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안도현 시모음 2

휘수 Hwisu 2006. 2. 23. 18:26

벽시 4

벽에다 슬픔을 쓰지 말아요            

어두운 벽에 막힌 벽에 기대어         

하늘 보이지 않는다고 울지 말아요     

벗들이여                             

동네 썩은 벽에                       

학교 낡은 벽에                       

공장 마른 벽에


우리 하나씩 깃발을 그려봐요

깃발이 살아 펄럭여

바람을 흔들고

우리를 흔들어 줄 때까지

슬픈 벽이 하늘이 될 때까지

벗들이여

벽시 5

 


우리나라 모닥불 근처에는

사람이 있다


살아서 

모여 있다

등짝은 외롭고 캄캄해도

그 가슴이 화끈거리는


모닥불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난 아이 앞에서

비탈진 역사의 텃밭 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 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장이 강물 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 분 전에

쌀밥에 더운 국 말아 먹기 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 전에

압록강 건너기 전에

배 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 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 주는

훅훅 입김을 하늘에 불어놓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 그루 향나무 같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한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 한 장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은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시집, 그리운 여우(1997년 <창작과 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