다고 쓴다.


 맞부딪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 날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다본다고 쓴다.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 구멍 난 새 한 마리 없고, 살점 하나, 잔뼈 한 조각, 날개깃 한 개, 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 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 빈 몸들끼리 뚫렸다고, 그러므로 공중이다, 라고 쓴다.

 

석모도

 

마침내 서쪽에 닿아 비 내리는 서해를 본다 개펄에서 칠게의 굽은 발이 젖고 있다

빗줄기가 내 안으로 들이친다 뼈다귀를 때리며 빗방울들 잘게 튀고 몸 속 곳곳에 웅덩이가 고였다

누군가 철벅대며 등줄기를 밟고 간다

등덜미가 젖던, 춥던 한 사람을 생각한다 여기까지 걸어 왔겠는가 또 걸은 것인가 걱정한다

척척해져서 섬이 웅크리고, 저문다 건너가지 못한 바다에는 아직 비다 
 
화석

 

 지층이 뚝, 잘려나간 해남반도 끝에다 귀를 가져다 대면  느리게 길게 날개 젓는 소리가 들린다. 공룡 여러 마리가 해안에 깔린 너른 바위 바닥에 발목이 빠지면서 물 고인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때는 새가 돌 속을 날았다.

 

                                  시와사람 (2006년 가을호)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