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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시집 읽기]최영철(그림자 호수) / 이시영

휘수 Hwisu 2006. 12. 12. 09:20

[우리 시대의 시집 읽기]최영철(그림자 호수) / 이시영

 

이시영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최영철 시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최영철 시인은 1956년에 태어나서 1986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를 했고 저서로는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야성은 빛나다』, 『일광욕하는 가구』 등이 있으며 작년에 『그림자 호수』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또한 2000년에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한분의 초대 손님이신 비평가 이경호 선생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이경호 선생께서 최영철 시인의 시집을 읽고 느낀 소감을 이야기해주시죠.

 

<두 그루의 나무를 사랑하는 시쓰기>

 

이경호  최영철 시인은 올해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지 20년째를 맞이하는 시인입니다. 시인이 부산에서 발간되었던 부정기간행 문예지 『지평』과 『현실시각』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해가 1984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영철 시인은 부산에서 시인으로의 삶을 시작했고, 1980년대 말부터 몇년 동안 서울에서 문학 출판과 연관된 직장생활을 하다가 1990년대 후반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이제는 그곳에 굳건한 삶의 뿌리를 내리고 그곳의 문학과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전업시인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어려운 경제적 형편을 견뎌내는 데 이골이 나 있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며칠전에 이창동 문화부장관과 문예진흥원에서 기초예술분야 지원책으로 문학분야의 대폭적인 원고료 지원을 공표한 사실은 최영철 시인처럼 시창작 외에 마땅한 경제적 방편을 마련하고 있지 않은 문학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최영철 시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든든하게 해주는 것은 허름하지만 자신의 집을 한 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집 부근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있습니다. 지난 2000년에 펴낸 시집 『일광욕 하는 가구』의 뒤표지에는 그 두 그루의 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내가 사는 부산 양정동 집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푸조나무, 서쪽에는 배롱나무가 있다. 둘 다 수령 오백 년이 넘은 천연기념물이다. 이 나무들과 만나려고 잠잘 때 나는 한번은 오른쪽으로 한번은 왼쪽으로 돌아눕는다. 오래 한쪽만을 보고 있으면 나머지 하나가 저쪽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와 내 등을 툭툭 친다. 겨드랑이에 난 양 날개처럼 그것들은 내가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해준다."

 

이러한 비유적인 고백은 최영철 시인의 시창작에 대한 마음가짐과 시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특징을 밝혀주는 열쇠 역할을 한다고 생각됩니다. 이번에 『창비』에서 펴낸 일곱번째 시집도 어김없이 그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바,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최영철 시인의 시쓰기는 사회의 객관적 현실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담아내는 작업과 소시민적인 일상생활에 대한 반성을 담아내는 작업을 동시에 밀고 나갑니다. 『그림자 호수』라는 시집에서도 시인은 「매향리」로 상징되는 6.25전쟁의 비극과 '구제역 돼지'로 표현되는 농촌생활의 어려움을 사회의 객관적 현실로 담아내는가 하면 「손」이라는 작품에서는 단돈 몇백 원이나 몇천 원밖에 없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다닐 때의 여유로운 마음보다 이제는 "호주머니에 종이돈이 두둑하고/ 알 수 없는 비밀들이 먼저 들어가 진을 쳐버려" "오갈 데 없어진 손이 제 집을 찾지 못해/ 저렇게 허적허적 바깥만" 헤매는 삶의 방황과 허전함을 반성하고 있으며, 「거미」라는 작품에서는 '거미줄'이라는 일상에 갇혀버리면서 "이 세상의 많은 집들을 잃어버"린, 그리고 "집으로 가지 않는 모든 길들을 잃어버"린 소시민의 현실에 안주하는, 타성의 노예가 되어버린 삶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시의 표현에 성의를 다하는 시인>

 

둘째로 그의 시쓰기는 작품에 담을 만한 삶의 내용을 찾아내는 일에도 열심을 보이지만 그 내용을 언어로 잘 다듬어 표현하는 일에도 성의를 게을리 하는 법이 없습니다. 특히 두 번째 사항이야말로 최영철 시인의 시세계를 세상에서 주목하게 만들고 오늘 이 자리에 초대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최영철 시인의 시들이 사회의 객관적인 현실이나 사사로운 일상생활에서 시의 내용으로 삼을 만한 것들을 찾아내는 데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힘겨운 삶을 살아가지만 선량한 이웃들에 대하여 시종일관 견지하려는 따뜻한 시선인 것입니다.

