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2부-5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2부-5
시적 창조의 비밀을 풀기 위하여 사색하고 몰두해야 할 필요성은, 그것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바로 그 행위 속에 근대성이 기초한다. 그리고 시인들의 불쾌함은, 근대인의 의식과 세계관 속에서, 근대인으로서의 자신을 부정하고 근대의 기초 관념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이상한 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는 무능에 기인한다.
부서지지 않는 유일한 바위이며 세계의 기둥인 자아라는 의식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의식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이상한 요소가 나타난 것이다. 영감의 문제를 정확히 제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대 사회가 위기에 처하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뒤흔들리는 것을 경험해야만 했다. 시사詩史에서 그것은 초현실주의로 불린다. 224
초현실주의는, 우리에게 주체와 현실이라는 형태로 불리는 객체 사이의 투쟁을 제거하려는 극단적인 시도로 등장했다. 고대인들에게 세계와 의식은 모두 충만하게 존재했고, 그들의 관계 또한 뚜렷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존재가 살벌한 투쟁의 형태로 다가온다. 한편으로 세계는 증발하여 의식의 이미지로 변하고, 다른 한편 의식은 세계의 반영이 된다.
초현실주의의 시인들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다툼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그들의 과업은 근대 세계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 되었다. 낭만주의의 계승자인 초현실주의는, 노발리스가 '최상의 논리학'이라고 했던 그 과업을 완수하려고 했다. 즉, 우리를 찢는 '오래 묵은 이율배반'을 파괴하고자 했던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주체의 이름으로, 생으로 가득 찼던 어제의 세계에 대한 환각 껍질이 되어버린 현실을 부정했다. 초현실주의 역시 객체에 대해 공격했다. 그러나 객체를 녹였던 그 산酸은 주체마저 녹여버렸다. 자아고 없고 창조자도 없으며, 단지 시적 힘만이 근거 없고 설명할 길 없는 이미지만을 선호하고 양산하는 종이 위를 휩쓸고 다닐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시적 행위는 문자 그대로 비자발적이 되어, 항상 주체의 부정으로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시인의 사명은 그 시의 힘을 불러 고압 전류로 바꿔서 이미지들을 방전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주체와 객체는 영감을 위해 용해되어버렸다.
'초현실주의의 대상물'은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침대이고, 바다이며, 동굴이고, 쥐구멍이며, 거울이고, 칼리 신의 입이다. 주체 역시 사라진다. 시인은 두 개의 단어 혹은 두 실재 사이의 만남의 장소인 시로 변한다. 이렇게 초현실주의자는 양가적 가치 사이의 모순과 유아론을 부수고자 했다. 단호한 의지로 모든 출구를 봉쇄하고 말았다.
이제 세상도 없고, 의식도 없다. 세계의 의식도 없고, 의식에 비친 세계도 없다. 상상력이라는 천장으로의 비행 외에는 환풍구도 없어졌다. 영감은 이미지로 나타나거나 실현된다. 영감을 통해, 우리는 상상한다. 상상할 때, 우리는 주체와 객체를 해체하고, 우리 자신도 해체하며, 모순도 함께 제거한다. 225
영감 때문에 괴로워하던 이전의 시인들과는 달리,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무기로 삼고 칼처럼 휘둘렀다. 그렇게 하여 영감을 이념화하고, 또 이론화했다. 초현실주의는 단순한 시운동을 넘어 하나의 시학, 혹은 더욱 더 결정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표출된 계시인 영감은 주관주의의 미궁을 깨뜨린다. 그것은 의식이 잠들자마자 갑자기 우리를 엄습하는 무엇이다. 그것은 경계警戒의 모든 문들이 닫힐 때만이 비로소 열리는 다른 문을 통하여 분출하는 그 무엇이다. 내면적 계시로서의 영감은 의식의 단일성과 동질성에 대한 우리들의 믿음을 뒤흔든다.
자아란 없고, 우리들 개개인의 내부에는 여러 개의 목소리들이 싸운다. 영감에 대한 초현실주의적 사고는 우리들의 세계관의 파괴로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세계관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개념이 단순한 환영fantasma임을 고발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바로 영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관을 상정한다.
초현실주의적 세계관은, 영감의 파괴적이며 재창조적인 활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다. 초현실주의는 신이나 이성이 차지하고 있던 중심을 영감이 대신 차지하는 사회, 그런 시적 세계를 실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초현실주의의 진정한 독창성은 영감을 하나의 개념으로 설정했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하나의 '세계관'으로까지 확대했다는 데 있다.
