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T/詩관련

시창작노트 / 박제천 (펌)

휘수 Hwisu 2006. 2. 21. 16:46
1. 작품의 수정에는 왕도가 없다

작품을 써내자마자 그 자리에서 달려들어 퇴고를 하는 일은 어리석다.마치 시험문제의 답안을 풀 때처럼 썼다 지우다 보면 무엇이 모범답안인지 종잡기 어렵다. 작품의 결점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냉철한 안목이 필요하다. 작품의 수정에는 왕도가 없다. 작품이 곧 그 시인의 영혼의 산물인 까닭이다. 처음 작품을 완성하고서는 누구나 희열감에 사로잡힌다. 쓰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써내었다는 성취감에 만족하는 것이다. 만일 이때 성취감이나 희열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작품 습작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때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작품 속에 많은 것을 담아내려 했던 사람들이다. 쓰고자 한 바가 많으나한 편의 시에서 그것을 어찌 다 쓰랴.
성취감을 느끼건, 아니면 좌절감을 맛보건 작품을 써내고 난 뒤에는 일단 눈앞에서 치우는 일이 중요하다. 원작자로서는 스스로의 작품에서 결점을 찾아내기 어렵다. 독자가 읽기에는 마치 비밀문서처럼 해독이 불가능하지만 원작자로서는 모를 구석이 없다. 그런 때는 만들어진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길 권한다. 일주일이나 열흘쯤 묵힌 채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에 작품을 다시 꺼내 읽으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결점이 눈에 띄게 마련이다. 객관화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다. 따로 스승이 없이 시를 공부하던 어릴 적의 나로서는 그 방법으로 많은 효과를 보았다.


2. 시에서의 화자찾기


수혈

1* 마른 피를 수혈받아
2* 떨리는 심장으로 일어서고 싶다

1* 오죽하면,
2*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잡초더미
3* 냉정한 바람이 빈 하늘을 흔들고 있다
4* 안단테로 콧소리를 내다가
5* 나는 불안한 가을을 접어
6* 종이학 위에 태워 날려 보기도 했다

1* 온갖 밀담으로 찌든 꿈의 살점
2* 거꾸로 매달려 신음하다가
3* 사생아의 탯줄처럼 버려져 뒹굴었다
4* 실핏줄로 뻗어나간 죄의 피
5* 발끝마다 채이는 더럽혀진 몸뚱아리
6* 드러난 죄, 한겹 옷을 덧입으며 감춘다

1* 캔버스 위에 오솔길을 걷다가
2* 문득 또다른 길이 열리는 것을 똑똑히 본다
3* 한줌 재가 된 살점
4*` 흙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마른 핏자국을

평설

대상 작품은 낙엽을 한평생 죄에 찌들려 살다 가는 몸뚱아리의 비애로 나타냈다. ‘한 줌 재가 된 살점’이라는 죽음을 통해 ‘또다른 길’이 열림을 꿰뚫어보는 삶에 대한 안목에 호감이 간다.
그러나 시를 읽으면서 맨먼저 느껴지는 난점은 시의 화자(話者) 즉, 퍼스나가 통일되어 있지 않은 점이다. ‘낙엽’이라는 화자에 ‘나’라는 화자가 개입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혼동을 가져온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하나인데, 1·2·5연의 ‘나’라는 화자와 3·4연의 ‘낙엽’이라는 화자가 등장하여 시의 초점을 흐려놓고 있다. 퍼스나는 언제나 하나여야 한다. 특수한 경우 둘 이상일 때는 서로 간에 교감이 잘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초심자는 퍼스나를 둘 이상 생각지 않는 게 좋다. 하나 이상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숙련된 테크닉의 소유자이다.
2연의 ‘안단테로 콧소리를~날려보내기로 했다’는 다소 작위적이다. 앞 행과 연관이 없어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고 표현의 미숙성이 엿보이므로, 삭제하는 것이 오히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명료하게 한다. 그리고 ‘불안한 가을’ ‘냉정한 바람’ ‘꿈의 살점’ ‘사생아의 탯줄’ 등의 표현들도 어딘가 낡고 시어로서의 격이 떨어진다. 3연은 그러한 표현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표현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캔버스’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이 갑자기 돌출하고 있어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마지막 연에서 다른 상황이나 분위기를 연출하여 극적인 효과로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있지만, 여기서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앞에서 시의 배경이 그림이라는 암시가 있어야지만, 캔버스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겠다. 또 ‘캔버스 위에 오솔길’에서 ‘위에’는 ‘위의’로 써야 한다. 흔히 조사를 소홀히 하는 예가 많은데, 시에서도 맞춤법은 정확하게 지켜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오죽하면’과 같은 연결 부사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시어로서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이 작품의 수정 방법은 첫째, 시의 화자를 ‘나’로 통일하는 것이고, 또한 캔버스를 오브제로 사용해 시의 골격을 갖추는 것이다. 따라서 어미 처리는 ‘나’라는 화자가 이야기하는 식으로 바꾸었다. 군데군데 어색한 표현들은 삭제하거나 다시 다듬었고, 의미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행과 연을 갈라 보았다.
둘째, 시인의 당초 의도대로 ‘수혈’을 오브제로 사용한다면 수혈과 관련된 정보를 새로이 도입해야 한다.
원작자가 그후 어떻게 수정했는가, 수정 작품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첫번째 수정 방법으로 개작해 보았다. 캔버스를 오브제로 삼아 낙엽을 작품화해 본 것이다. 그러나 제2연은 원작자의 작품에 의존한 관계상 표현의 무잡성을 가실 수 없었다. 구성과 전개를 특히 유의해 보길 바란다.

수정

낙엽

낙엽의 빛깔, 흑갈색 어두운 땅의 빛깔
그 마른 피의 빛깔들을 화판 가득 짓이긴다

비 한방울 내리지 않은 잡초더미
바람은 빈 하늘만 냉정하게 흔들고
온갖 이야기들로 얼룩진 꿈들은
거꾸로 매달린 채 신음하다
버려져 나뒹굴고 있다
발끝마다 더러운 몸뚱이들이 채이고 채여
어리석은 꿈들이 자꾸만 드러나고
또다른 어리석은 꿈들이 그 위를 덮지만
실핏줄로 번져나간 저 죄의 피들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캔버스 속 오솔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한 줌 재가 되어가는 낙엽들을 바라보면서
흙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마른 핏자욱 사이로
또다른 길이 열리고 있음을,
나는 화판 가득 또다른 색을 꿈꾼다


3. 어미처리와 애매 모호한 표현


대상 작품

봄 풍경화를 보다가

1* 복사꽃이 일제히 쏟아지고
2* 푸른 잎들은 날개를 퍼득대며 날고
3* 동시에
4* 백지에 그려 보아라
5* 찰랑대는 초록 바람의 설레임과
6* 가슴 위에 앉았다 가는 싱그러운 말들을
7* 한꺼번에 그려 보아라
8* 그 위에
9* 빙글빙글 돌다가 부서지며
10*일제히 눈을 뜨는 봄햇살의 입김을
11*가만히 포개보아라