 

초기시에서 시인의 이러한 시선은 시의 내용을 빚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시세계가 표현의 측면보다는 사물에 대한 발견과 관조를 서술하는 쪽에 더 비중이 주어진"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네번째 시집 『야성은 빛나다』 이후로 시인의 작품들은 그러한 시선을 담아낼 비유적 표현들을 찾아내는 데 뛰어난 성취를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영철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에 '백석문학상'이 주어진 것도 그러한 성취에 대한 평가였을 것입니다. 일곱번째 시집에서 그러한 표현들은 한층 원숙해진 모습을 선보입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지적하기가 어렵지만 단편적으로 몇 군데만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해와 별의 비밀」이라는 작품에서는 "밧줄로 낚아내린 둥근 해가 거적에 덮인 채/ 투덜투덜 행상을 따라가고 있었다/ 지금 시간쯤 깜쪽같이 사라지곤 하던 해는/ 알고 보니 저 행상의 짓/ 거적을 조금 들치고 해의 엉덩잇살 기름으로 불을 밝히자/ 해를 잃은 사람들이 하나둘 걸어와 소주를 마셨다"라는 내용에서 포장마차의 카바이드 불빛이나 백열전구가 켜지는 것을 "해의 엉덩잇살 기름으로 불을 밝히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야경」이라는 작품의 "낮 동안 숨기고 있던 시뻘건 눈을 매단 불빛들이/ 지나간다 반짝거리며 한번 신나게 지나갈 때마다/ 인두로 지지듯이 도시의 가랑이가 주욱주욱 찢어진다"에서 꼬리를 무는 차량의 후방 점멸등이 빛나는 모양을 "인두로 지지듯이 도시의 가랑이가 주욱주욱 찢어진다"라고 표현한 것이죠.

 

「고목을 지나며」라는 작품의 "수백 년 향나무의 지그재그 용트림은/ 외간 범부의 등에 업혀 담이라도 넘고 싶어 주리가 틀린/ 주리가 틀려 비명을 내지르다 줄줄이 실려나간/ 사대부의 말년이었습니다"에서 '고궁 후원'의 '오래된 향나무의 뒤틀린 몸'이 신분제도와 유교적 통치질서로부터 탈출하려다 붙잡혀 '주리가 틀린' 양반들의 몸통이라고 표현한 것 등 최영철 시인의 상상력이 반영된 표현들의 참신함은 헤아리기가 만만치 않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모든 시세계의 특징과 성취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치우침이 없으며 스스로의 문학세계를 열어놓고 목소리를 단정하게 가다듬으려는 지속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열정이 문화와 예술의 중앙집권화를 경계할 만한 삶의 자연스러운 실천 속에서 기약되고 있는 점은 또 다른 문학인의 보람이기도 하고 모범이라고 생각됩니다. 스스로의 건강과 가난을 돌아보지 않고 삶의 겸손과 소박을 밑천으로 문학의 열정을 불태우는 시인의 시세계가 시인의 동네에 있는 푸조나무와 배롱나무와 함께 오랫동안 번성하기를 기대합니다.

 

이시영  고맙습니다. 이어서 최영철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의 속도, 시인의 욕망>

 

최영철  힘겨운 8,90년대를 지나 21세기로 왔습니다. 돌이켜보니 80년대는 너무 열정적이었고 90년대는 너무 냉소적이었습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믿음이 너무 한꺼번에 급하게 쏟아져나와 힘들었던 게 80년대라면 90년대는 그걸 또 한꺼번에 걷어차버린 시절이어서 힘이 들었습니다. 우리 문학도 그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주변 상황의 변화에 그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지난 15년여 동안의 침묵과 침체가 너무 깊고 길었습니다. 그 게으름과 직무유기는, 문학의 이름으로 견뎌온 많은 시간들 앞에 분명 부끄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언제 어느 시대에나 문학을 억압하는 요소는 있었고 대중과 권력과 문학은 그다지 화해롭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문학은 대체로 '찬밥' 신세였기 때문에 그 본연의 치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것을 못견뎌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이미 다른 많은 유혹들에 투항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내외의 정치적 상황 변화나 대중의 혼을 앗아가버린 새로운 주류문화에 책임을 돌리기에는 그 전환기를 대처한 우리의 태도가 너무 소극적이었습니다. 신명을 잃어버린 시로부터 독자들이 멀어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서둘러 현실을 포기하고 방기하며 제각각 자기 집안으로 들어가 굳게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지난 월드컵 기간 동안 거리응원에 나섰던 수많은 군중들은 그동안 무언가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90년대식의 문화양식에 식상해 뭔가 다른 진지한 양식을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열망의 일단이 지난 한일 월드컵의 응원열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태극기가 다시 나오고, 진부하기 그지없었던 대한민국을 외치는 군중들의 함성에서 저는 그것을 읽었습니다.