이런 변화 덕분에, 영감은 단순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나 공허한 미신 혹은 비정상적인 상태로 치부되던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근본 개념과 상충되지 않는 하나의 관념이 되었다. 이것은 영감의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영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다른 관념들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226
초현실주의 이전의 모든 위대한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인들은 영감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몰두했지만―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중세,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시인들과 다른 점이었다―그 누구도 영감을 현대인의 세계관과 인간관과 합당하게 소화해내지 못했다. 그들은 전시대의 찌꺼기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영감은 과거로 돌아가 중세인, 그리스인, 야만인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낭만주의자들이 고딕주의, 근대시의 일반적인 의고주의擬古主義, 그리고 도시 한복판에서 망명자로 사는 시인의 초상 등이 영감을 순화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초현실주의는 신, 자연, 역사, 인종 등의 외부 요인에 의지하지 않고도 영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인정함으로써, 시인의 저항과 추방을 멈추게 만들었다.
영감은 인간 속에 있고, 자신의 존재 자체와 혼동되며, 인간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질 수 있는 무엇이 되었다. 이것이 「1차 초현실주의 선언」의 출발점이다. 또한 바로 이 점이, 아직도 간과되고 있지만, 브르통과 그의 동료들이 가지는 독창성이다.
자동 기술법, 자기 최면, 의도적 꿈꾸기, 집단 창작 등의 운동을 벌였던 '초기 모색기'에서, 시인들은 영감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한편으론 영감으로 인해 고통받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가장 용감한 시인들은 장애물을 부수고, 영감을 추적하여 거의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나아갔다.
초현실주의의 운동은 우리들의 개념이 보이는 결핍을 지적―특히, 인간의 모든 작품 속에서 어떤 '의지'의 개입을 읽어내는 것―하고, 위대한 발견들 속에는 이상하게도 종종 '방심', '우연', '부주의' 등이 끼여든다는 것을 밝혀냈다. 227
브르통은 명증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현상에 매혹되어, 인간과 '타자'가 만나는 장소이며 '타자성'의 선택된 장으로서 '객관적 우연'이라 불리는 신비한 메카니즘을 규명하려고 했다. 우리가 무엇을 찾거나 혹은 찾는 것을 멈출 때, 여인, 이미지, 수학이나 생물학 법칙 등의 그 모든 신대륙이 대양의 한가운데에서 불쑥 솟아나는 것이다. 이런 만남들은 왜,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는 모든 것이 교차하는 자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게 전부다.
우리는, 세심한 주의와 감시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다른 목소리'가 솟아나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 어디서 오며, 그렇게 갑작스럽게 왔다가 왜 또 그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것일까? 초현실주의의 고된 실험에도 불구하고, 브르통은 고백하기를, "여전히 우리는 목소리의 근원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한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보자. 우리가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예기치 않은 그 만남이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미 과거에 보았던 것을 다시 본다는 느낌이 든다. 돌아가서, 다시 듣고, 기억해내는 것 같다. 타자성의 느닷없는 출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느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들어본 일이 있으며 또한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의 근원에 대해 잘 알 수 없다는 브르통의 고백이 나름대로 타당함에 주목해야 한다. 브르통은 영감을 단지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내심 저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초현실주의자들의 영감에 대한 관념을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28
낭만주의 이후로 시인의 자아는 시적 세계가 움츠러든 것과 정확히 반비례하여 커져갔다. 공장주나 농부가 자신의 공장이나 땅에서 생산된 생산물의 주인인 것처럼―양쪽 다 그 소유가 타당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지만―시인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기 시의 주인인 것으로 생각했다.
전시대 시인들의 개인주의와 이성주의에 대응하여,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모든 창작의 무의식적, 비의도적, 그리고 집단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영감과 자동기술법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가장 시적인 것은 시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그의 시 속에서 드러나는 무의식적 요소라는 것이다.
시는 방향성이 없는 사유다.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부수기 위하여, 브르통은 프로이트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는 무의식의 계시이고, 따라서 결코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노발리스가 살펴본 바와 같이, 브르통이 깨달은 그 문제는 거짓된 것이다.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는 것도 의도적인 행위가 된다. 수동성이 가능하려면 능동성이 전제된다는 의미에서, 그 수동성은 능동성을 내포한다. 전前-숙고라는 말은, 그것이 성립되려면 전前-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별의미가 없는 말이다.
