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추천한 근작(2015) 발표시
시인이 추천한 근작(2015) 발표시
윤성택 추천_한명원 박시아 김관용
최광임 추천_김명기 고영민 윤중목
유계영 추천_서윤후 이수명 임승유
전욱진 추천_임승유 이혜미 강성은
시인이 추천한 근작 발표시_윤성택 추천시
육필
한 명 원
사람이 죽고 나면
필체는 딱딱하게 굳는다
종이들은 누렇게 썩어가고
변방엔 추깃물이 번져 있다
하얀 원고지 칸칸에
뼈들이 절그럭거린다
휘갈겨 쓴 뼈들
알아볼 수 없는 형체들이
방부제처럼 퍼져 있다
이 정사각형의 관들은
몇 십 만의 필체를 나누어 놓았다
사후가 생기고
육필을 평하는 평론가들이 나타났다
죽은 자의 성격을 풀어낸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성격이 다르다
말없는 성격은
가로와 세로를 바꾸기도 하고
연결해 놓기도 했지만
죽은 자의 필체엔 편집자의 흔적이
곳곳에 끼어들어 있다
뼈들의 특징을 분석해 놓았다
원고지 속의 육필
관속에 누워 있는 뼈들이 말을 건다
뼈대가 튼튼해야 오래간다고
머릿속에서 말이
말을 낳는 산통이 시작된다
- 〈시와소금〉 2015년 겨울호
2월
박 시 하
병든 눈이 내린다
병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편지를 쓰면
검은 꽃이 핀다
다리는 시간을 젓고
팔은 그림자를 짓는다
들판에 핏방울 하나 흘리지 못하고
지은 그림자를 지우며
지운 그림자를 다시 주우며
더 멀리
시간이 빛의 모서리에서 눈을 맞는다
흰 눈은 죽는다
가장 아름다운 곳을 본다
죽음이라는 별이
어두운 먼빛으로 간다
끝나지 않은 들판에서
떠나지 않은 여행을
너의 손을 처음 잡는 것처럼
무슨 선물처럼
열어 보았다
- 〈시로여는세상〉 2015년 겨울호
잠수함
-감기 기운
김 관 용
물에 녹지 않는 알약이 가라앉는다
입을 다물고 있던 기지에서는 쉰 대의 잠수함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가물거리는 빗방울들
눈을 들여다보면 지붕이 잊힌다
목단 이불을 깔고 누워 구름을 상상한다
어뢰, 따뜻한 촉감을 가진 금속
넓은 잎사귀를 앓는다
모로 누워 쓸쓸한 몸으로 흙탕물이 몰려든다
병사들은 전선으로 가고
부력을 얻은 나무들이 달의 표면 어딘가로 사납게 번진다
번지며 허물어진다
쇳덩이 같은 협상을 위해 타전을 하고
창문을 열기 위해 다락을 사용한다
어뢰, 하얗고 넓은 잎사귀
인구 많은 도시에 서서 빙산을 보면 바닥이 오그라들고
철갑을 두른 것 같던 밤의 몽타주를 불러들이면
새벽은 목이 긴 장화를 신고 온다
잘 닫히지 않는 철문이 아이의 내륙풍을 일으켜 세우듯
나지막이 다가오며 우물을 생각한다
생각할 때마다 누군가 웃고 손가락에서 달이 빠져나간다
목요일의 흩어진 손톱처럼
바다 위에 떠 있는 고무대야처럼
이걸 뒤안이라고 해야 하나
맨땅을 깨고 떠오른 잠수함 하나
그예 고여 있던 우물의 윤곽을 파먹고 있다
어뢰, 생각할 때마다 뒤통수가 녹아내리는 알약
- 〈시와사람〉 2015년 겨울호
시인이 추천한 근작 발표시_최광임 추천시
사양斜陽
김 명 기
엄마의 꽃밭 위로 날이 저무네
음지의 호박잎이 저무는 해처럼 늙어가고
오지의 이 마을은 저 호박잎처럼 낡아가네
오가피 뿌리를 파내고
깨밭을 갈아엎고
상추며 실파며 무 대신
온갖 꽃을 심은 엄마의 꽃밭은