 

우리 이웃들에게는 아직도 함께 하는 것에 대한 뜨거운 신명의 불씨가 있는데 우리는 한동안 거기에 불을 붙여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우리 대부분은 문학으로서는 그 점화력이 약하다고 생각하고 미리 그 일을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앞 시대에도 문학이 전체에 불을 당긴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단지 문학이 당길 수 있는 만큼만 그 불을 당긴 것이었습니다. 다른 문화 양식들이 빠르고 어마어마한 파급력으로 대중을 잠식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너무 의기소침해졌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 그만큼 빨리 소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에 비해 문학은 느리고 미미하지만 오래 점진적일 수 있다는 믿음을 다시 가져봅니다. 문학의 이름으로 주목해야 할 문제들은 아직 그대로 산적해 있고 오히려 그전보다 더 교모하고 다양해졌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느린 걸음으로 변함없는 삶의 진정성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수공업자로서의 시쓰기>

 

우리 동네에 작은 반찬가게가 하나 있습니다. 동네 길목 여기저기 너덧 개는 있었는데 하나둘 문을 닫고 그 집만 남았습니다. 최근에는 인근에 대형할인점까지 생겨 장사가 더 신통찮을 것인데도 그 주인아주머니의 일과는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어느 가게보다 일찍 문을 열고 늦게 문을 닫으며 늘 좁은 가게 한 귀퉁이에서 반찬거리를 다듬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천원짜리 한 장 들고 두부나 콩나물 같은 걸 사러 가는 나에게도 꼭 두 손으로 물건을 건네고 잔돈을 내어주며 고맙다고 허리를 숙여 인사까지 합니다.

 

참 단정하고 고운 그 아주머니의 사는 모습이 고맙고 존경스러워 저는 가끔 대형할인점에서 한보따리 먹을 걸 사가지고 올 때마다 죄 지은 기분이 듭니다. 저는 그 아주머니가 정말 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형할인점과 자신의 처지를 견주지 않고 감사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어쩌다 필요해서 대형할인점에 가는 사람들을 탓하지 않고 웃으며 봐주는 것, 다른 장사에 비해 돈이 되지 않는다고 서둘러 가게를 때려치우지 않는 그 아주머니가 정말 시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아주머니가 손수 키운 콩나물이 먹고 싶을 때, 손수 다듬고 묶어놓은 푸성귀들이 생각날 때 그 아주머니 가게에 갑니다. 오늘의 시인 역시 가끔 찾아오는 그 손님들을 기다리며 정갈한 손작업을 멈추지 않는 수공업자들이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의 시인들 중에는 어울리지도 않게 그 대형할인점 앞에 난전을 벌인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변방의 자리에서 시쓰기>

 

문학의 욕망, 시인과 작가와 비평가의 욕망이 너무 과도한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것이 더 좋은 글을 쓰게 하는 촉매가 된다 할지라도 과도한 문학적 욕망은 결국 시야를 흐리게 하는 독이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저는 변방에 사는 제 자신이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둔재로서의 자기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욕망의 소용돌이가 있는 중심부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얼마전 나태주 시인은 한 강연에서 "시골에서 시 쓰는 마음은 실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적막하고 구슬프고 안타깝고 서러운 마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변방을 떠돈 백석이 그러했고 월든 호숫가에서 살다간 시인 소로도 그러했습니다. 아직 우리가 변방에 있기 때문에, 아직 돈 안되는 시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돈이 망쳐버린 세상은 이렇게 돈 안되는 것들이 치유해 나갈 것입니다. 21세기의 거대한 욕망들과 맞서 버틸 수 있는 힘도 이런 변방에 사는 자의 우직한 희망에서 나오는 힘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의 속도는 그래서 번영과 질주의 고속전철이 아니라 필요할 때는 뒷걸음질도 칠 수 있는 마을버스의 속도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독주'가 아닌 '동행'의 속도입니다.