1* 나는 얼마나 가질 수 있을까
2* 손으로 잡은
3* 이 귀중한 시간 앞에서
4* 제 정신이 들면 부끄러운 것들보다
5* 먼저 걸어가
6* 공으로 차지할 수 있는
7* 이 웃음들을
8*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

1* 스산한 가슴보다
2* 빨리 가는 눈빛을 쫓아
3* 봄 풍경화 속에 맑은 눈동자를
4* 삼키고 싶다

쫊 평설

시에 있어서 한 행을 마무리짓는 어미 처리는 시어를 선택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아무리 잘 다듬어진 시라고 해도 어미 처리가 미숙하면, 리듬감을 살리지 못할 뿐더러 시의 흐름을 방해한다. 이것은 사용하는 어미에 따라 어법이나 시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는 구미의 시나 한시와는 달리 각운이나 두운이 없다. 시조에서와 같이 3·4조니 7·5조니 하여 형식적으로 운율을 정해 놓은 것도 있지만, 현대 자유시는 내재율로서 운율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인이 가지고 있는 정서적인 긴장감이나 호흡이 운율로 나타나거나, 어미 처리로써 형식적인 운율을 맞추어 갈 수밖에 없다.
어미는 시의 전반적인 내용이나 흐름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예를 들어 과거형·현재형·미래형을 쓸 것인가, 감탄적이거나 명령적인 어미를 쓸 것인가 등을 적절하게 선택하여야 한다. 어미를 잘못 선택할 경우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달라질 수도 있고, 어미를 잘 선택함으로써 더 좋은 효과를 보는 수도 있을 것이다.
위의 시는 봄의 싱그러움과 화사함을 그려보고자 했으나, 어미를 잘못 씀으로써 그러한 기분을 반감시키고 있다. ‘~해 보아라’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할 것을 명령하는 어미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느낀 바를 다른 사람들이 함께 느껴주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어미는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명령이나 권유형 어미로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
시에서 명령적인 어미를 꼭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민중시나 노동시 등에서는 이러한 어미를 사용하여 효과를 보는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강압적인 어미로써 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어려우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시는 유연하게 읽히기에는 애매 모호한 부분이 많다. 특히 2연의 시작부터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 논리를 갖추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다. 미숙한 어휘 선택으로 행과 행의 연결 고리가 없이 끊어진 채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특히 ‘손으로 잡은 귀중한 시간 앞에’나 ‘먼저 걸어가 공으로 잡을 수 있는’ ‘스산한 가슴보다 빨리 가는 눈빛을 쫓아’(쫓아는 좇아가 바른 맞춤법이다)는 그 뜻이 불분명하고 격이 떨어지는 표현들이다.
시는 언어와 언어가 서로 만나 새로운 이미지와 뜻을 조화롭게 창출해 내는 것이다. 그것이 서로 충돌하여 새로운 의미는커녕 앞서의 좋은 이미지까지 흐트려 놓을 수도 있으며, 독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암호문과 같이 되는 수도 있다. 언어와 언어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로 증폭시키고자 할 때는, 앞뒤 행과 그 뜻이 서로 연결되는 것인지, 또 분명하게 전달되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한다.
시를 다듬는다는 것은 지은이 자신이 독자가 되어 객관적으로 자기 작품을 되짚어보는 것이다. 시는 가슴에서 쏟아져나올 때 한 번 써서 그대로 작품이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다시 읽어보면 표현이 거칠거나 호흡에 거슬리는 곳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시는 한 번 써서 내팽겨치듯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언어를 선택했는지, 알맞은 표현을 했는지, 호흡이 거슬리는 곳은 없는지, 몇 번이고 읽어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습작기에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좋은 시를 쓰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이다.
위의 시는 어미를 새로이 바꾸고 불분명하게 전달되는 행들을 삭제해 보았다. 그리고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몇 행을 새로이 바꾸고 추가시켜 보았다.

쫈 수정

봄 풍경화를 보다가

복사꽃이 일제히 쏟아지고
푸른 잎들이 날개를 퍼득대며
날아오르는 모습을
백지에 그려 보리라
초록 바람의 설레임과
가슴 위에 앉았다 가는 싱그러운 말들을
한꺼번에 그려 보리라
그 위에 빙글빙글 돌다가 부서지며
일제히 눈을 뜨는 봄햇살의 입김을
가만히 포개 보리라

이 웃음들 앞에서
부끄러움보다 먼저 달려가는
나의 눈빛,
그림 속 저 많은 눈빛이
나를 지켜보는
봄날.


4. 은유와 통일성

시란 시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짤막한 형식 속에 은유의 기법을 통해 담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은유의 기법은 하나의 물줄기처럼 통일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고, 독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 은유를 통일성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은유를 담아낼 수 있는 중심 오브제를 설정해야 한다. 모든 은유는 이 중심 오브제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줄 달린 공과 같이 아무리 멀리 내던져도 끝내는 줄을 따라 공을 던진 손안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초심자들은 은유의 기법은 알되,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하나의 문장은 나무랄 데 없으나, 전체적으로 의미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거나, 전하고자 하는 의미의 반대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중심 오브제를 설정하지 않은 채 앞의 행과는 관계 없이 독립적인 은유를 사용하는 데 문제가 있다.
시는 매 행이 문장으로는 독립적이되 의미상으로는 연결이 되어야만 한다. 멋진 문장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연결되어졌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었는지가 시의 성패를 가늠한다.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 위해 줄기, 잎, 뿌리가 필요하듯, 한 편의 시를 위해 줄기와 같은 언어, 잎과 같은 언어, 뿌리와 같은 언어들이 제 위치에 놓여져 있어야 할 것이다


5. 너무 많은 소재의 남용


대상 작품

가을비

1* 어스름한 저녁 무렵 약속없는 빗줄기를 만나면
2* 오던 길을 뒤돌아 봅니다
3* 빗길 저 끝으로
4*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가 서 계십니다
5* 고불고불 골목마다
6* 이름없는 들풀이 비를 맞습니다
7* 명분 세운 고목나무도
8* 비에 젖습니다
9* 이리저리 이럭저럭 함께 왔으니
10*스스로 대견하여 손길이 다정합니다
11*비에 젖은 불빛이 말을 시작하자
12*가장들은 젖은 어깨 위에
13*고단한 생활을 올려놓고 바삐 갑니다
14* 나는 맨 몸을 다시 걸으며
15* 그러려니 하고
16* 초라한 삶을 웃어봅니다