기계적이고 생각 없이 '유용성만을 추구하는 것'이 되는 것에 대해 하이데거가 행한 비판은―이것에 관련하여, 근원적으로 인간을 점거하고 있는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재된 채로 인간의 모든 작업의 전제가 된다―그대로 초현실주의 영감 이론에 적용된다.
무의식의 계시들은 그 계시에 대한 의식을 포함한다. 자아ego의 검열이 검열될 대상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자유롭고도 의도적인 행위에 의해서만 그 계시들은 밖으로 나타날 수 있다.
어떤 욕망이나 충동을 억제할 때, 우리는 가면을 쓰고 변장하고 나타나는 의지를 통해서만 그렇게 하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관여되지 않았음을 밝히기 위하여 그 의지를 '무의식'의 탓으로 돌리는 그 '무의식'이 자유롭게 되는 순간, 이번에는 역으로 그 작용이 반복된다. 이번에는 수동성이라는 가면에 숨은 채 의지가 다시 개입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서 모두 의식이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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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그것을 무의식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밖으로 끄집어내거나 간에, 하나의 결정이 따른다. 이 결정은 분석 능력, 의지 혹은 이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 결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존재의 총체성 자체이다.
전-숙고는 창작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것이다. 전-숙고 없이 영감이나 '타자성'의 계시란 없다.
하지만 전-숙고란 의지보다 선행하여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몰두와 욕망보다 앞선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보여준 바와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갈증이고 끊임없는 전前-존재인 인간의 존재 자체에 모든 소망과 욕망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부분'이거나 '구성 요소'로서의 의식이나 무의식에서도 아니고, 충동이나 수동성 혹은 깨어 있음에서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 모두가 모여야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브르통은 심리학적인 설명이 항상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가 프로이트의 생각에 매우 동조했을 때조차 영감은 정신분석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말했다.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그로 하여금 신비주의적인 가정을 모험해보도록 이끌었다.
한편 신비학은 그것이 신비학이 되기를 그만둘 때, 즉 그것이 계시가 되어 감추던 것이 드러날 때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만일 영감이 하나의 신비라면, 신비학적인 설명은 그것을 두 배로 더 신비하게 만들 뿐이다. 신비학은, 영감과 마찬가지로, 존재를 '타자성'의 계시로 만든다. 따라서 그것은 유사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영감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면, 그것이 신비학자들이 말하는 계시와 비슷한 것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230
왜냐하면, 우리는 영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브르통이 신비학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설명의 가능성에 집착한 사실은 상당히 시사적이다. 그 집착은 심리학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자성'의 현상이 지속된다는 데 그가 점점 더 불만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브르통에게 유효한 것은 영감의 개념이 아니라, 영감으로부터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 현상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감추거나 단순한 심리적 메카니즘으로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타자성'의 숙제를 풀지 못했다고 해도, 초현실주의 이론은 요약적이고 끝내 표면적일 수밖에 없는 심리학적인 단언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영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서 우리에게 친숙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이 채택한 심리적 설명이 불충분하여 결국 문제의 핵심이 '타자성'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전-숙고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바로 이 '타자성'에 어쩌면 답이 있을지 모른다.
노발리스나 브르통 같은 뛰어난 정신의 소유자가 경험한 어려움은 인간이라는 개념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즉 어떤 본성은 가진 주체로 파악한 데 있다. 말하자면, 시적 창조란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말들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혹은 그 반대의 가정에 의하면, 어떤 특수한 순간에 시인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말들이 돋아난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마음 깊은 곳'이란 없다.
인간은 하나의 사물도 아니며, 그의 마음속에 별과 뱀과 보석과 맹수들이 웅크리고 있는 부동의 경직된 존재는 더 더욱 아니다. 자신 너머의 저곳으로 발사되어 날아가는, 끊임없이 대기를 가르며, 항상 앞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인 인간은 쉼 없이 전진하고 추락한다. 그 순간 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이다.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어쩌면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지 모른다. 231
여기 한 시인이 종이 앞에 앉아 있다. 그가 사전 계획을 가지고 있건 없건, 그가 앞으로 쓸 것에 대해 길게 사색을 했건 안 했건, 번갈아가며 그를 유혹하고 거부하는 순결한 백지처럼 그의 의식이 비어 있건 아니건 상관없다. 글을 쓰는 행위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마치 허공으로 던져지는 것 같은 이탈을 요구한다.
