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모음

신기섭 시모음

휘수 Hwisu 2006. 6. 15. 12:54


1979년 경북 문경 출생
2004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나무도마>로 시부문 당선
2005년 12월 4일 교통사고로 사망

 

이발소 가는 길

 

 

손등에 글씨를 쓰고 날갯짓을 한 문창과 동생,

몸이 무거운 새* 그 날개에 남겨진 글씨; 삶이 무겁다

상투적이지만…… 이발소를 찾아 가는 이 저녁, 삶이

무겁다 벌써 초겨울 낙엽 깔린 佛光洞 골목,

가슴을 내놓고 박수를 치는 여자; 이제 두 돌이 지났다고

많이 컸다고…… (내 눈엔 보이지 않는 무게) 죽은 아기가

크고 있다 나날이 커질 무게, 행복하고 불행한 무게.

그나저나 이발소는 보이지 않고, 제 똥 보고 좋아라 하는

변비 환자같이 떨어진 무게를 굽어보는 홀가분한 가로수들,

처럼 잘라달라고 할까? 뜨거운 이발소 수건에 덮여

벌겋게 익을 얼굴 하얀 거품이 발린 무게 덩어리.

이발사는 칼을 들고 나를 내려다보며 말하리라, 눈 감으세요.

그러나 얼마 만에 와보는 이발소인데 어둡고 한산하다.

의자에 앉아 이발소의 꽃, 달력 속 벗은 여자를 바라본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발기하는 몹쓸 무게 순간

대문처럼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전신거울, 거기

환하게 나타나는 붉은빛 통로! 어서 건너오라고

내게 손짓하는 여자! 잘못 온 길인데 제대로 온 길같이

설레다 머릿속의 무게들이 가볍게 떨리고 온몸 가득

퍼져나가는 (((떨림))) 천천히 입이 벌어지고, 삶이……

상투적이라서 말하지 않기로 한다.

 

 

* 몸이 무거운 새 : 신기섭 시인의 추모 시집 제목

 

추 억

 

봄날의 마당, 할머니의 화분 속 꽃을 본다
꽃은, 산소호흡기 거두고 헐떡이던
할머니와 닮았다 마른 강바닥의 물고기처럼
파닥파닥 헐떡이는 몸의 소리
점점 크게 들려오더니 활짝
입이 벌어지더니 목숨을 터뜨린 꽃,
향기를 내지른다 할머니의 입속같이
하얀 꽃, 숨쉬지 않고 향기만으로 살아 있다
내 콧속으로 밀려오는 향기, 귀신처럼
몸속으로 들어온다 추억이란 이런 것.
내 몸속으로 떠도는 향기, 피가 돌고
뼈와 살이 붙는 향기, 할머니의 몸이
내 몸속엣 천천히 숨쉰다
빨랫줄 잡고 변소에 갈 때처럼
절뚝절뚝 할머니의 몸이 움직인다
내 가슴속을 밟으며 환하게 웃는다
지금은 따뜻한 봄날이므로
아프지 않다고, 다 나았다고
힘을 쓰다 그만 할머니는 또
똥을 싼다 지금 내 가슴 가득

흘러넘치더니 구석구석
번지더니 몸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추억, 향기로운 나무껍질처럼
내 몸을 감싸고, 따뜻하다

 

집 착

 

인사동 cafe vook's앞에 서 있는데
제 의족을 빼서 머리에 베고
길에서 잠자는 사내. 흐린 하늘 꽝!
천둥소리 사내는 눈을 뜨고 다시
의족을 끼운다. 마음에서
잘라버린 덩어리, 나 잠시 거기 머리를 베고 눈
감아본다 사랑해, 너를 아직도!
막 퍼붓는 가을비 번개의 섬광!
빗물이 들어차 소름 돋는 끽끽,
의족 소리 마구 들뜨는 마음.
활짝 펼쳐지는 내 검은 우산 속으로
덩어리 같은 섬광 아, 너의 몸,
들어온다. 오랜 시간 증오의
온도 속 상처는 썩어 물러져서
네 몸에 내 몸을 끼우는 것, 함께
내딛는 것, 한 덩어리 우리.
검은 우산 속에 서 있는데
나의 한쪽 어깨가 젖는다.