평설

처음 시를 쓰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작품이다. 초심자의 경우, 한 편의 시 속에 많은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본 것, 느낀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시가 산만해지고 긴장감을 잃고 만다. 그리고 언어의 선택에도 문제가 있다. 어휘력이나 언어에 대한 감각이 부족하여 부적절한 비유법을 사용한다거나, 상투적인 표현을 하는 점 등이다.
위의 시를 살펴 보자. 비가 오는 날의 저녁 풍경을 할머니, 풀잎, 고목, 불빛, 귀가하는 가장들을 소재로 삼아 그려내고 있지만, 정작 지은이가 이 많은 소재들을 통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지은이는 14행부터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할 지 모른다. 독자들도 그렇게 짐작은 하겠지만, 구체적으로 닿아오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어떠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꼼꼼히 따져 보기로 하자.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 ‘이름없는 들풀’ ‘명분 세운 고목나무’ ‘가장들의 고단한 생활’ ‘초라한 삶의 나’는 모두 함께 비를 맞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서로 어떤 연관성을 지니지 못하고, 비오는 저녁의 풍경을 단순히 나열한 것으로 그치고 있다. 각기 이야기는 성립하되, 전체적으로는 서로 어떠한 영향도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초심자들은 이야기를 벌려놓고 그것을 다시 하나의 구심점을 향해 몰아가는 힘이 부족한 탓이다.
시를 포함해 모든 글은 초점이 뚜렷해야 한다. 시는 짧은 형식에 비유법을 위주로 내용을 전달하므로 더욱 그러하다. 위의 시는 모든 소재들이 제각기 하나씩의 이야기로 독립되어서, 시의 초점을 흐려놓고 있다. 지은이가 비 오는 저녁 우산도 없이 맨몸으로 걷고 있는 초라한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했다면, 앞의 소재들은 모두 자신과 연관된 어떤 내용들이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독자들을 설득시키고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주위 풍경의 감상적인 묘사가 아니다. 그 묘사 속에 자신의 감정이나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들어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의 상징성이며 묘미이다.
잘못된 표현에 대해 지적해 보기로 한다. 이 시는 거의 모든 행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지만, ‘약속없는 빗줄기’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 ‘명분 세운 고목나무’ ‘초라한 삶’은 특히 거슬리는 부분이다. 낡은 언어끼리, 혹은 의미없이 갖다 붙인 언어의 결합은 시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예를 들면 ‘사주팔자 짚어가던 할머니’는 이 시의 이미지와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비 오는 날과 할머니, 그것도 사주팔자를 짚어보시는 할머니를 떠올릴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독자들이 시를 읽고 공감하는 것은 자신도 그러한 체험이나 느낌을 가졌을 때이다. 개인적인 체험이 아닌 보편적인 체험이나 감정만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 또 ‘명분 세운 고목나무’는 앞뒤 행을 읽어보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이렇게 자신만이 알고 있거나, 그럴 듯하다고 해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마구잡이로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시는 일단 언어를 도구로 삼아 표현하는 예술 행위이다. 아무리 머리 속에서 뛰어난 발상이나 고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더라도, 표현된 언어 자체가 유치하면 시 역시 그러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다. 아직 언어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아마추어 때일수록 더욱 언어를 치열하게 갈고 다듬어야 할 것이다.
5, 6행의 골목길과 들풀은 말의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골목길에 들풀이 어떻게 자라고 있겠는가. 시가 상상의 세계라고 해서 아무 말이나 서로 연결시켜 놓아서는 안 된다. 그 상상의 세계에서도 논리가 있고 질서가 있는 법이다. 9행과 10행의 대화체는 누가 하는 말인지 불분명하다. 지은이 자신이 하는 말인지, 11행에 나오는 불빛이 하는 말인지를 분명하게 처리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리저리 이럭저럭’과 같이 불필요한 부사가 중첩되었으며, 누가 함께 온 것인지 무엇이 대견한지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 다음 11행과 12행에서도 불빛과 젖은 어깨의 가장 역시 무의미하게 연결되어 있다.
위의 시는 전체적인 의미가 통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수정해야 할 곳도 많아 고치기가 쉽지 않다. 필자는 이러한 때 작품을 버리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자신이 꼭 쓰고 싶은 작품이라면 언젠가 다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고 약간의 수정만 가해 보았다.

수정

가을비

어스름한 저녁 무렵 빗줄기를 만나면
오던 길을 뒤돌아 봅니다
빗길 저 끝 골목마다
이름없는 풀들이며 나무들이 비에 젖어듭니다
비에 젖은 불빛은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들의 고단한 어깨 위에
초라하게 흔들립니다
나는 우산도 없이 걸어가며
삶이란 다 그러려니
가볍게 웃어봅니다


6. 낡은 시어와 새로운 시어의 차이


대상 작품

봄은 비를 타고서

1* 오고 있다
2* 봄이 비를 타고서
3* 가녀리나 힘찬 빗방울로
4* 아파트 담 옆에 무심코 서있는
5* 라일락 뿌리를 잘게 두드리며
6* 멈추어 무뎌진 내 이마를
7* 부드럽고 날렵한 손으로
8* 쓰다듬으며 풍성히 적시고 있다
9* 잠에서 깬 나는 수천의 나비가 되어
10*공중에 푸르게 날아올라 날개에 묻은
11*어제의 습기를 햇빛에 털어 말린다

1* 신문배달 소년의 무거운 팔 위
2* 때 늦은 경비 아저씨의 피곤한 새벽잠 곁에
3* 봄은 잃었던 판도라의 상자 하나씩 몰래 놓아두고
4* 멀리서부터 조여매고 왔던
5* 운동화 끈을 풀어놓고 비를 따라간다
6* 마음껏 춤추며 놀다가
7* 새롭게 깃을 갖추는 나에게 손 흔들며
8* 봄이 가고 있다
9* 비를 타고서

