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원태 시모음
1955년 대구 출생
1990년「문학과사회」에 '나무는 왜 죽어서도 쓰러지지 않는가'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91년 시집「침엽수림에서」민음사
1995년「소읍에 대한 보고」문학과지성사
1991년 제1회 대구시협상을 수상
2007년「물방울 무덤」창비
귀한 마주침, 텅 빈 충만
목요일 늦은 오후, 텅 빈 강의실 복도에서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는 청소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 몸피가 조그만 아주머니는 내게 다소곳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내가 마치 '높은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공손한 인사. 무슨 종류일지 짐작가는 바 없지 않지만, 아마도 어떤 '결핍'이 저 아주머니 마음에 가득하여서, 마음 자리를 저리 낮고 겸손하게 만든 것이겠다. 저 나지막한 마음의 그루터기로 떠받치고 품어안지 못할 것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일까?
아주머니, 쓰레기들을 일일이 뒤적여 종이며 캔과 병같은 것들을 골라내어 따로 챙긴다. 함부로 버려진 것들에서 '소중한 어떤 것'을 챙기는 사람 여기 있다. 아주머니는 온몸으로, 시인이다.
시집 <물방울 무덤>2007년 창비
갯우렁
갯우렁은 연체동물
백합조개를 잡아먹을 때
껍질에 빨판으로 달라붙어 가만히 있다
마치 꼭 껴안고 있는 듯 보일테지만
나중엔 백합조개의 볼록한 이마쯤에
갯우렁은 빨판으로 조개껍질에
드릴로 뚫어놓은 듯 정확한 원형의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듯한 몸짓에
집요한 추궁,
뜨거운 궁구가 있었던 것
갯우렁의 먹이사냥에는
가차없는 집중력이 숨어 있다
너를 향한 물컹한 그리움에도
어디엔가 숨겨진 송곳,
숨겨진 드릴이 있을 게다
내 속에 너무 깊어 꺼내볼 수 없는 그대여
내 슬픔의 빨판, 어딘가에
이 앙다문 견고함이 숨어 있음을 기억하라
시집 <물방울 무덤>2007년 창비
굴뚝들
온산유화공단의 저 굴뚝들은 그리움이다. 그리움이라는 病! 굴뚝들, 지상에서 가장 절실한 모습으로 외팔을 쳐들었다. 가장 높이 쳐들 수 있는 데까지, 저의 가능성과 한계를 다해……
굴뚝들, 제 팔을 너무 쳐든 나머지 한쪽 팔만 남았다. 공장들은 저 굴뚝들 때문에 아주 어깨가 삐딱해지거나, 힘을 다해 용쓰느라 핏줄들까지 툭, 툭, 불거져나온 게다.
불꽃을 태우는 굴뚝도 있다. 낮엔 그저 이글거리는 손짓으로만 보였을 굴뚝 끝의 화염. 밤 되어 어두워지자, 붉고 투명한 불꽃의 손바닥은 더욱 선명하고 애처롭게 흔들린다. 춤추는 불꽃의 손가락들은 파랗게 질려 있기도 하다.
나를 봐주세요! 그대여! 제발, 제발, 하면서……
시집 <물방울 무덤>2007년 창비
출처, 내영혼의깊은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