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염소에 관한 시모음

휘수 Hwisu 2007. 8. 12. 09:15

 

염소의 저녁 / 안도현 
 
할머니가 말뚝에 매어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번 더 힘을 준다
그러자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의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울다 염소 / 조현석

 

비어 있던 속, 기름기 없던 뱃속으로
푹 삶아진 염소가 갈기갈기 찢겨져 들어왔다
술 몇 잔과 더불어 신선한 공기도 몇 됫박
소독되지 않은 단양 하선암 생수도 몇 컵
해체된 염소 몸이 남긴 갖은 부속물을
소주 반 잔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기어
배 속 깊은 곳에 가두었다
밤새 되새김질하는 염소가 운다
울음이 깊을 때마다 몸이 요동쳤다
속 편해지려고 되지도 않은 되새김질을
나도 여러 번, 하고 또 했지만
날카로운 뿔에 받혀 상처가 난 듯 꾸르르륵 
더부룩했다, 밤새 염소가 풀밭이 아닌
융단 같은 위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 놀았다
낮에 몸 부딪는 축구를 해서인지
왼쪽 어깨가 아파 오른쪽으로 돌아눕고
등이 배겨 배를 깔고 돌아누웠던, 아침이
다가오는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그 놈이 울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먼동 무렵에
잠 깨어 물안개 피어오른 계곡을 거닐 때
예전에 잠시 그곳에서 뛰놀던 염소가
세차게 방파제를 때리던 태풍 속 파도처럼 요동쳤다
빠르게 달려간 구식 화장실에 엉덩이를 까고 앉아
시끄럽게 괴롭히던 염소를 끄집어냈다
쫘르르 쏴아아아아아  자신이 놀던 곳으로 염소는
회오리 물살에 묻혀 돌아가려던 것이다
찬바람 불고 찬비 내리는 단양 하선암 계곡
물가에 자리 잡고 앉아 몇몇이 두런거렸던 그날

 
염소와 나와의 촌수 / 복효근

 

햇살 짱짱한 봄날
팔순 어머니와 나와 내 딸 선혜, 인혜와
산모퉁이 돌아가며 냉이를 캔다
저 쪽 언덕엔
겨우내 새끼를 낳았나 보다
삐쩍 마른 어미 염소가 새끼들 데불고 나왔다
염소와 사람 촌수가 이렇게 가깝구나
풀과 나물이 한 끗 차이듯
초식의 유습을 공유한
한 끗 차이도 안 되는 짐승으로
우리는 새순을 뜯으며
함께 햇살을 나누고 있구나
오늘은 전생과 내생도 한 뼘 차이로 가까워서
어머니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손녀들에게 자꾸자꾸 풀이름을 가르치는데
아무래도 나는
저 염소에게 가서
댁의 성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봐야 되겠다

 

염소 / 문신


하나의 낭설인지도 몰라
날카로운 내 뿔이 우주로 향한 안테나라는 거
 
검은 구름은 풀밭 상공을 낮게 흘러가고
나는 비로소 축축한 무릎을 펴고 일어선다
어디선가 초록 이끼의 냄새가 맡아진다
그러나 바람은 불지 않는다
모든 쓸쓸했던 것들의 아픔을 느낀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흘러오게 되었던가!
기억은 가끔씩 부러지기도 하면서
내가 그어놓은 둥근 금 안으로 상형문자 같은
무거운 구름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갔는지
얼마나 많은 죽음들이 별로 환생했는지 내 뿔은
기억하지 못한다
젖은 바람이 속눈썹 끝에서 불어온다
검은 구름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우주선처럼
허공에 긴 꼬리를 떼어내며 불시착한다
풀들이 창살처럼 단단하게 일어선다
나는 우주를 향해 열린 안테나를 세워
유배 일기를 타전한다
나는 이미 말뚝의 중심에 길들여졌으므로
지상에서의 생활은 즐거운 나날뿐이라고

그리하여 불구의 꼬리가 한 뼘쯤 자라난 것 같기도 하다고
그러나 오늘도 접속이 거부되는 내 운명이여!
 
하나의 낭설임에 틀림없어
날카로운 내 뿔 속에 우주의 비밀이 들어 있다는 거

 

염소와 풀밭 / 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염소를 찾아서 3 / 임영조

 

고2 때 기말시험 보던 날
납부금 안 냈다고 쫓겨난 나는
고향집에 내려가 식구들 몰래
새끼 밴 염소를 내다 팔았다

 

간재재 넘어 삼십여 리 길
팔려가는 낌새를 알아차린 듯
거품 물고 버티며 울부짖던 염소를
판교장에 끌고 가 헐값에 팔았다

 

삼십 년 지난 오늘
이제야 비로소 깨닫느니
내가 염소를 내다 판 게 아니라
염소가 나를
대처에 판 걸 알았다

 

이 고달픈 生을
어디에 안녕히 뿌려놓지 못하고
세월의 볼모처럼 덜미잡힌 채
날마다 헐레벌떡 끌려온 내가
굴레 쓴 염소임을 알았다.