평설

이 시는 ‘봄비’를 통해, 새로운 각오로 충만되어 있는 작자 자신의 부푼 희망을 나타내고 있다. 문장들은 나무랄 데 없이 씌어져 있지만, 그것들이 서로 어떤 고리로써 연결되어 있는지, 작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가 잘 표출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1연의 9·10·11행과 2연의 4·5·6·7행은 서로 연관된 이미지를 지니면서, 이 시의 중심 내용으로 떠오르고 있다. 봄이 오면 사람들은 흔히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한 마음을 ‘수천의 나비’ ‘날개’ ‘햇빛’ ‘조여맸던 끈을 풀다’ ‘새로운 깃’ 등의 시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시어들은 작자가 임의로 선택한 것이지만 해당 언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의미로써 씌어진 것이 아니라 작자가 의도하고 있는 또다른 의미로 읽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은유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어들이 너무 평이하고 낡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독자들은 그러한 표현들에 이미 식상하다. 새롭고 참신한 시어들을 찾아내는 데 더욱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어라는 것은 조어(造語)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언어에 또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그 의미가 신선할 때에 독자들은 감동하게 된다.
가장 큰 문제점은 이 시의 중심이랄 수 있는 1연의 9~11행이다. 현재 봄비가 힘찬 빗방울로 내리고 있는데 나비를 등장시키는 것은 억지일 수밖에 없다. 또 어제의 습기를 햇빛에 말린다는 것도 논리상 맞지 않는다. 이렇듯 문맥이 통하지 않으면 독자는 더이상 시를 읽어나가지 않는다.
군더더기를 더 지적해 보자. 1연의 4행은 앞뒤 행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시는 압축과 긴장의 묘미이다. 4행은 오히려 긴장을 흐트려 놓고 있다. 6행의 ‘멈추어’는 무슨 뜻인지 불분명하게 씌어졌다. 9행의 ‘잠에서 깬’ 역시 군더더기이다. 그것이 단순히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각성을 뜻한다면 앞뒤에서 받쳐줄 수 있는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이다.
2연에서 1·2·3행은 이야기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흘렀다고 할 수 있다. 1연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 2연에서 갑자기 신문배달 소년과 경비 아저씨가 등장한 것은 시의 주제를 비껴나간 것이다. 작자가 자신의 주제를 더이상 끌어나갈 힘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좀더 치열하게 자신의 내면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3행의 판도라의 상자가 무엇을 뜻하는 지 알 수 없다. 혼자만이 알고 있는 암호와 같은 문장은 독자를 위해 해독해 놓아야 전체 문맥이 통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2연의 8·9행에 해당하는 시의 마무리 부분을 보자. 너무 쉽게 처리하여 앞의 내용들을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
도입부에서 봄이 오고 있다고 했다가 봄이 가고 있다로 끝을 맺게 되면 봄이라는 한 계절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시간대의 폭이 너무 크고 지속적이어서 변화를 갖기가 어렵다. 시의 마무리는 전체적인 흐름이나 내용을 뒤바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부분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수정한 시를 읽어 보자. 첫행은 도치법으로 시작했는데, 그 효과가 별로 뛰어나지 못하여 다시 바꾸어 놓았다.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연을 새로이 갈랐다. 제목이 너무 평이하므로 다른 것으로 붙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수정

우화(羽化)

봄이
비를 타고 오고 있다
가녀리나 힘찬 빗방울로
무디어진 내 이마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손으로
나의 오랜 잠을 깨워 놓는다
라일락 뿌리,
목련의 푸른 줄기를 두드리는
비를 따라
한겨울 내내 조여매었던
내 마음의 고치실을 풀어낸다

봄 햇살이 반짝이고
나는 새롭게 깃을 갖춘다
공중에 푸르게 날아올라
날개에 묻은 습기를 털어낸다

수천 수만의 날개들이
봄의 빛깔로 물들어
햇살을 타고 날아오르고 있다.


7. 시는 멋있는 문장의 나열이 아니다

시란 멋있는 문장의 나열이 아니다. 시의 언어는 단순히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영혼을 가진 어떤 것이다. 즉 시인의 영혼 속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언어와 결합하여 새로운 뜻을 파생시킴으로써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 주며, 시인의 정신세계를 담아낸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라고 해도 그 속에서 언어의 영혼을 읽을 수 없다면, 독자의 감동을 얻을 수 없다.
시 속에도 논리가 있다. 시가 상상의 산물이고 시어가 언어의 영역을 뛰어넘는다고 해서, 무조건 언어를 골라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또 상징이라고 해서 무조건 설명이나 이해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상징이란 남들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상징성을 띠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더라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자동기술법으로 쓰는 시에 어떻게 논리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동기술법으로 쓰인 시도 읽어보면 시인의 무의식적인 정신세계이지만, 그 속에서도 한줄기 정신의 가닥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의식의 상태에도 논리 체계가 들어 있다. 시란 곧 시인의 정신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시란 멋있는 문장의 나열이 아니다. 시의 언어는 단순히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영혼을 가진 어떤 것이다. 즉 시인의 영혼 속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영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른 언어와 결합하여 새로운 뜻을 파생시킴으로써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 주며, 시인의 정신세계를 담아낸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라고 해도 그 속에서 언어의 영혼을 읽을 수 없다면, 독자의 감동을 얻을 수 없다.
시 속에도 논리가 있다. 시가 상상의 산물이고 시어가 언어의 영역을 뛰어넘는다고 해서, 무조건 언어를 골라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또 상징이라고 해서 무조건 설명이나 이해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상징이란 남들도 다 이해할 수 있어야 상징성을 띠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다면, 아무리 좋은 뜻을 지녔더라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자동기술법으로 쓰는 시에 어떻게 논리가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자동기술법으로 쓰인 시도 읽어보면 시인의 무의식적인 정신세계이지만, 그 속에서도 한줄기 정신의 가닥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무의식의 상태에도 논리 체계가 들어 있다. 시란 곧 시인의 정신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8. 산문과 설명


대상 작품

침묵

1* 거실바닥에 몇 장의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2* 사각의 작은 연못
3* 스물 일곱 마리의 크고 작은 고기들이 이 구석
4* 저 구석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헤엄치고 있다
5* 한 마리가 물을 당기며 수평선을 긋다가
6* 수직으로 가라앉으며 물을 늦춘다
7* 다른 한 마리는 여유자작 공간을 넓히다가
8* 또 좁히고 고기들이 물 속 깊이 흘러 들 때
9* 마다 고기들 진행이 달라질 때 마다
10*연못은 수직과 수평 구도 피라밋과 대각선 구도
11*대칭과 L자형 구도 물 속 풍경은 수없이 수없이
12*바뀐다 고기들 세상이 달라진다 물이 연못이
13*흔들린다
14*고여 있는 물이 흐르는 것은
15*고기들의 지느러미로 물을 갈라 놓았기 때문이다
16*흐르는 물은 빠르게 빠르고도 헛되게 썩지 못한다
17*소리내어 흔들려도 변하지 않는 것은 말없이
18*잠겨있는 몇개의 돌덩이 뿐

1* 말이 없다.

평설

위의 시는 연못과 물고기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길다. 시에는 ‘언어의 경제성’이란 무언의 법칙이 있다. 시와 산문의 차이를 들라면 우선 시의 짧은 형식을 들 수 있다. 짧은 형식 속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려면 불필요한 말은 생략해야 한다. 즉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효과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연못이 등장했다가 물고기에 대한 묘사가 계속된 다음, 다시 연못이 나오는 것은 시의 흐름을 깨뜨리고 만다. 시의 흐름은 질서 정연하게 순서대로 다음의 상황을 연출하여야 한다.
따라서 11행부터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했지만 앞에서 연못에 대한 장황한 묘사 때문에 그 효과가 줄어들고 있다. 시는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감지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16행은 잠언적인 구절이지만, ‘빠르게 빠르고도 헛되이’와 같이 무슨 뜻인지 모를 낱말들이 겹쳐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 9행, 13행에서와 같이 행을 제멋대로 가르는 것도 유의해야 한다. 행은 시의 호흡을 위한 것이지, 기분에 따라 바뀌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산문적이고 불필요한 부분을 지워보았더니 오히려 작품이 말끔해진다. 이 작품은 시의 이미지를 제대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장황한 설명으로 군더더기를 삼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기도 하지만 원작자가 독자를 과도히 의식한 나머지 설명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수정

침묵

거실바닥에 몇 장의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사각의 작은 연못
물고기들이 물 속 깊이 흘러들 때마다
물고기들 진행이 달라질 때마다
연못은 피라밋과 대각선 구도
대칭과 L자형 구도
물고기들 세상이 달라진다
물이 연못이 흔들린다
스물 일곱 마리의 크고 작은 물고기들
물을 당기며 수평선을 긋다가
수직으로 가라앉으며 물을 늦춘다
고여 있는 물이 흐르는 것은
지느러미가 물을 갈라 놓았기 때문이다
흐르는 물은 헛되이 썩지 않는다
소리내어 흔들려도 변하지 않는 것은 말없이
잠겨 있는 몇 개의 돌덩이뿐

말이 없다.