이제 시인은 혼자 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를 신경쓰게 만들었던 모든 일상 세계가 사라진다. 만일 시인이, 단지 의례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글쓰기를 원한다면, 그의 행위는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괄호 속에 집어넣는다. 그때 두 가지 가능성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증발하고 희미해져서 중력을 잃고 떠다니다가 결국 녹아 없어지거나, 혹은 모두가 스스로를 닫아걸어 의미의 빛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물질인 무의미체가 되고 만다. 세계는 스스로를 연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 거대한 하품이다. 책상, 벽, 컵, 기억나는 얼굴 등 세계는 스스로를 닫아걸고 균열없는 담으로 변한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은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된다. 다시 세계를 창조하여, 저 위협적인 외부의 텅 빔을 하나하나 이름붙여야 한다.
책상, 나무, 입술, 별, 그리고 무까지도. 하지만 낱말 역시 증발하여, 도망가고 만다. 말 이전의 침묵이 우리를 감싼다. 혹은 침묵의 또 다른 얼굴인 무분별하고 말로 옮길 수 없는 중얼거림,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분노the sound and fury", 수다, 아무 의미 없는 소음 등이. 232
세계가 사라질 때, 시인에겐 말 역시 사라진다. 어쩌면 이 순간 그는 뒷걸음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말을 기억하려 하고, 학습했던 모든 것, 즉 조금 전만 해도 그에게 외부로의 길을 열어주고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같던 그 아름다운 말들을 내부에서 끄집어내려 애쓴다.
그러나 뒤에, 혹은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팽팽하고 긴장되게, 앞을 향해 던져진 시인은 문자 그대로 그를 벗어나 있다. 시인처럼, 말들도 저 너머, 언제나 저 너머에서,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질 듯이. 자신 밖으로 던져진 그는 결코 말과, 세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말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주어진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치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그것들을 창조하고 발명해내야 한다. 어떻게 말들을 창조하는가? 무에서는 무만 나온다. 만일 시인이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해도, '언어를 발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언어란, 당연히, 대화이다.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고, 언제나 최소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두 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매일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앞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상 안도 밖도 없다. 우리가 존재한 순간부터, 우리는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우리 존재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자신이다. 그것들이 바로 우리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낯선,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성'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이다. 233
시인이 스스로를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로 느끼고, 언어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고 해체될 때, 그 자신도 떠나고 사라진다. 그 다음 순간 침묵이나 알아듣지 못할 혼돈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고 더듬더듬 언어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 그 자신이 새로 창조되고 치명적 도약을 통해 재탄생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의 말과 목소리만 이상한 게 아니다. 그 자신, 그의 존재 전부가 끊임없이 낯선 것, 항상 타자로 변하는 무엇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조건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된다.
시는 우리의 존재 조건을 투명하게 한다. 왜냐하면 말은 여전히 세상의 것이면서, 즉 말이기를 그치지 않은 채, 시의 정수 속에서 시인만의 독점적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어는 역사적인 것일 뿐 아니라, 개인적이고 순간적이기도―창조의 순간의 표식―한 것이다. 시가 순간적이고 개인적인 표식이기 때문에, 모든 시는 같은 것을 말한다.
모든 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 즉 인간과 인간의 언어와 세계를 쉬지 않고 파괴하고 창조하며,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끊임없는 '타자성'을 계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역시 역사적이며 공동의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에, 각각의 시는 독특하고 개성적인 무엇을 말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호메로스나 라신과 똑같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시인들은 저마다 자신의 세계를 말하고, 저마다 자신의 세계를 재창조한다. 234
영감은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지도 않고, 과거의 진흙으로부터 갑자기 솟아난 존재처럼 뒤에 있지도 않으며, 굳이 말하자면 앞에 있으면서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 무엇, 혹은 차라리 누구이다. 그 누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사실 영감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이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이렇게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 자유는 좀더 충만해지기 위해서 우리 자신 저 너머에 있는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행위이다.
자유와 초월은 시간성의 표현이며, 움직임이다. 영감과 '다른 목소리'와 '타자성'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현시켜서 흐르게 하는 시간성이다. 영감, '타자성', 자유 그리고 시간성은 초월이다. 하지만 그 초월과 존재의 움직임은 어디로 향한 것인가? 우리 자신을 향해서이다.