더 이상 늙기 싫은 당신 속내 같네
눈망울이 바다를 닮은 주워온 고양이는
이 마을에서 제일 어린 생명
제일 어린 것이 낡아가는 모든 것을
천천히 둘러보네
고양이는 짖지 않아서 좋고
늙은 엄마는 말이 없어서 좋네
또 한 계절의 뜨거운 권태가 가고
가을이 오고 또 가을의 권태가 올 것이네
오래된 선풍기가 쇳소리 내며 돌아가는 저녁
출처를 알 수 없는 바람의 끝을 따라
한 고요가 다른 고요를 깨우며 점점 이슥해지는데
다만 습관 같은 이 적요寂寥만이
더 이상 낡을 줄을 모르네
-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16년 1월호
버찌의 저녁
고 영 민
그때 허공을 들어 올렸던 흰 꽃들은 얼마나 찬란했던가 꺼
지기 전 잠깐 더 밝은 빛을 내고 사라지는 촛불처럼 이제 흰
꽃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 자리에 검은 버찌가 달
려 있을 뿐이다 가장 환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의 속셈, 버
찌는 몸속에 검은 피를 담고 둥근 창문을 걸어 잠근 채 잎새
사이에 숨어 있다 어떤 이는 이 나무 아래에서 미루었던 사
랑을 고백하고 어떤 이는 날리는 꽃잎을 어깨로 받으며 폐
지를 묶은 손수레와 함께 나무 아래를 천천히 걸었을 터, 누
구도 이젠 저 열매의 전생이 눈부신 흰 꽃이었음을 짐작하
지 못한다 지났기에 모든 전생은 다 아름다운 건가 하지만
한때 사랑의 이유였던 것이 어느 순간 이별의 이유가 되고
마는 것처럼 찬란을 뒤로한 채 꽃은 다시 어둠에서 시작해
야 한다 흰 꽃은 지금 버찌의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 그리고
저 버찌의 오늘은 얼마나 검은가
-시집 『구구』, 문학동네, 2015.
사람
윤 중 목
사람들,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하루의 수고가 가파를수록
눈길 부디 나직한 사람들이
그리워진다, 문득 해 떨어져
골목골목 담벼락 외등 켜질 때면
그네들 얼굴도 하나둘씩 켜진다
밥 냄새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그네들 말소리 귀를 두드린다
사람들 그리움이 갈근갈근
마른 목젖에 걸리운 저녁이면
천상 나도 사람인가 보다, 사람
-시집 『밥격』, 천년의 시작, 2015.
시인이 추천한 근작 발표시_유계영 추천시
소년성(小年性)
서 윤 후
가는 팔목은 흰 이마와 잘 맞아떨어졌다. 엎드려 있는 나를 울고 있다고 여기던 사람들. 사실 몸을 숙이는 건 쉬운 일이었다. 평면을 벗어나는 몸의 마지막 표정 그래프는 날뛰고, 달력은 단호하며 날씨는 마음과 나란해지기 쉬운 기울기였다. 가내수공업이 끝날 줄 모르던 밤, 졸면서 만든 규격이 나를 엉성하게 만들었다. 근사한 걸작이 곧 태어날 거라고 장담하면서, 나는 맨 처음으로 수치심을 길렀다. 잠든 나를 깨워 계집애 같은 사내아이를 어쩐지 실수라고 여기면 나는 나의 목격자가 되었다. 증언이 필요한 꿈결과 이름에 써버린 행운과 주입된 슬픔으로 살아갈 온 마음은 시험판이었다. 치명적인 오류지만 결코 멈춰버리진 않는 그 방 안에 나는 설계된 적 없는 자세로 처음 나를 감지한다. 엎드려 있으나 잠이 비껴가고 슬픔으로 젖지 않는 주소로 나는 배달되었다. 하나뿐인 나는 멸종 위기가 아니다.