9. 시에서의 논리


대상 작품

단순판단

1* 새벽까지 켜진 불빛은
2* 자기 욕망의 밝힘만은 아니다
3* 길을 밝히거나
4* 장애 표시로 켜 있거나
5* 맡은 일 하나씩은 비추고 있다

1* 항공기 장애등이 깜빡이는 옥상
2* 새벽은 언제나 안개로 열리는데

1* 안개는 분명 산 밑에서 와서
2* 작은 골목 큰 골목을 쉽게 넘치지
3* 지붕을 남기고 불빛을 남기고
4* 나중엔 그도저도 다아 삼키고
5*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십사층 옥상엔
6* 뛰어내려도 포근할 듯 발 밑은 안개

1* 안개에 휩싸인 가등 행렬
2* 세사에 파묻힌 시인의 행렬

평설

시에도 논리가 있다. 아무리 훌륭한 상상력이라도 독자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쓸데없는 넋두리에 불과하다. 씌어진 내용이 읽는이에게 충분히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시적 논리의 필요성이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치거나 혹은 아름답고 멋진 문장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횡설 수설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시를 쓸 때의 시인의 자세는 이성적이어야 한다. 시를 쓰게 만든 어떤 감정이나 감상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으면, 시적 논리는 자연스럽게 갖추어지게 된다.
이 시는 시적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연과 연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없다. 불빛이 비치다가 안개가 끼어들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선명하지 않다. 제목조차 관념적이어서 더욱 혼돈스럽다.
이럴 경우에는 한 줄기의 이야기만 남긴 채 다른 구절들은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멋진 표현이라서 버리기 아깝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시 전체를 망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연 4행의 ‘장애 표시로 켜 있거나’는 불빛이라기에 애매 모호하다. 신호등을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이런 때에는 ‘장애 표시로 켜진 신호등이거나’로 분명하게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 좀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그리고 5행의 ‘맡은 일 하나씩은 비추고 있다’는 어딘가 어색하게 읽혀진다. 그 이유는 마치 번역된 문장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시인들 중에서도 마치 번역시를 읽는 듯한 시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 문장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이다. 우리 말의 어법을 제대로 익혀서 올바른 문장을 사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제목 「단순 판단」은 그대로 두고 이 시를 고쳐 보도록 하자. 관념적인 제목일 경우 시의 내용은 좀 더 구체적이 되어 제목이 의도하려는 바를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반대로 시의 내용이 관념적일 때는 제목을 구체적으로 붙여 시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도록 하는 것이 실패하지 않는 요령이다.
특히 마지막 연은 비약이 지나친 감이 있다. ‘안개에 휩싸인 가등 행렬’과 ‘세사에 파묻힌 시인의 행렬’이 대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시를 곰곰이 훑어보아도 이해할 수 없다. 가등 행렬과 시인의 행렬을 하나로 꿰어줄 수 있는 매개어가 어디엔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있든 숨겨져 있든, 읽는 이가 납득할 수 있어야 시적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짐작컨대, 제 몫의 반짝임을 다 해낸 불빛들이 새벽 안개 속에 사라져가는 광경을 내려다보며, 지은이는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을 나타내고자 한 것 같다. 그러한 의도를 구체적으로 풀어 쓴다면 명료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수정 작품은 어색한 어휘와 흐름을 막은 걸림돌을 삭제하고, 연결 어미를 제거한 것이다. 1연의 3,4행과 3연의 6행 그리고 4연을 모두 삭제했다. 새로이 마무리를 만들어야 하지만 버리는 것도 좋은 수정 방법이다. 한번 쓴 작품을 애지중지할 필요는 없다. 그 안에 좋은 이미지가 담겨 있었다면 뒷날 다른 작품을 쓸 때 다시 써지게 마련이다.
원작자는 특히 시와 산문을 다르다고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다. 왜 시와 산문이 다른가. 쓰고자 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은 시나 산문이나 같다. 다만 시에서는 행의 바뀜, 연의 바뀜, 주격의 생략 등이 허용될 뿐이다. 시라 해서 뜻이 통하지 않는 구문까지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뜻이 통하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아닌가. 많은 초심자가 시에서 마음대로 상황을 바꾸거나 낱말을 생략한다. 본인은 그래도 다 뜻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은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시의 기본은 우선 전달이 되어야 하고, 전달이 되어야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며, 설득력을 가져야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감 속에 감동의 폭이 정해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수정

단순판단

새벽까지 켜진 불빛은
누군가를 밝혀준다.
제몫의 빛을 비춘다

항공기 장애등이 깜빡이는 옥상
새벽 안개가 풀린다

안개는 산 밑에서 와서
작은 골목 큰 골목을 쉽게 넘쳐온다
지붕만 남기고 불빛만 남기고
나중엔 그도저도 다아 삼키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24층 옥상에 서서
안개와
안개 속으로 사라진 작은 불빛을 생각한다.


10. 생각나무의 가지치기

사람들의 생각이란 무한한 것이고 시시각각 변화한다. 하나의 사물을 앞에 두고 몇 초 사이에도 이 생각 저 생각이 서로 얽혀 들고, 하나의 생각도 다시 갈래갈래 갈라져간다. 산문이란 그 모든 생각을 다 포용하여 가닥을 잡아나가는 것이고, 시는 처음부터 생각의 줄기를 잡아채어 끈질기게 그것의 뿌리까지 뽑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의 생각나무가 있을 때, 산문은 그 기둥 줄기에 가지며 잎을 달아주면서 무성하게 키워나가는 것이다. 시는 반대로 가지며 잎을 쳐내면서 그 기둥 줄기를 하늘 높이 키워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가지나 잎은 치되, 그 나무가 진짜 나무로 보이도록 색채며, 형용이며, 특성을 탄력적으로 배치해야만 된다. 그래서 눈을 감아도 그 나무가 보일 수 있는 시각성과 청각성, 감각성을 고루 갖추어 실체화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이 떠올라 시를 쓰고자 할 때, 우선 스스로의 감정을 견제하고 다스려 객관화시켜야 한다. 비논리적으로 좌충우돌하는 감정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산문에서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풀어헤치며 그 근원을 찾아가는 데 반해, 시는 처음부터 그 근원을 밝혀내고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시는 추상적으로 빠지기 쉽다. 작자 자신이 확신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명확한 자기 의사를 밝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이 구체적이지가 못하고 대강 얼버무리거나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표현을 하게 된다.
시는 감정의 산물이 아니다. 그 감정을 이성의 힘으로 다스려, 언어라는 인간의 고도한 의사소통 수단을 통해 표출해내는 것이다.


