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해피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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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 투게더 (春光作洩)
또 다른 시작에 대한 다짐은 얼마나 부질없으랴
때로는 영화는 친구와도 같지요. 영화는 우리가 지칠 때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지루해할 때 활력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제대로 맞아 떨어질 때, 그래서 우리가 절망의 늪에서 헤매일 때 영화는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 보내주기까지 하지요.
저로 하여금 갈 길이 바쁜데 자꾸 뒤돌아보게 하는, 피할 수도 있건만 자주 기꺼이 즐겨서 자초하는 아픔, <해피 투게더>입니다.
황량한 남미의 고속도로에 서서 바람에 휘날리는 옷깃을 여며가며 두 남자가 싸우고 있습니다. 이구아수 폭포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고 자동차는 고장났습니다. 권태에 겨운 표정으로 보영은 “너와 있으면 답답하다”고 내뱉고는 휘적휘적 떠나가고 홀로 남겨진 요휘는 얼굴을 감싸쥡니다.
요휘가 삐끼로 일하는 탱고바에 보영은 백인남자와 함께 나타나 요휘가 보는 앞에서 흐느적거리며 춤을 추고 키스를 나누고 그리고 아마도 호텔로 가는 택시를 함께 타고 떠납니다.
질투에 지치고 기다림에 시든 요휘, 이제는 보영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지요. 백인 남자에게 흠씬 두들겨맞아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보영은 요휘에게 와서 허물어져 안기고 요휘는 아무런 저항도 못해보고 그를 속수무책 받아 안습니다. 보영은 “우리 다시 시작하자”고 말합니다. 다시 시작한 그들은 함께 행복(happy together)할 수 있을까요?
사랑. 마음 안에 가득 차 있을 때는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었다가도 사랑... 하고 어떤 말이나 글로 꺼내놓으면 확 의미가 변질되어 버리거나 그 가치가 급격히 희석되어 버리는, 또 너무 흔하게 쓰여서 식상하다 못해 징그럽게 느껴지는 말, 사랑.
사랑학의 대가 왕가위는 한번도 심각하게 정색을 하고 사랑을 말하지 않지요. 그는 <해피 투게더>에서 누구나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그러나 언제보다도 더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의 화면과 짙은 서정의 향취속에서 사랑, 그 엇갈림과 쓰라림과 쓸쓸함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흑백모노톤과 컬러가 교차되며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모노톤은 상실감과 우울함의 느낌을, 컬러는 즐거움과 행복의 느낌을 극대화시키고 있지요. 이 영화에서의 색채감은 정말이지 경탄할만치 충격적이고 매혹적인데요, 몽환적인 느낌의 어둡고 밝은 빛 그리고 각각 다른 현란한 색채들은 인물들의 마음의 움직임이나 대사로 표현하기 힘든 섬세하고 미묘한 정서의 결을 표현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저절로 기억과 상처와 두려움과 덧없음의 현기증나는 이미지의 세계로 빨려들어가게 하는 마력을 발휘하지요.
어떤 일은 이상하리만치 똑같은 양상으로 반복됩니다. 요휘는 바람처럼 그렇게 돌아온 보영이 수틀리면 바람처럼 또 떠나갈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지요. 그래서 보영의 여권을 숨기고 보영이 외출하는 것조차 싫어서 선반 가득 들이차게 담배를 사서 쌓아두기까지 하면서 안간힘을 쓰지만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슬픈 예감은 틀리는 적이 없지요.
왕가위는 이런 순간에조차 노래가사 정도의 멋도 부리지 않고 그저 “난 보영이 낫지 않기를 바랬다. 그 애가 아팠을 때 가장 행복했다”라는 단순한 독백으로 요휘의 절망적으로 안타까운 속내를 묘사할 뿐입니다. 요휘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보지만 결국은 피하고 싶었던 단 하나의 파국으로 들어서는 자신의 사랑 앞에서 ‘슬픈 예감의 정확성’을 씁쓸하게 재확인합니다. 요휘는 보영이 돌아올 때 거절할 방법을 몰랐던 것처럼 떠날 때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항용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더 고통스러운 법. 진실로 진실로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려봤던 이는 알 것입니다.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쓰리고 아픈 형벌인지를, 시간은 얼마나 더디 흘러가면서 온 몸의 세포 하나 하나와 영혼과 정신을 질기디 질기게 칭칭 옭아매며 깡그리 감금해버리는지를...