 

울지 않으면 죽는다

 

  1

 세상에 나올 때 나는 울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나를 때렸다고
한다
 오늘은 보답하듯 나도 그녀의 가슴을 때렸지만
 

  2

 당신이 기르던 새를 내가 맡았네 당신 박수소리에 울음을 울던 새
내 박수소리에는 울지 않는 새 가만히 보니 방전放電이 된 새 그 가
슴을 열고 힘세고 오래간다는 심장을 넣어주네 딸깍, 피 한 방울 같
은 붉은 빛으로 새의 귀가 밝네 내 박수소리를 듣는 순간 눈꺼풀처
럼 핏빛이 깜박이네 귓속에서부터 몸 속까지 울음의 시간을 전하러
스며드네 뱃속에 품은 알, 전구가 부화할 듯 환해진, 새는 그러나 울
지 않았네 울음 터트리지 않는 갓 태어난 아기 때리듯, 새를 때렸네
그러자 다행히 파란 하늘을 건드리고 온 듯 점점 푸르게 밝아지는
새의 프라스틱 날개 그 두 눈 속에는 분홍빛 동공이 한 점씩 새겨지
네 울음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 울음임을 알았을까 울음으로 꽉
잠긴 듯 환해진 새 다시, 박수를 치네 새를 울리네 또 울지 않았네

 


등대가 있는 곳

 

위층에서 터진 물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는 또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노를 젓는다
여자의 몸이 욕실바닥을 휘젓는 소리
살림이 난파되는 소리 비명소리 속으로
콸콸 물이 쏟아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오후 내내 베란다에 앉아있던 여자의
흐느낌은 물소리였다
이내 길고 긴
골짜기가 되었다 화분이 하나 둘 흘러갔고
앞날을 모르고 웃고 있는
환한 사진들이 흘러갔다
불붙은 편지는 뒷걸음질치며 느리게 흘러갔고
우수수 머리카락들이 흘러갈 때
멀리 먼 바다의 문어대가리처럼 지던 태양은
먹물 같은 어둠을 갈겨 버렸다
그때 첨벙첨벙 어둠을 밟으며
장화 신은 그가 온 것이다

늘 바다 비린내가 나는 그의 몸,
그는 거친 뱃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갑판에 올라본 적 없는 선장
토막나고 썩은 물고기만 가득 싣고
그의 배의 바깥 손잡이를 끌며 허우적댔다
시장과 거리에서,
그는자주 목격됐다

과중으로 인해 배의 뒤축이 침몰해 버릴 때면
그의 굽은 몸도 덩달아 들려 올려져
배와 함께
물 위로 입을 내민 고래처럼 포효하곤 했었다
해가 저물고,
그의 배가 여자의 골짜기 끝에
정박했던 것이다

흘러간 것들을 다시 건져 올라온 그가
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향해를 시작한 밤
물소리는 끝이 없고
도대체 저들은 어디까지 흘러간 것일까
귀를 막고 창문을 내다보면 너무 많은
등대의 불빛, 불빛들

 

나무도마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가족사진

 

그들은 모두 맨 바닥에 누워 있었다
저마다 간격을 두었지만 서로의 핏물이
커튼처럼 그 간격 꼼꼼히 닫아 주었다
무엇을 꼭 끌어안은 모습으로 누워있는 여자의
발치엔 아기가 구토물같이 엎질러져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마다 얼굴을 가린 여자들의
짧은 비명소리 같은 엄마!
(엄마, 언제부턴가 모든 엄마는 비명이었다)
깊이 파헤쳐진 무덤처럼 누워있는 여자
얼마나 귀가 찢어질 듯한 짧은 엄마인가?
혼자 멀찍이 떨어져 누운 여자의 사내는
여전히 술냄새를 풍겼으므로
그의 핏물은 거침없이 여자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피로써 스밀 수 있다는 걸
딱딱하게 굳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눈을 감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 순간
카메라 불빛이 터졌다, 그들도 이 생에서
눈을 뜨고 가족사진을 박는다

 

 

가족사진, 나무도마, 등대가 있는 곳, 울지 않으면 죽는다는 2005 신춘 당선 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