11. 설명과 비논리성


대상 작품

풍경화

1* 내 방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2* 그림이 창문 너머로 끝없이 이어져 보인다
3* 하얀 알루미늄 창밖에 서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를 지나
4* 동네 가운데로 난 골목길 옆으로 이웃집 낮은 지붕을 따라가 보면
5* 저만큼 북한산이 우뚝 서 있고 북한산 너머 너머로
6* 파란 하늘이 파랗게 이어져 있다
7* 세상은 이처럼 끝없이 가는 걸까
8* 문득, 어린아이처럼 세상이 신기로워
9* 두 발을 가지런히 모은 나의 다리가 신기로워
10*작은 발 아래 누운 그림자가 신기로워
11*물 속에서 물빛으로 이어지는 생각이 출렁인다
12*안에 갇힌 눈동자는
13*언제나 밖의 풍경을 그리는 것일까
14*창 밖으로 펼쳐진 그림을 들여다 보는
15*창문 이쪽에 사는 커다란 내 눈에
16*그림 저편 하늘이 들어와 흔들린다
17*내가 아는 빛깔 몇 개
18*내가 외울 수 있는 나무 이름 수십 개
19*스쳐지나간 얼굴까지 포함한 만남 수백개 너머로
20*지금도 끝없이 이어져가는 풍경들
21*창 밖에 뜬 하늘이 나를 부르듯
22*빨강은 파랑을 보고 제 빛을 깨닫고
23*기쁨으로 뛰어가는 햇살 그리며 슬픔의 빗방울 땅 위로 흘러간다
24*내 눈 속에 비친 세상은 이렇듯 끝없이 이어지고
25*그리움 속에 사는 나는
26*그 무엇을 그리며 가는 것일까

평설

위의 시는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들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행을 갈라 놓았을 뿐이지 산문과 다름없는 부분들이 눈에 많이 띈다. 또 설명적인 구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의 논리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의 가장 큰 난점으로 설명과 비논리성을 지적할 수 있다.
1행에서 6행까지의 설명은 소설이나 수필과 같은 산문에서나 쓸 수 있는 것으로 시에서는 군더더기다. 시의 특징은 바로 짧은 형식에 있으므로 시를 쓰게 된 배경까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꼭 필요하다면 두드러지지 않게 한 단어나 한 행 정도로 줄여 넣어주는 것이 좋다.
이제 비논리성에 대해 지적해 보자. 9행과 10행의 다리와 그림자 다음에 11행에서 갑자기 물이 등장한다. 다리와 그림자와의 연관성은 이해되지만, 방안 어디에 물이 있으며 그것이 작자의 다리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21~23행 역시 앞 뒤 문맥이 서로 상통하지 않는다. 하늘과 빨강과 파랑색, 햇살과 빗방울이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지, 즉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 비유나 상징성을 띠고 있는지 오리무중이다. 더구나 기쁨으로 뛰어가는 햇살은 화창한 날씨의 이미지인데 빗방울이 함께 내린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시에 들어 있는 소재를 살펴보자. 창문―다리궊け琉꼭汶す가ごサ오汶で求찼ず兮咫こすァぞ茶샥で憑議ず篇嚥?nbsp; 등이다. 이 많은 소재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꿰어지지 않는다. 통일된 이미지, 즉 초점이 없는 글이다. 단지 마지막에 가서 ‘그리움’이란 시어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작자는 ‘그리움’이라는 시어를 항상 염두에 두고 모든 소재를 그쪽 방향으로 다시 몰아가야 한다. 이 시가 이렇게 실패한 이유는 시란 감정의 산물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분출되어 나오는 느낌이나 생각을 여과하지 않은 채 그대로 옮겨 적었기 때문이다. 초심자의 경우, 마음에서 쏟아져나오는 그대로를 옮겨 적은 후에 그것을 다시 다듬고 압축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한 작업을 오랫동안 거듭한 후에야 자신의 감정을 여과하여, 그때그때 시로 옮겨적을 수 있는 힘이 길러지게 된다.
이때 주의해야 할 일은 시에서의 압축이란, 큰 것을 작게 뭉쳐내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 많은 것을 읽어내는 힘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즉 독자가 볼 때 압축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지, 시인이 뭉뚱거려 부피를 줄이는 게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의 대상 자체를 단출하게 잡아야 한다. 전체보다는 부분적인 데 초점을 잡아,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낸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시는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제거하고 작자의 생각을 차근차근하게 다시 정리하는 작업부터 해야 할 것이다. 아래 수정된 시는 구조상 기·승 부분에 해당한다. 전·결 부분은 작자 자신이 이끌어나가기 바란다.

수정

풍경화

창문을 열면
끝없는 그림이 하늘까지 이어져 있다
안에 갇힌 눈동자는
언제나 밖의 풍경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두 발을 가지런히 모우고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내다본다
내가 아는 빛깔 몇 개
내가 외울 수 있는 나무의 이름들
내 눈에 비친 세상은 이렇듯 끝없이 이어지고
산 너머 푸른 하늘에는
스쳐 지나간 얼굴이 나를 부르고 있다


12. 표현과 설명


대상 작품

새벽 번개

1* 잠들어 있는 것들 위로
2* 불기둥이 떨어져 내린다
3* 가늘고,굵게
4* 길고 혹은 짧은
5* 기둥들이 여기저기서 부서져 내렸다
6* 불 속에 선
7* 은행나무가 어두운 노랑빛을 띠고 있다
8* 땅에 떨어져 내 발에
9* 밟히는 은행잎이 말했다
10*털어 버려라 털어 버려라
11*죽은 세포는
12*나는 누렇게 바래고
13*벌레먹은 내 생각의 잎사귀
14*한 잎도 떨쳐내지 못한다
15*신새벽 떨어지는
16*불기둥 속에 서서
17*가늘고 잘게 쪼개져
18*잎 버리고 또 버리며
19*쑥쑥 자라나는 한 그루
20*나무로 태어나고 싶다