그러나 그 가혹한 시간의 한 가운데를 통과할 때에 어찌 알 수 있을까요. 기다릴 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 그 때가 진정 행복한 때라는 것을, 그리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던 그 울분과 자학으로 점철된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내밀한 ‘나 자신’으로 사는 순간임을...
아마도 먼 훗날 사랑도 증오도 이별도 다 멀어진 채 마치 김빠진 사이다처럼 심드렁하게 내 생이 아닌 것처럼, 마치 구경꾼처럼 스쳐지나가듯 생을 살아내며 목적지 없는 무료를 천연덕스럽게 감당하고 있어야 하는 어느 흐린 날 문득 예리한 통증처럼 그걸 깨닫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만남과 헤어짐은 반복되고 모두 홀로 남겨집니다. 또 다른 시작에 대한 다짐은 얼마나 부질없으며 또 얼마나 많은 헤어날 수 없는 그리움과 상처를 예비하던가요. 그러나 <해피 투게더>는 말 그대로 행복하게 다시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그것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이르러 그들의 마음이 모두 함께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종반부. 보영은 텅 빈 요휘의 방에서 폭포수가 그려진 전등을 내려다보며 불현듯 폭포에 가 있을 요휘를 그리워하며 흐느끼고, 세상의 끝에 있는 등대에 간 요휘의 친구 대만청년 장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요휘의 흐느낌을 들으며 요휘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요휘는 타이페이의 야시장에서 우연히 장의 부모가 하는 포장마차에서 그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를 다시 만날거라고 예감합니다. 그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만 바로 그 순간 함께 있는 것이지요.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가장 가까이 있다고 말하는 이 역설은 얼마나 쓸쓸하던지요. 마지막 순간 타이페이시를 가로 질러 달려가는 전철을 따라 박수소리와 함성과 함께 울려 퍼지는 목메인 듯한 소망을 담은 데니 청의 happy together는 어느 낯선 역에선가 그들이 다시 만날 수도 있으리라는 암시일까요.
덧붙여서
1. 97년 7월. 공륜은 ‘국민정서에 반함‘이라는 사유로 이 영화의 수입을 금지했습니다. 해서 왕가위는 깐느에서 감독상을 받았던 그 영화와는 다른 아시아 버전을 들고 일년을 더 기다려서 겨우 한국의 관객을 찾을 수 있었지요. 스틸 사진에서 봤던 그 숱한 아름다운 장면이 한국판 <해피 투게더>에서는 뭉텅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일년 동안의 저의 분기탱천과 한숨과 근심을 어이 다 말할까요.
2. 이미 전작들을 통해 탁월한 음악 선곡 실력을 보여주었던 왕가위는 탱고의 거장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유족들을 찾아가 “그의 음악이 없다면 나의 영화는 죽은 것이다”라고 절박하게 호소해서 겨우 그의 음악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의 노력은 충분히 보상받은 것 같네요. 피아졸라의 탱고 선율은 <해피 투게더>에서 사운드트랙 그 이상입니다. 그것은 홍콩과는 지구의 정 반대편에 있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라는 도시의 리듬이면서 인물들의 감정이고 더 나아가 이 영화의 정서입니다.
3. 허무와 퇴폐가 공존하는 듯한 묘한 매력의 장국영. 깊이를 짐작 못할 어두운 무표정으로 깊은 슬픔을 담아내는 양조위. 이 두 아름다운 남자들을 실컷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매혹 그 자체입니다.



