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옥 시모음
오봉옥 시인은 1985년, 창작과 비평사 16인 신작시집
『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위에』에 시 『울타리 안에서』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지리산 갈대꽃』, 『붉은 산 검은 피 1, 2』,
『나같은 것도 사랑을 한다』 등이 있고,
동화 『서울에 온 어린왕자 1, 2』,
수필집 『난 월급받는 시인을 꿈꾼다』, 평론집 『서정주 다시 읽기』,
『시와 시조의 공과 색』, 『시로 쓰는 이중나선』 등
다수의 저서를 간행하였습니다
현재 연세대, 경원대, 선문대 등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으며
남한과 북한이 함께 펴내는 사상 첫 통일 국어사전 '겨레말큰사전' 의
남측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디지털문화예술아카데미 부설 <아트앤스터디 창작학교>
시 기초반에서 창작 강의를 펼치고 있습니다
오늘의
노래
1
밤이 깊어도 더
깊어도 부끄러웠다
꼬랑내와 담배 연기로 범벅이 된 골방 아래
홀로 쪼그리고 앉은 밤
세 살 먹은
딸이 자다가도 끄르르 끄르르 기관지염을 앓는 밤이다
곁에는 지금이라도 아빠 하며 동그랗게 눈뜰 아이의 눈빛하며
아내의 지친 눈빛도 있나니
논둑 밭둑 그 어디거나 헤매었던 들쥐마냥
끝내는 지쳐 더는 헐떡이지
못하고
사지를 두더쥐처럼 웅크린
내 꼬락서니 쳐다보는 그 눈빛들 있나니
누가 그려놓았나 몰락하는
내 얼굴 내 손톱
그래 잊어버리자 지난날은 잊어버리자 해도 다가오는 손가락질.
2
돌아보니
나 혼자뿐이었어라
언 손 호호 불며
밤샘하던 이들 다 떠나갔으니
돌아보니
나하고 그림자뿐이었어라
큰 시암 골목 계단 오르내리며
주먹다짐하던 이들
다 떠나갔으니
그랬어라 사람들은
버거워 질질 끌어야 할
너무 버거워 이젠 버려야 할
낡은 내 모습만 달랑 남겨놓고
다 떠났어라 가르쳤어라.
3
밤이 깊어도
더 깊어도 부끄러웠다
내리내리 내려온 괘종시계며, 새벽문을 두드리는 신문이며, 창문 사이로 빌빌 기어나오는 소리
하나에도 눈물이 난다
나를 버려야 내가 살 것 같은 지금
쓰린 배 움켜쥐고 산발한 머리 쥐어뜯으며 다시금
되새김질하는 수밖에
민중이니 조국이니 하며 자랑처럼 와와 내달리던 일 하며
두 눈 빛내며 내일을 기약했던
얼굴들이
하나 둘 말도 없이 발을 감출 때
쓴웃음이나 질끈질끈 물었던 일
아니 어머니 같은
누님이 그 언젠가 늦은 발로 다가와
너만 남았구나 했을 때
"아니야" "아니야" 똑같은 말을 두 번이나 하면서도
이걸로 끝장인가 하는 절망이 스르르르 또아리를 틀었을 때
바로 그때를 생각하는 수밖에
나를
버려야 내가 살 것 같은 지금.
어미 쥐의 말씀
저 죄 많은 두 발 짐승은 시인이란다. 끼끼, 시를 쓴답시고 지금 동강을 간단다. 절집을 찾는단다.
저들이 느릿느릿 게걸음질치는 건 꽃길에 취해서가 아니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건 속죄의 옷자락이
무거워서란다.
저들에겐 고통을 키우는 유전자가 있단다. 너희는 아득한 구멍 속에서 캄캄한 희열을 느끼지만 저들은 환한 길을 가면서도
터널 같은 외로움을
느낀단다. 이 어미의 눈엔 저들의 내장까지도 보인단다. 저들이 가고 있는 길, 밑도 끝도 없이 꿈을 꾸며 가야할 길, 가서는 다시 돌아올 그 길이 다 보인단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두 발 짐승으로 태어났을꼬, 몇 생이나 닦아야 우리 같은 존재가 될꼬.
내일을 여는 작가 (2004년 가을호)
아이가
되고프다
세 살 배기 소백이는
송아지가 마냥 좋나 보다
만져보고 손뼉도 치며
졸래졸래 잘도 따라다닌다
그러다 음메에 하고
달아나면
까르르르 웃으며 저도 따라가고
밤이라도 낼름 햐ㄾ으면
"넥끼" 하고 어른 흉내도 낸다
나도 아이가
되고프다
욕심도 없이 아이가 되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