평설

표현과 설명은 다같은 서술이지만, 서술이 그 내용을 변화시킬 때 표현이 되고 그 내용을 되풀이할 때는 설명이 된다.
이 시의 1행에서 5행까지는 제목에서 나타난 새벽 번개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는 비유법에 의한 어떤 감동이나 상징성이 나타나 있지 않다. ‘불기둥’이라는 낱말이 ‘은행나무’와 직접적인 연결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개’라는 낱말만이 들어 있지 않을 뿐이지, 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부분에서 이렇게 시작된다면 독자들의 흥미나 관심을 끌 수 없다.
따라서 이 시는 6행부터 시작되어야만이 긴장감을 줄 수 있다. 1행에서 5행까지도 은행나무를 통해 새벽 번개가 치는 상황을 전달하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수정된 작품에서 어떻게 바뀌었는지 눈여겨 보기 바란다.
퍼스나(화자)에 대해서 분석해 보자. 이 시의 퍼스나는 두 명이다. 처음 은행나무가 퍼스나로 등장하였으나, 시의 진행 중에 슬그머니 두번째 퍼스나인 시인이 개입해 은행나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초심자의 시작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결점이자, 시를 망치는 치명적인 실수이다. 초심자는 시에서는 언제나 단 하나의 퍼스나만 있어야 한다고 믿어야 한다.
퍼스나란 시인이 작품 속에서 다른 사물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좋은 표현법이다. 작자가 다른 화자를 선택하여, 그 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시인의 말과 사물의 발언이 병행하는 것을 이중구조라 하는데, 주의할 점은 둘 중 하나는 노출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는 이중구조를 통하여 더욱 입체적이 되고 상징성을 갖는다. 또 작자가 직접 화자가 되어 이 시에 개입하는 것보다 객관성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은행나무를 화자로 내세워 퍼스나를 하나로 통일하여야 한다. 시의 이중구조라는 것은 한 편의 시 속에 두 개의 퍼스나가 등장하여 서로 얽혀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시에 있어서 시제라는 것은 허구적인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일, 혹은 미래에 생길 일까지 모두 지금 현재의 심정으로 쓰는 것이다. 이 허구적인 현재를 논리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시제를 통일해야 한다. 한 편의 시에서 과거, 현재, 미래까지 여러 가지 시제가 쓰여질 때도 있으나, 그것은 작자의 특별한 의도가 있을 때에 한한다. 초심자는 특히 시제를 과거형이든 현재형이든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이 작품의 시제를 보자. 처음에는 2행의 ‘∼내린다’로 현재형이었으나 5행에서는 ‘∼내렸다’로 과거형이 되었다. 9행에서는 ‘말했다’로 과거형, 14행과 20행에서는 현재형이다. 이렇게 시의 시제가 제멋대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독자들에게 내용에 대한 혼돈을 줄 수 있으며, 시작(詩作)에 대한 무성의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된다.
10행에서 12행까지를 읽어보면 어디까지가 은행나무잎의 이야기인지 작자의 이야기인지가 불분명하다. ‘죽은 세포는’과 ‘나는’이 동격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죽은 세포는’을 ‘죽은 세포를’로 고치든지, 아니면 화자가 바뀌는 것을 분명하게 해두어야 한다.

수정

새벽 번개

길고 짧게, 혹은 가늘고 굵게
불기둥들이
은행나무 머리 위로 부서진다
불 속에 잠든 은행나무가
어두운 노란빛으로 깨어난다
털어버리자, 털어버리자
누렇게 바래고
벌레먹은 생각들,
은행나무 잎들이 땅에 떨어져내린다
신새벽 떨어지는 불기둥 속에 서서
가늘고 잘게 쪼개지는
잎을 버리고 또 버리며
은행나무는 새로이 태어나고 있다


13. 이중구조를 통한 시의 다의성 갖기

현대시는 시인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그 표현은 상상력이 도맡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현대시 쓰기는 상상력이 어떠한 것인가를 이해하고, 얼마나 잘 활용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상상력을 다만 우리가 꿈꾸는 그 무엇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의 창작에서는 꿈꾸는 것이 어떤 것인가, 그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 상상력이다.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현대시는 그 내용면으로는 종합예술의 성격을 갖춘다. 언어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추상의 것을 실제처럼 보여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형상을 갖춘 그 어떤 것, 이를테면 사물을 빌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우리는 ‘오브제’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는 오브제의 형상과 오브제가 갖고 있는 내용을 활용함으로써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은 오브제라는 대리자를 시의 무대에 배치시킴으로써, 그 대리자에게 조명과 음향을 가하고 생동하는 대사를 부여함으로써 무대예술로서의 시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시는 형식적으로는 불과 20행 내외의 짧은 분량이지만 그 영향이나 감동은 대오케스트라나 연극예술과 맞먹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연출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의 힘이다.


14. 구체적인 사물과의 연결


대상 작품



1* 열 개의 손가락에 열두 캐럿의 다이아몬드로 꾸민 너.
2* 비단옷을 걸친 너를 무심코 지나쳤다.

1* 네 눈의 고요를 보고 다가갔다.
2* 네 입가의 미소를 보고 가까이 갔다.
3* 네 조용한 심장의 박동을 듣고 안도했다.
4* 네 무채색의 표정을 보고 평화를 읽었다.
5* 네 흔들리지 않는 뒷 모습을 보고 신뢰를 배웠다.

1* 네 눈과 입을 깃점으로 한 개의 작은 무지개가 걸렸다.
2* 따뜻한 가슴과 평화스런 얼굴 위에 또 한개의 무지개가 걸렸다.
3* 무지개는 시선이 닿는 곳마다 걸렸다.
4* 행복이었다.
5* 평화였다.
6* 온갖 것이었다.
7* 투명해서 금방 별이 쏟아질 것같은 너의 눈
8* 네 눈 속에 가득한 그리움을 보고
9* 나도 너를 닮았음을 알았다.
10*네 긴 그림자를 밟고 선 나의 시야는 흐려져 왔다.