- <시인동네> 2015년 겨울호
물류 창고
이 수 명
우리는 물류 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 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 버렸지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
무얼 끌어내리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담당자처럼 걸어 다녔지
바지 주머니엔 볼펜과 폰이 꽂혀 있었고
전화를 받느라 구석에 서 있곤 했는데
그런 땐 꼼짝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
물건의 전개는 여러모로 훌륭했는데
물건은 많은 종류가 있고 집합되어 있고
물건 찾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물건에 손대는 우리의 전진도 훌륭하고
물류 창고에서는 누구나 훌륭해 보였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누군가 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서서
등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몇몇은 그러한 누군가들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숙이라 쓰여 있었고
그래도 한동안 우리는 웅성거렸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란하기만 했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더 계속 계속 잠잠해지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
- <세계의 문학> 2015년 겨울호
결석
임 승 유
식구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엄마가 들어오고 오빠가 들어오고
조카가 밥을 먹고 있는 식탁에서 큰소리를 치면 누가 좋아할까 생각 안 한 건 아니지만
나는 열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나타나는 질문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내가 없는 곳에서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건 반칙이니까
열심히 나타나야지 외할머니 얼굴은 믿음직스럽고 나는 오줌이 마렵다 치마 속에 치마가 있고 치마 속에 치마가 있으니 오줌을 누겠습니다 장화 한 짝을 잃어버리겠습니다 연습장에 맨발을 그려놓았더니 조카가 이 방 저 방을 넘기며 돌아다닌다
벽 속에 온도계를 묻었다 침이 묻어 있고 끈적끈적하고 삼키면 죽을 것 같은 비료를 먹고 오늘 기온은 어제보다 올라가겠습니다 건조대에서 말라가는 외투를 구름이 걸치고 나가면
갈 데가 없어졌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찬장 문을 열면 반짝거리는 그릇들이 있는 것처럼 나는 누워서 지냈다
- 임승유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 지성사, 2015.)
시인이 추천한 근작 발표시_전욱진 추천시
구조와 성질
임 승 유
창문을 그리고
그 앞에
잎이 무성한 나무를 그렸다
안에 있는 사람을 지켜주려고
어느 날은
나뭇가지를 옆으로 치우고
창문을 그렸다
한 손에
돌멩이를 쥐고
- 임승유 시집,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지성사, 2015.)
넝쿨 꿈을 꾸던 여름
이 혜 미
떨어진 능소화를 주워 눈에 부비니
원하던 빛 속이다
여름 꿈을 꾸고 물속을 더듬으면
너르게 펼쳐지는 빛의 내부
잠은 꿈의 넝쿨로 뒤덮여 형체를 잊은
오래된 성곽 같지
여름을 뒤집어 꿰맨 꽃
주홍을 내어주고 안팎을 바꾸면
땅속에 허리를 담근 채 다른 자세를 꿈꾸는
물의 잠시(暫時)
꽃은 물이 색을 빌려주는 꿈
기묘한 돌기를 내뿜으며
옛 꽃들에 둘러싸인 검은 돌벽 위로
무수히 가지를 뻗는 여름의 넝쿨
눈 없는 잎사귀들처럼
뜨거운 꿈의 벽을 기어오르면
눈동자 위로 쏟아져 내리는
물의 손가락들
입술을 뒤집고 숨을 참으니
원하던 꿈 속, 물꿈 속
- 이혜미, <시산맥> 2015년 가을호
사운드
강 성 은
겨울밤
복도에는 복도의 소리
빈방에서는 빈방의 소리가 나고
거울 속에는 거울 속의 소리가 난다
눈길에 장화를 신은 남자가
나무를 끌고 가는 소리
겨울
음악은 사운드지
네가 말했다
쓸모없는 소리
내가 말했지
너의 불안에도 소리가 있어
귀뚜라미 소리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누가 오나 보다
- 강성은, <세계의 문학> 2015년 겨울호
출처 :월간 시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