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철 시모음(2002 창비신인시인상수상)
1975년 강원 원주 출생
배재대 국문과 졸업
현재 원주
불휘문학회, 배재대 문향 동인
2002 창비신인시인상 수상
흉측한 길
아침부터 그 흰 개는 길을
깨물고 놔주지 않았다
길 옆 화단의 잡초와 시간을
뽑고 있는 노인들은
잠깐씩
그 흰 개를 바라보고
아카시아 꽃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먼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지만
떨어지기 전
향기를 잃은
꽃잎은
쉽게 남들의 일이 되는 법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트럭이 그 흰 개를 밟고 지나갈 때
그 흰 개는 털을 세우고
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잠시 속도를 줄이며
백미러를 통해 흰 개를 확인하는 운전사
거울에 비친 죽음은
거울에 비친 상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한대의 승용차가 그 흰 개를
밟고, 잠시 갓길에 서서
그 흰 개를 바라보고 있다
그 흰 개의 입은 뭉그러져 있고
터진 옆구리가 길을
삼키기 직전
나는 그 길 건너편
가파른 벼랑을 보면서
장식으로 걸어논
흉측한 길이라고 잠깐 생각했다.
좋은 표현인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았다.
밥 먹는 풍경
둥그렇게 어둠을 밀어 올린 가로등 불빛이 십 원일때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이 손잡이 떨어진 숟가락일 때
엠보싱 화장지가 없다고
등 돌리고 손님이 욕할 때
동전을 바꾸기 위해 껌 사는 사람을 볼 때
전화하다 잘못 뱉은 침이 가게 유리창을 타고
유성처럼
흘러내릴 때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와
냉장고 문을 열고 열반에 들 때
가게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진열대와
엄마의 경제가 흔들릴 때
가게 평상에서 사내들이 술 마시며 떠들 때
그러다 목소리가 소주 두 병일 때
물건을 찾다 엉덩이와
입을 삐죽거리며 나가는 아가씨가
술 취한 사내들을 보고 공짜로 겁먹을 때
이놈의 가게 팔아버리라고 내가 소리 지를 때
아무
말 없이 엄마가
내 뒤통수를 후려칠 때
이런 때
나와 엄마는 꼭 밥 먹고 있었다
2004년 「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
약력 없는 시인
약력 없는 시인은 백살까지 살아도
삶이 너무 짧다
백살까지 늙지 않고 글을 써도
좋은 시를 한편도 쓸 수 없다
새로 나온 시집을 펼쳐들고
중년 시인의 괴로움을 생각한다
그는 근 이십년 동안 자신의 시집
안쪽 표지에 한줄의 약력도
늘리지 못했다
출생과 한권의 시집
몇권의 시집이 더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만
애석하게도 그 시집들은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출판사다
약력 없는 시인은 시집을 내기 전에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쓰지 못한 것이 무언지
왜 자신의 시가 서정적인지
창작과비평(2004년 여름호)
거친 나무상자
사과나무 아래에는
녹슨 전기밥솥과 뒤집어진 양말 한짝
과수원집의 대문 문고리가
벌레 먹은 사과
옆에
떨어져 있고
빈집 벽에는 내가 그려논
몇 덩어리의 달이
풀숲에 엉겨 있는
김씨와 김씨의 아내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사과나무 그림자는 대문처럼
사과나무 아래 검게 닫혀 있고
사과나무 그림자 속으로
몰래 들어가버린 김씨와
사과나무 그림자를 버리고 떠난
김씨의 아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사과나무 이파리 사이로
한입 베어먹은 사과처럼
옷을 추스르고
사과나무 아래
버려진
거친 나무상자에는
썩은 사과와 잎들이
쌓여 있고
이끼 낀 상자바닥은 축축하게
사과나무 뿌리에 엉겨붙은
김씨의 아내의 거웃처럼 젖어 있다
2002년 《창작과비평》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