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휘 시모음
1963년 강릉 출생
고려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97년 <작가세계>신인상
2002년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 문학세계사
2002년
제8회 현대시 동인상 수상 .
대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
폭설
밤에 편지를 쓰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겉봉에서 낡아갔다
회귀선 아래로 내려간 태양처럼
따뜻한
상징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내 거친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눈싸움을 하며 추억을 노래했으나
단단하게 뭉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제설차가 지나온 길은 다시 눈에 덮이고
눈 먹은 신호등만 불길하게 깜박거렸다
바람이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였으므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였다 모두들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고 수상한 암호 만지듯
동전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어두운
창고에서 첫사랑을 생각해야 했다
언 손을 불며 자전거 바퀴를 고치다가
씀바귀며 여뀌며 쑥부쟁이를 몰래 생각하였다
찻잎을 두 번 우리다
녹차 잎을 우려내는 동안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였습니다
작은 봄 잎 같고
잎에 떨어지는 빗물 같은 여자
둥굴게
말려있던 그녀가 꼭 쥔
주먹을 펴 나에게 내밀자
내 손은 어느새 늙었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며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을 해는 금방 남루해졌습니다
차 한 모금 마시는 사이에도
순식간에 저무는 것들
나는 따뜻한 물로 식어버린 찻잎을
한 번 더 우립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찻잎들이 잠시 일었다가 가라앉는 사이
내
사랑은 한없이 엷어졌습니다 어느덧
물 같은 당신에게 갇혀버렸습니다
퇴색한 풍경
고개를 넘어 마을로 들어설 때
이백 년을 넘게 살았다는 그 느티나무 근처로
늦가을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나무는 퇴색한 풍경
하나를 거느리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저녁이 와도
나는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어딘가에 있을 퇴색의 입구를 찾다가
그만 갑자기 늙어버렸다
한철
살다간 매미 울음만도 못하였다
편지, 여관, 그리고 한 평생
후회는 한 평생 너무나 많은 편지를 썼다는 것이다
세월이 더러운 여관방을 전전하는 동안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사랑한다는 말들은 시장을 기웃거렸다
새벽이 되어도 비릿한 냄새는 커튼에서 묻어났는데
바람 속에 손을 넣어 보면 단단한 것들은 모두 안으로 잠겨 있었다
편지들은 용케 여관으로 되돌아와 오랫동안 벽을 보며 울고는 하였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오전에는 삐걱거리는 계단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였는데 누군가는 짙은 향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슬픈
일이었지만
오후에는 돌아온 편지들을 태우는 일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흘러나간 맹세들도 불 속에서는 휘어진다
연기는 바람에 흩어진다
불꽃이 '너에 대한 내 한때의 사랑'을 태우고
'너를 생각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나'에 언제나 머물러 있다
내가 건너온 시장의 저녁이나
편지들의 재가 뒹구는 여관의 뒷마당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나를 향해 있는 것들 중에 만질 수
있는 것은 불꽃밖에 없다
는 것을 안다 한 평생은 그런 것이다
쓸쓸한 향기
봄날 그 꽃향기들이 그러하였듯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꽃은 시들도록 열심히 피었을 뿐입니다
내가 오랫동안
바람 속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러 꽃들이 연달아 피고 졌던 것처럼
내 몸을 제 향으로 스미고 흩어진 사람들
어디에선가
머리 위로 눈물 같은
구름을 피워 올리겠지만 그때
아무 냄새도 없는 구름들은 슬픈 짐승처럼
내게로 걸어와서 또
걸어나가겠지만
내 몸에 쌓인 그대들의 나는 오늘
나는 한없이 쓸쓸한 향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