쫊 평설

이 시는 시적인 형태, 다시 말하자면 시적인 어조나 비유법의 구사는 일정 단계에 올랐으나 완성도가 뒤떨어진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작자는 열정적으로 ‘너’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지만, ‘너’라는 대상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제목조차 ‘너’라고만 했으니 더더욱 미궁에 빠질 뿐이다.
시는 여러 가지 상징을 띠는 다의성(多義性)을 지니고 있을수록 좋은 작품이 된다. 그러나 그 다의성은 정확한 이중구조에서 발휘된다. 일차적인 의미 전달에 실패하고서는 이중구조가 성공할 수는 없다.
상징은 뜬 구름 잡듯이 애매모호한 것이 아니다. 그 의미가 확실하게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생일잔치에 초대받았다면 즐겁기는커녕 꺼림직하기만 할 것이다. 여기서는 ‘너’에 대한 상징이 감추어져 있다. 내용의 전개에서도 아무런 힌트도 얻을 수 없으므로, 제목을 구체적인 것으로 바꾸든지 내용을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 시인들은 구체적인 사물인 오브제를 가져온다. 오브제라는 주인공을 앞세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오브제의 이야기(사실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를 독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받아들이게 되는 다의성이 생기게 된다.
그외의 다른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1연의 내용은 다른 연과 연결지어 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 뒤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너’는 매우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치를 물리적으로 직접 표현하면 격을 떨어뜨린다. 손가락마다 다이아몬드를 끼고 비단옷을 걸친 너에게서 어떻게 고요와 평화, 안도와 신뢰를 느낄 수 있겠는가. 1연의 내용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럴 만한 내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1연을 삭제하든지, 아니면 뒤의 내용을 수정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2연의 4행 ‘무채색의 표정’은 어떤 표정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다른 행에서 쓰인 ‘입가의 미소’ ‘조용한 심장의 박동’ ‘흔들리지 않는 뒷모습’ 등 구체적인 표현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작자 혼자만이 알 수 있는 추상적인 표현은 독자의 시 읽기를 방해함을 유의해야 한다. 3연 6행의 ‘온갖 것이었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3연의 ‘깃점으로’(기점이 표준어) ‘한 개’는 서툰 시어이다. 언어에 대한 감각을 더욱 길러야 할 것이다.
마지막 연은 마무리로써 부적당하다. 2연과 3연의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이 ‘그리움’ ‘그림자’ 등 어둡고 부정적인 분위기로 전환하고 있다. 마지막 연은 앞의 내용을 더욱 강조하고 뒷받침하는 내용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마침표를 찍는 것은 무방하나, 시의 호흡을 끊어놓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 해서 마침표를 전혀 쓰지 않는 것 역시 문제의 하나이다. 시에서는 부호 역시 낱말에 못지않은 기능을 지니고 있다. 시의 흐름에 자연적인 리듬을 주면서, 부호의 적절한 활용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이 시의 ‘너’는 필자의 시각에서 ‘노송(老松)이라는 오브제가 적합한 것 같아, 그것을 제목으로 삼았다. ‘노송’이라는 구체적인 사물과 연결됨으로써 어떻게 ‘너’가 실체화되는지, 구체적인 이미지가 어떻게 떠오르는지, 미세하게 바뀐 부분을 눈여겨 보아주기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상징성을 띠며 이중구조가 획득되어 가는지 살펴보자.


쫈 수정

노송(老松)

네 눈의 고요를 보고 다가갔다
네 입가의 미소를 보고 가까이 갔다
조용한 네 심장의 박동을 들으며 안도했다
흔들리지 않는 네 뒷모습을 보고 신뢰를 배웠다
네 눈과 입에서 작은 무지개를 보았다
따뜻한 가슴과 평화스런 얼굴 위로 또 하나의 무지개를 보았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걸려 있는 무지개는
행복이었다, 평화였다

네 긴 그림자를 밟으며 너를 닮아감을 느꼈다



15. 오브제에 충실해야 한다


대상 작품

파도타기

1* 흰 파도와 같은 샌달이
2* 상점에 진열되어 있다.
3* 나는 걸음을 멈춘다.

1* 발끝을 내려다보며
2* 약간 헐렁해 보이는
3* 운동화를 들어 땅을 차 본다.

1* 아직은 신을 만하구나!

1* 자신에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2* 운동화를 내려다 보았지만,
3* 아직은 신을 만하다.
4* 저녁찬을 사러나온 아줌마들이
5* 간간이 부딪치며 오가고 있다.

1* 다시 바닷가에 버려진
2* 소라껍질 같은 샌달을 바라다 본다.

1* 영화관 간판과 병원빌딩 사이로 노을이 진다.
2* 지는 노을을 향해 걷고 있는 손엔
3* 운동화가 비닐에 쌓여 흔들…

1* 발은 벌써 파도타기를 한다.

쫊 평설

이 작품의 가장 큰 결점은 시에서 선택한 오브제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오브제로 샌들을 선택했다면, 시의 진행은 샌들에 치중해야 한다. 그것을 바다와 연결시키기 위해 첫행부터 ‘흰 파도와 같은 샌들’로 시작함으로써 초점에 혼란을 가져온다. 초심자들은 이렇듯 근사한 표현을 하고자 또다른 오브제를 수식으로 끼워넣는 버릇이 있다.
이 시에서 작자가 하고 싶은 말이 4연에 솔직하게 나타나 있지만, 4연이 삭제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시인 것이다.
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서술하기 보다 이미지나 상징을 통하여 드러낸다. 앞에서도 누누이 강조한 바 있지만, 시가 산문과 구별되어지는 부분이다. 물론 소설에서도 시의 이미지나 상징에 해당하는 묘사라는 것이 있다. 묘사는 반복적인 서술로서, 여러 문장을 통해 내용을 풀어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에서는 단 몇 행의 짧은 문장으로 나타내야 한다. 그것이 시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이 시의 또다른 문제점은 4연에서 작자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전체적인 이미지에서 그 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단성이 없는 자신의 성격을 여름 샌달에 비유하고자 했으나, 그 갈등의 과정이 생략되어 시의 재미가 덜하다. 독자들이 바라는 것은 작자가 겪는 갈등의 모습이다. 독자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 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또 갈등의 골이 깊을수록 독자의 공감대는 커진다. 이 시가 어떤 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연의 4, 5행과 6연의 1행은 군더더기와 같은 표현이다. 시는 압축과 긴장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앞뒤 행이나 전체적인 의미와 연계성을 갖지 못한 문장은 시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그 문장을 꼭 쓰고 싶으면 시의 내용과 연결될 수 있도록 다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불필요한 문장부호는 삼가해야 한다. 6연의 3행의 말줄임표는 꼭 필요한 문장부호가 아니다. 시에서는 문장부호 하나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유의하여 사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시의 제목이 과연 적합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의 주제는 ‘결단성 없는 자신에 대한 갈등’이다. 그것을 하얀 샌들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파도타기’는 작자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제목이다. 파도타기를 하러 바다에 가고 싶다는 단순한 의도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제목은 시의 내용을 대표하거나 보완해주는 것이 좋다.
수정한 시를 읽어보자. 군더더기의 표현을 끌어다 갈등 구조를 만들고, 4연을 되풀이함으로써 갈등을 심화시켰다. 제목은 오브제인 ‘샌들’에서 가져왔다.

쫈 수정

내 마음의 샌들

흰 파도와 같은 샌들이
상점에 진열되어 있다.
나는 걸음을 멈춘다.

저녁찬을 사러 나온 사람들,
해변가를 걷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간간이 부딪치며
나는 먼 바다의 백사장 위에 서 있다

바닷가에 버려진
소라껍질 같은 샌들을 바라다본다.

영화관 간판과 병원 빌딩 사이로 노을이 진다.
그 어느 날의 노을진 바닷가를
나는 걷고 있다.

다시 바닷가에 버려진
소라껍질같은 샌달을 바라다본다.

지는 노을을 향해 걷고 있는 손엔
비닐에 쌓인 운동화가 들어 있다.

발은 벌써 파도타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