  

이시영  이번 시집에서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시는 「섬」입니다.

 

"바다 너머 연 날리는 아이들 여럿/ 멀리 가물대는 수평선 너머/ 갈매기는 반가워 끼룩끼룩 이리로 날고/ 파도는 신이 나 넘실넘실 저리로 춤추네/ 은비늘 눈부신 하늘을 타고/ 자꾸만 푸르게 날아간 아이들/ 방패연 가오리연 연줄을 끊어버렸네/ 금방 가벼워진 방패구름 가오리구름/ 수평선 그 어디쯤 내려앉았네/ 바닷가 아이들 날려보낸/ 먼 바다 조각배 몇 점"

 

<리듬의 어원은 '흐른다'는 뜻>

 

고종석에 의하면 "리듬의 그리스어적 어원은 '흐른다'는 뜻"(황인숙 시집 『자명한 산책』의 '해설'에서)이라고 합니다. 3음보와 4음보가 적절히 교차하며 미끄러지듯 자연스런 리듬을 형성하고 있는 이 시는 어느 바닷가 외로운 섬 아이들의 고독이 오롯이 형상화된 수작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러한 '전언'보다도 그냥 리듬으로만 읽어도 흐뭇한 정감을 자아냅니다. 저는 이렇게 이 시를 끊어 읽고 싶습니다. "바다 너머/ 연 날리는/ 아이들 여럿// 멀리/ 가물대는/ 수평선 너머// 갈매기는/ 반가워/ 끼룩끼룩/ 이리로 날고// 파도는/ 신이 나/ 넘실넘실/ 저리로 춤추네// 은비늘/ 눈부신/ 하늘을 타고// 자꾸만/ 푸르게/ 날아간 아이들". 즉 이 시의 운율적 구조는 음절수와 관계없이 이렇게 읽혀집니다. 3음보-3음보-4음보-4음보-3음보-3음보-4음보-4음보-3음보-3음보. 경쾌, 발랄한 3음보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장중, 둔중한 4음보가 엇섞이며 이 시의 율동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 시가 재미있는 것은 3-4행, 그리고 7-8행의 장중하며 느릿한 4음보가 적절한 자리에 그야말로 적확하게 배치되어 아름다운 파격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율격이란 "'자연 언어의 운율적 가능성이 실현되는 추상적 규칙'으로서, 한 문화공동체가 가진 의식적·무의식적 양식"(김흥규)입니다.

 

그러니 저나 여러분의 심저에는 이 3음보의 율동이 어딘지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말하자면 이 율격은 저 향가나 고려가요, 시조 등을 통해 우리 한국인의 가슴 저 깊은 곳에 흐르고 있는 무의식적인 '흐름'인 것입니다. 이 시가 제게 가장 안정감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중견시인 중에 김명수라는 시인이 있는데 그의 시 한편을 여기 적겠습니다. 위의 시와 한번 비교해 읽어보세요. 전혀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그 리듬이 실현되는 규칙이 닮아 어딘지 친숙하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모룩이 피어 있는 보랏빛 엉겅퀴에/ 꿀벌 한 마리 파고들었네/ 손끝으로 건드려도/ 엉겅퀴꽃 속 꿀벌 나오려 하지 않네/ 시켜서 이루어질 리 없는 전일한 합일이여/ 하얀 망초꽃도 그 곁에 피어 있어/ 초여름 햇살조차 내려앉으니/ 나 또한 끼여들 작은 공간이여/ 나 있어 이 산야에 흠이 없다면/ 꽃과 벌 사이의 아늑한 길에/ 오래도록 발 멈춰 나도 서 있네"  

                                           「작은 공간」 전문. (시집 『바다의 눈』, 창작과비평사, 1995)

 

4음보-3음보-2음보-4음보-4음보-4음보-3음보- 3음보-3음보-3음보-3음보. 1∼6행까지는

느린 4음보가 주조를 이루다가 7∼11행은 빠른 3음보가 이어지면서 윗시보다 정돈되고 정형화되어 있으면서도 뒤가 가벼운 경쾌한 리듬감을 산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시 다 우연히 11행입니다.