보들레르가 "우리의 가장 고귀하고 철학적인 능력은 상상력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을 확인한 것이다. 상상력을 통하여, 즉 우리들의 본질적인 시간성에 내재하면서 바로 그 시간성을 육화하려는 끈질긴 욕망을 이미지로 바꾸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 너머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영감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되기를 멈춘다. 두번째 단계에서 자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더욱더 전체적인 자신이 된다. 신화와 시적 이미지가 말하는 진실은, 대개 매우 신비롭게 나타나는데, 이탈에서 귀환으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에 들어 있다. 235
인간은 세상을 자화磁化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삼라만상은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의미를 머금게 되고, 결국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인간을 겨냥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어디를 겨냥해야 하나?
그는 그것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타인이 되기 원하며, 그의 존재는 그를 항상 자신 너머로 가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인간은 매순간 헛발을 짚고 발자국마다 비틀거리며, 존재이기를 상상하지만 매번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타자와 조우한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이 남자였고 여자였으며, 바위였고 "바닷속에서는 벙어리 물고기였다고 했다. 그만 그런 게 아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이런 말을 듣는다. 어떤 사람이 흥분하면, '몰라보게 달라 보이고', '딴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말을. 우리 이름 속에는 누군가가 숨어 있고, 그 역시 우리 자신이라는 것 외에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인간은 '시간성'이며 변화이고, '타자성'이 그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구성한다. 인간은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완성한다. 타자가 되면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낙원에서의 추방과 이 땅으로의 전락 이전의, 나와 '타인' 사이의 분열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재정복한다.
인간의 특성은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뿐 아니라, 타자가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타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말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
그때, 도약의 절정에서, 인간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허공에 걸려 작렬하는 순간, 그는 순간적인 충만과 충만한 존재로의 생성 속에서 동시에 이것과 저것,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 삶과 죽음이 된다.
인간은 이제 되고 싶었던 모든 것이 된다. 그는 돌, 여자, 새, 다른 사람, 다른 존재가 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시이며, 대립물들의 결합인 이미지가 된다. 결국 그는 인간으로 육화한 인간의 이미지가 된다.
시적 목소리, '다른 목소리'는 나의 목소리이다. 인간의 존재는 이제 그가 되고 싶어했던 타자를 포함한다. 마차도가 말하길 "서로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는 에로틱한 의미로서 하나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사랑하는 여인은 이미 우리들의 존재 속에 갈증과 '타자성'으로 들어 있는 것이다.
존재는 에로티시즘이다. 영감이란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다른 몸, 다른 존재―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자신에게서 꺼내는 이상한 목소리이다. 존재는 다름 아닌 존재의 욕망이기 때문에, 욕망의 목소리는 존재 자신의 목소리이다.
나 밖의 저 멀리, 푸르고 빛나는 숲 속의 떨고 있는 가지 끝에서 미지의 누군가가 노래한다. 날 부르고 있다. 그러나 그 낯선 이는 친밀감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을 더듬어 '시의 목소리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다.'
난 이미 그곳에 있어보았다. 고향의 바위는 아직도 내 발자국을 머금고 있다. 바다는 친숙하다. 저 별은 언젠가 내 오른손에서 불타고 있었다. 난 네 눈을, 네 머리칼의 감촉을, 네 뺨의 체온을, 네 침묵으로 인도하는 길목을 알고 있다. 너의 생각은 투명하다. 네 생각 속에서 네 모습과 겹쳐지는 내 모습을 보고, 이윽고 그 모습들이 천 번 만 번 겹쳐지다가 백열白熱에 이르는 것을 본다.
너로 인해 나는 이미지이고, 너로 인해 나는 타자이며, 너로 인해 나는 나다. 모든 사람은, 타자이며 나 자신인 사람이다. 나는 너다. 또한 그이며, 우리이고, 너희이며, 이것이고, 저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명사들은, 언어의 원천이며 시의 끝이고 한계이며 모든 언어를 양육하는 비밀스럽고 언명 불가능한 다른 대명사의 변조變調이며 굴절어屈節語이다.
모든 언어는, 나이며 타자들이고, 나의 목소리이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이고, 모든 사람이면서 각 개인인 그 원초적 대명사의 은유들이다. 영감은 존재로의 투신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존재를 기억해내서 다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존재로 돌아가는 것.' 237
출처, 네블,인드라의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