 
언덕 위의 염소 / 박유라

       -사진2

 

가도 가도 그 자리
풀밭 벽에서 반야를 되새김질하는 염소들

눈조리개 몽롱히 열어 옴쭉옴쭉 방정맞게
여기서도 옴 저기서도 옴 옴을, 오물거리며

 

해가 가마솥 풀빵만큼 부풀어오른 정오
라디오에서는 흘러간 옛노래가 메들리로 나온다
손가락 장단을 한 번씩 퉁겨 올릴 때마다
부드럽게 흐르는 턱과 턱 능선에서
침에 섞여 노래와 풀들이 잘게 으깨지고
한나절 언덕이 잘 반죽되고 있다
부풀어 올라라 부풀어 올라라 풀 풀 풀
해가 서쪽 목책에 종잇장처럼 가볍게 걸릴 때까지
내일 아침 한 통 하얀 젖이 흘러나올 때까지

 

산사나무꽃은 하염없이 지고
부는 바람 하루, 이틀, 사흘,......
내가 매일 목을 놓아먹이는 것은 무엇일까
옴,마,니,밧,메,훔,아,주,공,갈,염,소,똥,십,원,에,열,두,개,떽,떼,굴,
염소 엉덩이께에서 흘러나오는 따끈한 구름들

 
염소에게 / 유강희

 
해질 녘이나
바람 부는 날엔
아기 염소들은 비탈진 언덕에 발을 딛고
學習하듯 쓴 풀을 뜯으며
매애매애 하고 울음을 짠다.
필시 우는 기술 하나는 기막히게 타고난 듯
애잔하고도 애닮게 그것들은
울음도 한꺼번에 크게 쏟지 않고
조금씩 찔찔 흘리며 눈물을 아껴 운다.
눈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는 저이들끼리
생뿔을 부딪쳐 쩔쩔 피 흘리며
매애매애 울기도 한다.
매일 누가 죽는지, 슬픈 일이 있는지
검은 상복을 입고 그렇게 속세의 언덕을 누비는 것이다.

 
나는 염소 간 데를 모르네 / 신현정

 

연두가 눈을 콕콕 찌르는
아지랑이 아롱아롱 하는 이 들판에 와서
무어 할 거 없나 하고 장난기가 슬그머니 발동하는 것이어서
옳다, 나는 누가 말목에 매어 놓고 간 염소를
줄을 있는대로 풀어주다가
아예 모가지를 벗겨 주었다네
염소 가네
어디로인가 가네
나는 모르네
어디서 음메에가 들리네
하늘 언저리가 파랗게 젖어 있는 것으로 봐서
거기서 잠시 울다 간 거 같으네
아 저기저기 뿔 쬐그맣게 달고 가는 흰구름이 저거 �소 맞을 거네
나는 모르네
이 봄, 팔짝 뛰고 뒤로 나자빠질 봄이네
정말 모르네

 

뒤안을 나오며 / 정병근

 

버둥거리는 염소의 입에 소금을 먹이고
목을 따자,
몇 번 몸을 떨던 염소는 곧 조용해진다
노파가 양은솥을 대고 피를 받아낸다
염소의 뜬 눈이 광속으로 허공을 가른다
영감이 버너불로 염소를 그으른다
불똥 속에 드러나는 염소의 얼굴
어금니를 꽉 다문 저 무표정이 무섭다
털을 다 그을린 영감이 담배를 피워문다
담배를 빠는 볼이 대추꼭지처럼 쪼글쪼글하다
염소보다 영감의 팔자가 더 세서
염소는 죽어서도 영감을 저주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기억하며 사는 인간만이 불행할 뿐,
기억이 짧은 염소는 그 짧은 기억의 힘으로
죽으면 죽었지 미련하나 남기지 않는다
오후의 설핏한 해가 힘 센 허기를 몰고 온다
허기는 얼마나 골똘한 망각인가
뒤안을 나오는데 우리 속의 염소들이
누구시냐는 듯 멀뚱멀뚱 쳐다본다

 
고집 센 염소 / 이창수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한 마리 염소만 남아 빈집을 지키고 있다
근처 풀밭으로 염소를 몰고 가는데
콩밭이며 고구마밭 눈에 보이는대로 달려든다
여린 잎사귀부터 기시돋힌 아키시아 줄기까지
닥차는 대로 집어 삼켜야 직성이 풀리는
욕망의 관을 쓴 염소
이놈의 고삐를 팽팽하게 당기다 보니
나를 고집 센 염소로 비유하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껍질부터 뿌리까지 송두리째 던져주고도
게걸스럽게 자신을 먹어치우는
내 욕망의 관 용케도 받아주시던
언제나 가슴 속 푸른 풀밭으로 남아있는 어머니
자꾸만 벼이삭을 향해 달려드는
저 한 마리 고집 센 염소
회초리로 내려치며 운다
용서해다오 용서해다오

 
각축 / 문인수

 

어미와 새끼 염소 세 마리가 장날 나왔습니다.
따로 따로 팔려갈지도 모를 일이지요. 젖을 뗀 것 같은 어미는 말뚝에 묶여 있고
새까맣게 어린 새끼들은 아직 어미 반경 안에서만 놉니다.
2월, 상사화 잎싹만 한 뿔을 맞대며 톡, 탁,
골 때리며 풀리그로
끊임없는 티격태격입니다. 저러면 참, 나중 나중에라도 서로 잘 알아볼 수 있겠네요.
지금, 세밀하고도 야무진 각인 중에 있습니다.

 

염소 울음이 세상을 흔든다 / 박완호

 

새끼 염소가 죽었다
난 지 사흘만에 나선 첫 산책길
아카시아 향기에 취해 길을 잃었을까
누구의 귀에도 가 닿지 못한
울음 한 조각 물고
똥통에 빠져 죽은
염소의 검은 등을 밟고
수의라도 덮어주려는 듯
구더기들 하얗게 몰려든다

 

목덜미 털이 벗겨지도록
종일 새끼를 찾던 어미는
모르는 척 허겁지겁 밥그릇을 바닥까지 핥는다

물기 젖은 염소의 눈길 가 닿는
사발 속 허공 

어미 염소의 허기가
세상의 저녁을 흔든다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