 

<익살과 여유와 웃음이 빛나는 시>

 

유종호 교수는 어느 문학지와의 대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훌륭한 문학작품은 모두 제가끔의 방식으로 훌륭한 작품으로 존재하고 있다." 문학작품의 존재 방식에 대한 가장 탁월한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영철의 이번 시집에서 최영철의 방식으로 가장 훌륭한 작품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단연 그의 생태적 사유가 자연스럽게 구현된 「속도」를 들고 싶습니다.

"봐라 저 저놈의 성질// 옆에서 뭐라고 조잘대는 동박새 두고/ 동백은 핀 그대로 바다에 투신하는데/ 제주 성산포 노란 개나리/ 비행기 쾌속선 고속전철 다 두고/ 급할 것 하나 없이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네// 산수유 진달래 두견화 같은 것/ 갈 테면 먼저 가라고/ 제주에서 서울까지 한 이십일/ 이제 막 걸음마 배운 어린아이 걸음으로/ 방울뱀 청개구리 두더지 같은 것/ 꽃샘바람 하하 흔들어 깨우며/ 제주에서 서울까지 어슬렁 한 이십일// 닫아건 문전마다 살랑살랑 치마폭 날리며/ 봐라 저 저놈의 급할 것 하나 없는/ 흐드러진 노랫가락// 그래도 다 못 깨운 이쁜 놈들/ 봄 온 줄 모르고 늘어지게 자고 있는/ 흙무더기 들어올리다 널브리진// 저 이쁜 놈들 다 우야꼬"

                                                        

익살과 여유와 웃음과 그리고 시적 어슬렁거림과 한눈팔기가 다 동원된, 한마디로 저번까지의 그의 시에서는 좀체로 발견하기 힘들었던 '해학'이 가장 그답게 실현되고 있는 시입니다. 맨 마지막 행의 "우야꼬"를 한번 보세요. 시 전체에서 어슬렁거리며 이제까지 다 말하고도 아직 말 못한 것이 더 남아 있다는 듯 여유를 부리고 있는 이 방언의 적절한 구사는, 「봄날」의 "댕그랑댕 백원 동전 떨어지는 소리/ 동전 던진 여자의 뒷모습 따라/ 숭그랑숭 동냥치 눈물 맺히는 봄날"의 "숭그랑숭"이라는 그것과 함께 그의 이번 시집의 최대의 미학적 산물로 기록될 것입니다. 이밖에도 "히래줄기" "시부렁 지부렁" "때기장친" 등 저로서는 처음 듣는,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인지 그 의미가 성큼 와 닿는 싱싱한 사투리가 많습니다. 그렇게 적절하게 구사된 방언 하나가 시 전체를 생동케 하는 것은 또 그만큼 그의 시의 운용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또한 「DMZ의 두루미」도 뛰어난 익살, 아니 반전(反轉)의 시학이 발휘된 시였습니다.

 

<그로테스크한 몇편의 시들에 관하여>

 

끝으로 그로테스크한 그의 시에 대해 한마디 하고 마칠까 합니다. 「돼지들」「네모난 집」「푸줏간 이야기」「야경」「010101, 압권? 엽기?」 등에서 시도되고 있는 "육체의 왜곡과 과장"(전영주, 「한국 현대시의 그로테스크 미학」, 『문학·선』2003년 상반기)을 통한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도시문명에 대한 통쾌한 조소와 풍자는 일단은 그의 시의 영역 확장을 위해서 긍정적인 시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미학적 성과는 아직은 「푸줏간 이야기」외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생태적 사유와 연관되기도 하는, 현대 도시문명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은 이미 최승호와 김언희 등의 시에서 수월한 성취를 보인 바 있어 최영철의 새로운 도전이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최영철의 미학적 수월성이 보다 더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적용되는 영역은 아마도 「그 자장면집」이나 「서해까지」「다대포 일몰」 그리고 「862원」「손」「유유자적」 등에서 충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해학과 익살 쪽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보는 것으로 저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출처, 네블, 뿌리줄기의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