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시인들의 유쾌한 진검 승부 / 네이버 뉴스
애니메이션 시인들의 유쾌한 진검 승부 | ||
[필름 2.0 2006-02-24 18:30] | ||
<겨울 날> 冬の日 l 2002 l 가와모토 키하치로 외 34인 l 39분 l 1.33:1 l DD 2.0 l RC 3 l 라바메이저
캐릭터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배경 하나하나까지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모두 손으로 만들어내는 애니메이션은 실재하는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는 실사 영화에 비해 유동적이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캐릭터와 움직임, 표정과 희로애락의 감정을 만들고 움직임 사이의 작은 간격에서 커다란 의미와 감정을 압축시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은 굳이 말하자면 산문보다는 함축의 미덕이 돋보이는 시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DVD로 출시된 연작 애니메이션 <겨울 날>에는 이렇듯 작은 선과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마법과도 같은 애니메이션의 매력은 물론, 애니메이션과 시의 만남, 과거와 현재의 만남,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모두 녹아 있다. 일본 인형 애니메이션의 거장 가와모토 키하치로가 총 제작을 맡은 이 작품은 살아 있는 애니메이션계의 전설 유리 놀슈테인, 유리 애니메이션의 대가 알렉산드르 페트로프, 초현실적인 상상력의 전복자 쿠리 요지, 일본 상업 애니메이션계의 거목 다카하다 이사오,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의 대가 라울 세르베스 등 전 세계 애니메이션계의 내로라하는 거장부터 가능성 있는 젊은 애니메이터까지 총 35인의 작가들이 참여해 일본의 전통 시가 형식인 ‘렌쿠(連句)’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작품이다.
부산영화제를 포함해 몇 차례 국내에도 소개되기는 했지만 일본의 전통 시가를 소재로 한데다, 이렇다 할 줄거리나 사건도 없이 오직 시구 자체에 충실한 이미지의 연속이며 다카하다 이사오 등 몇을 제외하고는 국내 관객에게는 이름도 낯선 작가의 면면 등 이 작품의 국내 출시는 호사로 느껴질 법도 했다. 그런 만큼 DVD 출시 소식은 눈물이 나올 만큼 기쁜 소식이지만 한편으론 놀라운 것도 사실이다.
이 흥미로운 작품의 원작은 ‘렌쿠’ 중 한 편인 ‘겨울 날’. 렌쿠는 일종의 연작시로 마치 끝말잇기를 하듯 여러 시인들이 시구를 이어가는 일본의 전통적인 문예 형식이다. ‘겨울 날’은 에도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마츠오 바쇼의 대표작 ‘바쇼 7부집’의 1권에 해당하는 것으로 1684년 바쇼가 나고야를 여행하며 그곳에서 만난 나고야 문인들과 함께 지은 것이라고 한다.
렌쿠 ‘겨울 날’이 개성적인 문체와 세계관을 지닌 여러 문인들에 의해 공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듯 애니메이션 <겨울 날> 역시 다양한 개성을 지닌 35인의 애니메이터에 의해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작품은 셀에서 페이퍼, 인형, 컷 아웃, 실루엣, 컴퓨터, 클레이, 로토스코핑, 유리 등 애니메이션의 가능한 모든 형식과 스타일을 망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한 작품 속에 35가지, 그 이상의 개성이 녹아 있는 셈이다.
애니메이션 <겨울 날>은 ‘애니메이션’의 다양한 개성과 이미지 자체의 황홀경을 선사하지만 흥미롭게도 렌쿠 자체의 엄격한 형식과 규칙, 리듬 역시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다. 일례로 <겨울 날>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유리 놀슈테인이 맡아 특유의 컷 아웃 애니메이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두 번째는 프로젝트 총 책임자 가와모토 키하치로가 정교한 인형 애니메이션으로 솜씨를 발휘했는데, 이는 통상 첫 번째 구는 스승이나 손님으로 초대받은 주빈이 짓고 두 번째 구는 집주인이 짓는 렌쿠의 전통을 고스란히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국내에 출시된 DVD는 일본에서 1장으로 출시된 일반 판과 동일한 것이며 작품 기법과 제작 과정에 대한 메이킹, 렌쿠에 대한 해설, 이미지 컷 등의 부록을 담고 있다. 특히 메이킹은 35인 작가 모두가 등장해 자신들의 제작 기법과 시구에 대한 해석 등을 말하고 있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에 대한 제법 자상한 해설서 역할을 해준다. 거장에서 젊은 작가, 본국인 일본을 포함해 러시아, 벨기에, 캐나다, 중국 등 동양과 서양, 국경을 초월해 오직 ‘애니메이션’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범주 안에서 모인 <겨울 날>.
물론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은 아니다. 하지만 렌쿠가 여러 문인들이 모여 짧은 시구 속에 서로의 재능을 견주며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이듯 애니메이션 <겨울 날>에도 35인 작가들의 개성과 조화가 동시에 살아 있다. 가와모토 키하치로가 말하듯 35인 작가들이 벌이는 몇 십 초간의 짧지만 유쾌한 ‘진검 승부’,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즐거운 이유는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